# 54
붙고 싶은 상대와 피하고 싶은 상대 (2)
하지만 서유림은 끝까지 반응하지 않았다. 보여줄 게 있다면 케이지 안에서 보여주면 되니까.
대신 아무 소리도 안 들리는 사람처럼 시선을 다른 곳에 두었다. 마치 ‘또 누가 있나?’ 하는 식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가 문득 한 사람의 얼굴에서 시선이 머물렀다. 마치 명상이라도 하듯 눈을 감고 있는데, 얼굴에 커다란 칼자국이 세 개나 보였다.
칼자국 때문일까? 이상하게 그 사람이 자꾸 눈에 밟혔다. 어딘가 모르게 풍기는 분위기가 달랐다. 마치 잘 벼려진 한 자루 검 같다고 해야 할까?
그런데 서유림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다른 선수들도 유독 칼자국 사내에게 신경을 쓰는 듯했다.
왜 그러나 했는데 이유가 있었다.
서유림을 놀려대던 사내 둘도 흥미를 잃었는지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그러다가 칼자국 사내를 발견하고는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도상국인가 뭔가 하는 새끼가 저 새끼 아냐?”
그러자 다른 선수들이 깜짝 놀라서 서로 웅성웅성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서로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일 텐데 저러는 것을 보면 칼자국 사내 덕분에 완벽한 공감대가 형성된 듯했다.
서유림의 옆에 있던 선수도 마찬가지였다. 서유림을 바라보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혹시나 했는데 정말인가 보네요.”
뭔데? 도상국이 누군데? 설마 나만 모르는 거야?
그러는 사이 호랑이 눈 사내가 칼자국 사내를 콕 찍어서 물었다. 그것도 거친 목소리로.
“이봐. 네가 여고생을 강간하고 죽였다는 그 도상국 맞지?”
순간 서유림은 자신도 모르게 움찔했다.
‘여고생 강간? 사람을 죽여?’
어쩐지 풍기는 분위기가 다르다 했는데, 그래서였던 모양이다.
물론 선입견인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의 시선은 어느새 칼자국 사내에게로 향했다.
칼자국 사내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는 듯 여전히 눈만 감고 있었다. 그 표정에서 왠지 모를 강자의 여유가 느껴졌다.
서유림은 선수들이 웅성거리듯 나누는 대화를 통해서 도상국에 대해 대충은 알 수 있었다.
어려서부터 보육원에서 자란 도상국은 올해 27살인데 교도소에서만 6년을 보냈다고 했다. 성인이 된 이후 대부분 시간을 교도소에서만 보낸 것이다.
“와, 씨발. 살벌하네. 나도 착하게 살지는 않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런 새끼하고 경기를 해야 하다니. 야, 도상국. 너 귀머거리야? 사람이 말을 하면 듣는 척이라도 해야 할 것 아냐?”
호랑이 눈 사내가 계속해서 도상국을 자극했다. 왜 저러나 싶을 정도로.
도발이 심하다 보니 오히려 겁먹은 사람처럼 보인다.
왜 그런 것 있잖아. 어둠이 무서우면 그걸 이겨내려고 이유도 없이 소리를 꽥꽥 지르는 것.
정말로 용감한 사람은 그런 상황에서 오히려 조용하다.
도상국이 그런 사람 같았다. 호랑이 눈 사내가 거칠게 도발하는데도 전혀 흔들림이 없다.
그러자 호랑이 눈 사내가 제 풀이 지친 모양이다.
“씨발, 내가 이래서 부모 없이 자란 새끼들을 싫어한다니까. 도대체가 예절이 없어요, 예절이.”
이런! 건들지 말아야 할 부분을 건든 모양이다. 가만히 듣기만 하던 도상국이 ‘부모’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순간 눈을 번쩍 떴다.
서유림은 순간 소름이 살짝 돋았다. 사내의 눈을 보는 순간 ‘독사 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정말 독사의 눈 같았다. 가늘면서도 날카롭게 찢어진 눈매는 물론이고 번들번들 빛나는 눈빛조차도 그랬다.
