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붙고 싶은 상대와 피하고 싶은 상대 (1)
바닥에 깔린 아리아나가 매끈한 두 다리를 힘껏 차올렸다. 서유림의 목을 두 다리로 감아 조르기 위해서 안간힘을 썼다.
MMA방식의 트라이앵글초크와 유사한 기술이었다.
트라이앵글초크만이 아니었다. 기무라, 암바, 니바, 길로틴초크, 암트라이앵글 등 요정무술은 MMA방식 격투기의 서브미션과 비슷한 게 너무도 많았다.
서유림이 상체를 바짝 숙이며 방어했다. 아리아나의 다리는 서유림의 어깨에도 못 미친 채 주르르 미끄러져 내려왔다.
아리아나가 다시 몸을 튕겼다. 어떻게든 자세를 역전시키기 위해서 사력을 다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서유림이 무게중심을 옮겨가며 방어하니 매번 허탕이었다.
서유림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리아나의 다리가 벌어진 틈을 노리고 얼른 다리를 빼며 옆으로 돌았다. 그리고는 아리아나의 팔을 잡고 기무라처럼 뒤쪽으로 꺾었다.
“어머나!”
아리아나도 방어동작이 좋다. 어깨를 바닥에 붙이며 팔을 보호했다.
하지만 여전히 서유림에게 유리한 자세다. 팔꿈치 공격이 허용되는 MMA방식이었다면 아리아나의 얼굴을 순식간에 곤죽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하지만 이건 그냥 연습일 뿐이니까.
그것도 기분 좋은 연습.
잔뜩 짓눌려진 아리아나의 가슴이 느껴졌다. 워낙 봉긋한데다가 탄력도 좋아서 무척 자극적이었다.
물론 그런 자극을 초월한지 오래되었지만.
아주 사소한 덤 정도라고 할까?
요정무술을 훈련하다 보면 손으로 가슴을 움켜쥐기도 하고, 얼굴로 가슴을 짓누를 때도 있다.
아리아나 역시 서유림의 사타구니를 자주 움켜쥐었다. 그럴 때마다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아팠다.
물론 서유림도 아리아나도 고의는 없다. 동작을 취하다 보면 무의식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또는 실수이거나.
요정무술에는 사타구니를 움켜쥐는 식의 공격도 있긴 하지만, 서유림을 상대로는 그런 동작을 고의로 하지 않았다.
때문에 서유림이나 아리아나나 그런 실수는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어머, 실수!’ 같은 말도 하지 않았다. 손목이나 팔뚝을 움켜쥔 것처럼 생각하면 그만이니까.
서유림이 다시 자세를 바꾸었다. 마치 말을 타듯 아리아나의 배를 완전히 올라탔다.
“휴우, 잘하셨어요.”
그제야 서유림이 아리아나를 자유롭게 풀어주었다.
아리아나가 헝클어진 머리를 단정히 하면서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유림씨는 성장이 정말 빠르세요. 놀라울 정도로.”
서유림도 요정무술만 생각하면 흡족했다. 아직 아리아나에게는 한참 못 미치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엄청난 성장을 이루었다.
인간계에서 타격을 배우는 것보다 성장속도가 월등하게 빨랐다.
하긴, 인간계에서 1개월을 지내면 정령계에서는 5개월을 지내는 셈이니까 훈련 시간이 월등히 많긴 했다.
게다가 아리아니의 교육방식이 무척 체계적이었다.
요정무술은 무려 수천 년을 이어온 전통무술이라고 했다. 당연히 극도로 발전할 수밖에 없고, 가르치는 방식도 체계적일 수밖에 없다.
서유림이 실수할 때마다 무엇이 문제인지 정확히 짚어내고, 그것을 보완할 방법도 정확히 찾아냈다.
아리아나의 가르침도 무척 헌신적이었고, 서유림의 습득 능력도 빨랐다. 이런 식이라면 조금만 더 지나면 요정무술 세계챔피언도 가능할 것 같았다.