서유림이 놀랐는데 거친 사내인들 별수 있겠는가? 도상국이 눈을 뜨자 순간적으로 몸을 움찔했다. 스스로도 자신의 실수를 느낀 모양이다.
하긴, 설레발이 너무 심했다. 아무리 살인범이라지만, 고아로 자란 사람에게 ‘부모 없이 자란 새끼.’가 뭐냐?
그런데 도상국이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서유림은 물론이고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도상국의 입술에 집중되었다.
피식!
도상국이 가볍게 웃었다. 그 웃음에는 두려움도, 흥분도 전혀 느낄 수가 없었다. 그저 가소로움만 담고 있었다.
“웬만하면 밖에서 나 만나지 마라. 만나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달아나고. 제발 부탁한다.”
그것이 전부였다. 도상국이 다시 눈을 감았다.
하지만 도상국이 남긴 분위기는 눈을 감지 않았다. 마치 전염병이라도 된 것처럼 대기실 전체를 휘감아 돌았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도상국과 개인적으로 트러블이 만들어져서는 안 된다는 두려움.
호랑이 눈 사내도 마찬가지였다. 이대로 물러서면 꼬리 내리는 꼴밖에 안 되는 걸 빤히 알 텐데 더는 나대지 못했다.
그저 혼잣말 비슷하게 “씨발, 분위기 더럽게 잡네.” 한마디 하고는 조용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서 앉았다.
잠시 후 대진표가 발표되었다.
그러자 다들 우르르 달려가서 대진표를 확인했다. 특히 미들급 출전선수들의 동작이 빨랐다. ‘허겁지겁’이라는 단어가 생각날 정도로 서둘렀다.
이유는 간단했다. 다들 도상국과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뿐이었다.
서유림도 사실 도상국은 피하고 싶었다. 이길 자신은 있었지만, 그냥 기분이 찜찜했다. 똥은 더러워서 피하는 거라는 식으로.
한편으로 누가 도상국과 붙게 될지도 궁금했다.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도상국을 도발했던 호랑이 눈 사내가 대진표를 확인하자마자 자신도 모르게 말을 내뱉었기 때문이다.
“이런 씨발.”
꼴좋다. 멋모르고 나대더니 제대로 걸렸구나.
반면 다른 한 놈은 만면에 웃음을 지었다.
“냐하하. 서유림하고 걸렸구나! 오늘 시작이 좋은걸? 하하.”
놈은 이름이 김무영이다.
서유림도 내심 잘됐다 싶었다.
언제까지 그리 기쁘게 웃을 수 있는지 보자고.
잠시 후 장내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회시작을 알림과 동시에 첫 출전선수를 옥타곤으로 불러들였다.
그런데 시작부터 도상국과 이영옥의 이름이 불렸다.
“이런 씨발. 그것도 첫 번째 순서야? 오늘 일진이 안 좋네.”
거친 인상의 사내가 오만상을 찌푸리며 대기실을 나섰다. 반면 도상국은 ‘잠시 화장실 다녀올게.’ 하는 식으로 조용히 일어나서 사라졌다.
대기실에서도 벽에 걸려있는 커다란 TV를 통해서 옥타곤에서의 대결을 지켜볼 수 있었다.
다들 몸을 풀다 말고 TV에 시선을 집중했다.
도상국을 향한 관심 때문이었다.
얼마나 대단한 놈일까?
과연 이영옥이 도상국을 무너뜨릴 수 있을까?
도상국이 입장하자 장내가 술렁거렸다. 제법 많은 관중들이 도상국에 대해서 알고 있는 듯했다.
먼저 양 선수 소개가 있었다.
선수 소개는 선수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한다. 자신을 조금이라도 강하고 멋지게 보이기 위해서 스스로 별명 같은 것을 지었다.
이영옥의 별명은 ‘살인 망치’였다. 상대에게 최대한 공포심을 주기 위해서 지은 별명 같았다.
반면 도상국은 아무런 별명도 없었다. 소개멘트 조차도 간단했다.
하긴, 그런 과거가 있는 사람이라면 소개멘트를 자극적으로 만들수록 역효과만 나겠지.
곧바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그와 동시에 대기실에서 짧은 신음소리가 소나기처럼 터져 나왔다.
“앗!”
“어어!”
“이런!”
대기실 밖의 분위기도 마찬가지였다. 관중들의 짧은 탄성소리와 함께 일순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주심의 ‘시작!’ 선언과 동시에 경기가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도상국이 냅다 달려가더니 공중으로 붕 날아오르며 이영옥의 턱을 무릎으로 찍어버렸다. 이영옥은 주먹 한 번 뻗어보지 못한 채 그대로 쿵 쓰러졌다.
3초나 걸렸을까?
어찌나 허무하던지 말도 나오지 않았다.
주심이 재빨리 이영옥의 상태를 확인하고 의료진을 불러들였다. 그제야 막혔던 숨이 토해지듯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대기실 안도 마찬가지였다.
“씨발, 저 새끼가 약한 거야, 저 새끼가 강한 거야?”
“저렇게 당하면 실력을 알 수가 없잖아.”
대기실 선수들도 관중들도 자신들이 기대했던 결과가 아니자 크게 실망하는 분위기였다.
그래도 대회는 계속 진행되었다. 서유림도 다섯 번째 순서로 옥타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장내에서 제법 술렁였다. 특히 여성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서유림의 귓속에 그런 웅성거림이 제법 또렷하게 들려왔다. 정령 아리안 덕분에 청력이 필요 이상으로 발달된 것이다.
“와! 정말 잘생겼다!”
“헤드기어를 썼는데도 얼굴에서 빛이 나네!”
“와! 저 어깨 좀 봐! 어쩜 좋아! 딱 내 스타일이야.”
대부분 웅성거림이 그런 식이었다. 하나같이 외모에 대한 감탄이었다.
서유림의 상대는 온몸에 문신이 가득한 김무영이었다. 인물이 못난 수준은 아니지만, 그래도 객관적으로 서유림의 상대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 웅성거림의 대상은 서유림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지난번 경기에도 그랬었다. 서유림이 장내로 들어서자 여자들의 웅성거림이 커진 것이다.
워낙 이쪽에 경험이 없어서 선수가 입장하면 원래 그러는가 보다 했는데, 유독 서유림이 입장할 때만 저런 감탄사가 크게 터져 나왔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워낙에 깡마른 체형이라서 사람들의 비웃음만 사던 외모였는데, 저런 감탄사를 듣게 되다니.
이거 나쁘지 않은걸!
이 기분에 좀 더 취해있고 싶다. 그런데 케이지에 들어가자마자 상대선수인 김무영이 듣기 싫은 목소리로 흥을 깨뜨린다.
“개새끼. 얼굴을 곤죽으로 만들어주지.”
아! 그렇게? 오케이! 접수!
서유림도 자신을 소개할 멘트를 직접 적어서 진행자에게 전달했다. 진행자가 그 멘트를 그대로 불러주었다.
“언제 내 주먹이 날아갈지 모른다. 상대는 눈도 깜빡이지 마라. 지옥에서 태어난 송곳 파이터. 명진식품 소속 서. 유. 리~~임!”
적을 때는 나름대로 괜찮아보였는데, 막상 진행자의 멘트를 통해 들으니 어딘가 모르게 유치한 느낌이다.
아! 닭살 돋아. 아무래도 조금 수정을 해야겠다.
경기가 시작되었다.
김무영은 대기실에서 케이지에 올라와서까지 그렇게 기세를 올리더니 막상 경기가 시작되자 무척 신중한 자세를 했다.
서유림이 예선에서 보여준 한 방 펀치를 조심하는 듯했다.
쯧쯧, 그런다고 결과가 달라질 것 같으냐?