하지만 서유림의 표정은 이내 시무룩해졌다. 요정무술이 빠르게 성장하는 건 좋은데 더욱 중요한 능력의 성장이 멈추었기 때문이다.
아리아나가 서유림의 표정을 재빨리 확인했다.
아니, 아리아나는 늘 서유림을 보고 있었다. 서유림이 아리아나를 바라보듯 아리아나 역시 모든 관심은 서유림 뿐이었다.
하긴, 이 넓은 숲에 믿고 의지할 존재라고는 둘뿐이니까.
“너무 실망 말아요. 정령계에서 성장판을 여는 것은 누구에게나 힘든 일이에요. 성장판만 열면 오히려 지금까지보다 더 빠르게 성장하게 될 테니까 힘내요.”
기본 능력이 오를 수 있는 한계치는 999.
여러 능력치 중 단 하나라도 999가 되면 새롭게 잠재력, 맷집, 항마력, 회복력 등의 잠재능력이 형성된다고 했다.
그래서 정령계에서는 998이라는 숫자를 성장판이라고 불렀다.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조금 의아했었다.
이곳 정령계의 능력치가 나의 잠재력이라고 했는데, 그 잠재력 안에 또 다른 잠재능력이 존재한다고?
하지만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다. 껍질 안에 또 다른 껍질이 있을 수 있고, 알맹이에 안에 또 다른 알맹이가 있을 수 있으니까.
아니, 오히려 그게 당연한 거였다. 어쩌면 잠재력 안에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하고, 그 안에 또 다른 세상이 존재하는 식으로 계속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양파껍질처럼 말이다.
다만 경험하지 못해서 모르고 있는 것일 뿐이다.
어쨌건 성장판은 다른 요정들도 모두 겪는 일이라고 했다. 그 성장판을 열어야만 비로소 어린이에서 어른이 된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성장판을 만나서 성장이 멈췄다는 것은 오히려 설레어야 할 일이었다. 벽을 넘으려면 일단은 그 벽을 만나야만 하는 거니까.
망막을 움직여서 기본 능력치를 확인했다.
[레벨 278]
근력 : 983
순발력 : 982
체력 : 998
감각 : 521
마력 : 33
서유림의 능력 중 체력이 지금 딱 998로 성장판에 있었다. 즉, 체력이 1만 더 오르면 잠재능력이라는 새로운 성장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벌써 한 달이 넘도록 이놈이 꼼짝도 않고 있는 것이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세요. 우리 만난 지 이제 겨우 6개월 정도밖에 안 됐어요.”
맞는 말이다. 여유를 가져야 한다. 마음만 급하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잖아.
“고마워, 아리아나.”
마음을 비우고 다른 창들을 열어보았다.
특수능력은 전과 달라진 게 전혀 없었고, 마법창의 능력은 조금씩 변화가 있었다.
[마법]
체력흡수 : 33
정령소환 : 11%
체력흡수는 마력과 비례해서 함께 올라갔다. 정령소환력도 답답할 정도로 느리긴 하지만 아주 조금씩 오르긴 했다.
“인제 그만 자요. 저 피곤해요.”
아리아나는 역시 착하다. 내가 우울할 때 어떻게 해야 기분을 풀어줄 수 있는 지도 잘 안다.
그래. 다 잊자. 욕심 부린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함께 작은 움막으로 향했다. 서유림이 30분도 안 걸려서 뚝딱뚝딱 만든 임시 거처였다.
크기는 당연히 작았다. 서유림과 아리아나가 꼭 껴안아야만 함께 잘 수 있을 정도로.
그 좁은 움막에 어떻게 들어가느냐고?
그거야 무척 쉽지.
서유림이 움막 대들보를 들어올렸다. 그러자 움막 전체가 마치 뚜껑처럼 올려지고, 그 아래 좁게 만들어진 바닥이 드러났다.
아리아나가 좁은 바닥에 반듯이 누웠다.