그렇다고 서두를 이유도 없다. 경기 일찍 끝낸다고 집에 일찍 보내주는 것도 아니고.
천천히 시간 끌면서 실전감각이나 충분히 끌어올리면 되겠지.
서유림은 예선 때와 변한 점이 전혀 없었다. 이따금 내미는 펀치도 힘이 전혀 실리지 않았다. 김무영의 표현을 빌리자면 ‘족보에도 없는 간보기 펀치’ 딱 그것이었다.
그런데 펀치의 힘을 너무 뺐나? 김무영이 슬슬 자신감이 생기는 모양이다. 1분 정도가 흐르자 김무영의 공격이 조금씩 거칠어지기 시작한다.
역시 공격이 커지면 빈틈도 커지는 법.
이제 끝낼 때가 된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하다. 왜 유독 상대선수의 코 부분이 눈에 환히 들어오는 거지? 하긴, 헤드기어를 써서 거기 말고는 보이는 곳도 없지.
굳이 거기를 골라 때릴 필요는 없지만, 또 그렇다고 굳이 거기를 피해서 때릴 이유도 없었다.
빈틈이 보이는 순간 크로스 카운터를 가볍게 집어넣었다. 힘을 뺀 대신 배복성 관장에게서 배운 펀치 자세를 멋지게 소화하려고 노력했다.
그리고는 연달아서 주먹을 뻗었다.
원투!
파팟!
연속된 스트레이트가 김무영의 안면에 정확하게 들어갔다. 힘을 완전히 뺐기 때문에 김무영은 뒷걸음질 치면서 제법 버텼다.
코피가 터졌지만, 쓰러질 정도의 충격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거 내가 일부러 그런 것 알지?
서유림의 펀치가 다시 원투 스트레이트를 뻗었다. 이번에는 제법 힘이 실린 펀치였다.
김무영이 고목나무 쓰러지듯 뒤로 나자빠졌다.
쿵!
그와 동시에 관중들이 와! 하고 환호성을 터뜨렸다. 심장을 울리는 환호성이었다.
하긴, 내 크로스 카운터와 스트레이트 펀치가 멋지긴 했지. 배복성 관장에게서 배운 자세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고 자신했다.
해설자들도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정말 멋진 원투 스트레이트였습니다. 그 전의 크로스 카운터도 좋았고요.”
“타이밍이 예술이군요. 첫 번째 크로스 카운터가 전혀 짐작하지 못한 순간에 터졌어요. 그런데 김무영 선수, 정신을 못 차리고 있군요. 큰 부상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요.”
“저렇게 뜻밖의 크로스 카운터에 당하면 힘이 전혀 실리지 않아도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죠. 서유림 선수. 자신을 송곳 파이터라고 소개했는데, 정말 송곳 같은 크로스 카운터였습니다.”
“저 선수, 예선에서도 멋진 크로스 카운터를 선보였었죠?”
“맞습니다. 두 경기 모두 워낙 짧은 순간에 결정타가 터져 나와서 실력을 가늠하기 힘들었는데, 오늘 보니 확실하군요. 펀치력도 나쁘지 않은 것 같고, 무엇보다도 타이밍이 예술입니다. 격투기 감각이 남다른 선수가 분명해요.”
“서유림 선수! 이번 주먹이 운다 대회의 강력한 다크호스가 되겠는걸요.”
“그렇습니다. 사실 오늘 대기실에서 선수들끼리 나누는 대화를 조금 엿들었는데요, 서유림 선수 인기가 무척 좋더군요.”
“인기가 좋다니요?”
“모든 선수들이 1회전에서 서유림 선수와 붙기를 희망했습니다.”
“붙고 싶은 선수 1위라. 아하하. 한마디로 만만하게 보였다는 거로군요.”
“맞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게임을 계기로 상황이 바뀌겠는걸요. 다음부터는 피하고 싶은 상대 1위가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서유림 선수. 앞으로 관심을 갖고 지켜볼 선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