서유림도 움막을 들어 올린 채 아리아나 곁에 바짝 붙어서 누웠다. 아리아나가 요정망토로 덮어주면 움막을 뚜껑처럼 덮는다.
취침준비 끝!
하지만 그냥 자면 섭섭하지. 요리에도 양념이 필요하듯 인생에도 양념이 필요하고, 그건 잠자리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아리아나를 가질 수는 없지만, 남녀관계가 꼭 섹스가 있어야만 알콩달콩한 것은 아니니까.
“까르르. 거긴 만지지 마요.”
아리아나도 간지럼을 제법 탔다. 특히 허리에서 옆구리로 이어지는 라인.
알지?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지는 것. 게다가 저런 웃음을 섞어서 하지 말라고 하면 그건 ‘더해줘.’로 들린다는 것.
“거기가 어디야? 여기 말하는 거야?”
“까르르. 간지럽다니까요. 자꾸 그럴 거예요?”
아라아나의 웃음 섞인 애교 덕분에 기분이 확 좋아졌다. 내가 이 맛에 정령계에서 머문다니까.
“아니, 정확히 어디를 만지지 말라는 건지 알아야지. 여기?”
“아니요. 옆구리. 까르르. 하지 말라니까요.”
얼마 전에야 알았다. 아리아나도 내숭이 있다는 것을.
말은 저렇게 해도 허리와 옆구리 슬쩍슬쩍 만져주는 느낌을 무척 좋아한다.
게다가 ‘완벽’이라는 단어를 붙여도 부족할 정도로 몸매가 좋으니 만지는 느낌도 황홀했고, 그럴 때마다 아리아나가 품안에서 몸을 비틀면 그 느낌은 더욱 황홀했다.
비록 그 이상 진도를 나갈 수는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이제 잘까?”
“이리 더 붙어요.”
서유림이 몸을 움직여서 아리아나를 더욱 바짝 품어주었다. 다리 하나는 어느새 아리아나의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아리아나의 허벅지가 다리를 조여 주는 느낌이 너무 좋았다. 처음에는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흥분되기도 했었는데, 이제는 적응이 되었다.
게다가 아리아나가 적당한 시점에 수면마법을 걸어주었다.
“잘 자, 아리아나.”
“잘 자요.”
아리아나가 귓가에 바람을 불어넣듯 보드라운 목소리로 속삭여주었다.
서유림은 그럴 때마다 아리아나의 말 뒤에 제 마음대로 덧말을 붙여보는 상상을 하곤 했다.
‘잘 자요, 내 사랑.’이라고 말이다.
* * *
“으드득! 아, 잘 잤다!”
서유림이 힘찬 기지개를 켰다.
시각은 정확히 아침 5시. 의도한 것은 아닌데 정령 아리안과 계약한 후로는 늘 이 시각에 깨어났다.
불만은 없다. 잠이 부족해서 더 자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으니까.
오히려 너무 상쾌했다. 빨리 일어나서 어디든 마음껏 달리고 싶었다.
‘드디어 오늘이구나.’
‘주먹이 운다.’의 본선 첫 경기가 치러지는 날.
덕분에 평일인 월요일인데도 불구하고 회사로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 ‘주먹이 운다.’ 출전을 위해서 사장님이 특별휴가를 내주었으니까.
운동하고 식사하고 시간에 맞추어서 본선 경기가 치러지는 종합체육관으로 향했다.
역시 예선 때보다 시설도 커지고 관중도 많아졌다. 어림잡아도 5천 명은 들어온 것 같다.
평일인데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이 왔어? 게다가 일반석도 입장료가 제법 비싸다고 들었는데.
“참가선수들은 본부석 아래 대기실로 와주세요.”
장내 방송을 듣고 대기실로 향했다.
오늘은 미들급과 웰터급 경기가 치러진다.
선수들이 모두 들어오자 대기실이 꽉 찬 느낌이 들었다. 숫자를 정확히 세어보진 않았지만, 32명씩 2체급이 경기할 예정이니 당연히 64명일 것이다.
“다들 지급된 운동복으로 환복하세요.”
진행자의 지시에 따라서 선수들이 옷을 벗었다.
그런데 옷을 벗자마자 분위기가 살벌해진다. 무척 많은 사람이 몸을 도화지로 삼아서 온갖 문신을 그려놓고 있었다.
그런 놈들······ 아! 선입견은 버리자. 문신했다고 다 성격 거친 깡패는 아닌데.
하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놈들’이라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하나같이 인상이 거칠고 눈빛도 도전적이었다.
마치 ‘난 언제든지 싸울 준비가 되어있어.’ 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그중에서도 유독 분위기가 험악한 사람이 둘 있었다. 온몸에 문신도 모자라서 호랑이 눈을 하고 있는데, 누구든 걸리기만 해보라는 식으로 사람들을 훑어보고 있었다.
옥타곤이 아닌 대기실에서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 같았다.
게다가 둘이 친구인 듯했다.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며 한껏 기분을 내고 있었다.
“아, 씨발. 사람을 언제까지 기다리게 하는 거야?”
“빨리 나가서 아무나 붙잡고 패주고 싶지 않냐?”
“그러게. 어떤 새끼든 걸리기만 해봐. 근데 우리 둘은 결승까지 붙지 말자. 주최측에서 그 정도는 고려해주겠지?”
“당연하지. 우승후보 두 명을 초반부터 맞붙이는 병신이 어디 있어?”
덩치를 딱 보니 두 놈 모두 서유림과 같은 체급인 미들급이었다. 어쩌면 옥타곤에서 만날 수도 있겠다.
저런 놈들과 벌써부터 실랑이할 필요 있을까? 나중에 옥타곤에서 만나면 그때 찍 소리 못하게 밟아주면 그만이다.
서유림이 불필요한 시비를 피하듯 슬쩍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저쪽에서 일방적으로 걸어오는 시비까지 피할 수는 없었다. 호랑이 눈을 한 놈이 서유림을 발견하고는 입술을 쪼개며 천천히 다가왔다.
“어! 이 새끼가 서유림인가 뭔가 하는 새낀가 보네.”
“서유림? 아! 그 족보에도 없는 펀치 쓰는 놈?”
“하하, 그 펀치 참 재미있더라. 간보기 펀치냐 뭐냐?”
간보기 펀치? 이름 참 재미있게 잘 지었다.
사실 틀린 말은 아니다.
서유림도 자신의 예선전을 영상으로 모니터링 해보았다. 이놈들의 말처럼 족보에도 없는 간보기 펀치가 맞았다.
어쩔 수 없었다. 빨리 끝내기 싫어서 힘을 너무 많이 뺐더니 꼴이 정말 우습게 되었다. 마치 ‘무서우니까 오지 마!’ 하는 식으로 툭툭 던지는 펀치 같았다.
누가 보더라도 ‘펀치의 기본도 모르는 놈’이라고 할 것이다.
그러니 저런 식으로 놀림을 당할 수밖에.
“나 1차전에서 저 새끼랑 붙으면 좋겠다.”
“그러게. 누군지 몰라도 오늘 저 새끼랑 붙는 놈 운수 트였다. 부전승으로 올라가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놀리는 재미가 쏠쏠한 모양이지? 대꾸하지 않으니 계속 놀려대네.
게다가 다른 선수들까지 서유림을 바라보며 실실 웃기 시작한다.
그 웃음에 이런 마음이 담겨있는 듯했다.
[서유림과 붙으면 부전승이나 마찬가지다.]
[서유림과 붙고 싶다.]
와! 순식간에 동네북으로 전락한 느낌이네! 괜히 기분이 언짢아지는걸.
사실 누구와 붙어도 아무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달라졌다. 제발 저 두 놈 중 한 놈과 붙었으면 좋겠다. 나와 붙으면 어떻게 되는지 좀 보여주기 위해서.
‘제발 한 놈만 걸려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