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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미친 잠재력-52화 (52/196)

# 52

판을 좀 키워볼까? (3)

게다가 서유림만 생각하면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다.

특히나 오늘은 완전히 놀림을 당한 기분이다.

“아, 씨발! 씨발! 씨발!”

혼자 욕을 해대며 베개를 마구 던지고 걷어찼다.

그런데도 도무지 분이 풀리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분이 풀릴까?

돈도 아까워서 미치겠다.

생각나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채희라의 제안처럼 엎어 쓰기를 하는 것이다. 물론 조건은 최종 우승!

‘그러면 이번 내기는 무조건 내가 이기겠지?’

1억 원 내기 하면 5천만 원 회수하고, 오히려 5천만 원을 더 빼앗을 수 있을 것이다. 서유림에게도 시원한 복수가 될 것이고.

하지만 서유림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다.

본선 진출도 가능성이 거의 없었는데, 우승이라니. 게다가 내기 금액이 1억 원이라니.

‘그럼 16강 진출을 놓고 내기할까? 내기 금액은 5천만 원으로 하고. 아니지. 그건 안 되지.’

본선 진출자는 각 체급별로 32명이 전부다. 본선은 토너먼트 방식으로 진행되고.

즉, 한 번만 이기면 곧바로 16강 진출이라는 뜻이다.

본선이라고 행운이 안 따라주라는 법 있겠는가? 만약 이번에도 서유림에게 행운이 따른다면 애먼 돈 5천만 원을 더 날릴 수도 있다.

그런 행운이 설마 또 올까 싶으면서도 자꾸만 불안해졌다. 0.01%의 가능성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이번에는 확실하게 해야 해. 준결승 진출도 필요없다. 무조건 우승을 두고 내기해야 한다. 그런데 서유림이 이 자식이 거절할 텐데. 그놈을 어떻게 설득해야 하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다. 꼭 자발적으로 만들어야만 계약서이던가? 까짓 계약서 대충 작성하고 지장만 찍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잔뜩 찌푸려져 있던 한동민의 얼굴에 드디어 웃음이 되돌아왔다.

‘그래. 일단 좋은 말로 해보고, 말을 안 들으면 그땐······ 후훗.’

원투! 원투!

서유림의 주먹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덤벨 때문이었다. 30kg이나 되는 무게를 한 손으로 감당한 채 펀치 연습을 하려니 속도가 날 리가 없었다.

하지만 운동효과만큼은 확실했다. 덤벨을 들고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온 몸의 근육이 바짝바짝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웃쌰! 웃쌰!

“후아! 시원하다!”

이건 걸 Runner's high라고 하는 건가? 몸을 혹사시킬수록 고통과 함께 쾌감도 찾아왔다. 온몸을 짜릿짜릿하게 자극하는 쾌감이었다.

그래서인지 운동이 너무 즐거웠다.

그래도 칼퇴근은 지켜줘야지.

샤워실에서 땀을 씻어내고 사무실로 향했다.

오전에는 보이지 않던 한동민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서유림이 들어오자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었다.

“서유림씨. 나 좀 보죠.”

저 인간이 어쩐 일로 존댓말을 다 써줘?

존댓말을 받았는데 오히려 기분이 별로다. 저런 식으로 존댓말을 쓸 때마다 늘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났거든. 아니면 들어주기 곤란한 부탁을 하거나.

하지만 오늘은 아닐 것이다. 왜 부르는지 대충 짐작이 간다.

한동민을 따라서 빈 회의실로 들어갔다.

한동민이 다짜고짜 본론을 이야기했다.

“엎어 쓰기 한판 더 하지. 5천만 원 내기.”

역시 그렇군. 요즘 들어서 한동민이 내 손바닥 안에서만 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쨌건 채희라 덕분에 놈의 주둥이를 낚는 데는 성공했다.

이제 판을 키우는 일만 남았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기회도 아닌데 뽑아먹을 수 있을 만큼 최대한 뽑아먹어야지.

“설마 저보고 ‘주먹이 운다.’에서 최종 우승하라는 건 아니겠죠?”

“내 돈 5천만 원 가져갔잖아.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그렇게 해야지.”

“이건 아니죠. 0.1%라도 가능성이 있어야 내기를 하죠. 이건 5천만 원을 다시 돌려달라는 거나 마찬가지잖아요.”

“그래서? 못 하겠다는 거야?”

한동민이 갑자기 목소리를 차갑게 내리깔며 서유림을 노려보았다. 이성과 논리와 협의가 아닌 협박과 강제로 계약을 체결하겠다는 식이었다.

기분 나쁘게. 그러면 더 하기 싫어지잖아.

하지만 분위기를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몰고 가는 것도 좋은 방법은 아니다. 막말로 내가 슈퍼맨도 아닌데 한동민이 깡패라도 풀면 곤란한 상황이 되지 않겠는가?

조금 이른 시점이긴 하지만, 나도 패를 보여줄 때가 된 것 같다.

한마디로 서로 한 걸음씩 양보하자는 거지.

“그럼 대리님께서 조금만 더 쓰세요. 대리님이 생각해도 이건 너무 불공평한 거래잖습니까?”

“돈을 더 달라는 거야?”

물론 돈을 더 주면 좋겠지.

하지만 그 표정을 보니 돈 달라는 소리는 못 하겠다. 그리고 돈 말고 따로 생각해둔 조건도 있고.

“아뇨. 제가 우승하면 이번 승진인사 때 대리로 승진시켜주세요.”

“대리?”

한동민이 정말 크게 놀란 모양이다. 만성피로 때문에 늘 눈이 거슴츠레했는데 지금은 아주 활짝 떠졌다.

아니, 왜 그렇게 놀라? 세상에 승진 싫어하는 사람 있어? 그리고 나도 대리 될 자격은 있다고.

물론 대리라는 직급 자체에 욕심이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차피 오래 몸담고 있을 회사도 아닌데 그깟 대리 직급 달면 뭐해?

그런데도 대리 직급을 요구하는 이유가 있었다. 돈으로는 얻을 수 없는 사이다가 그 속에 숨겨져 있거든.

자, 이제 결정하셔.

“승진인사는 내 마음대로 안 되는 거 알잖아.”

물론 알지. 제아무리 대표이사의 아들이라고 해도 대리 승진을 좌지우지할 수는 없겠지.

기껏해야 아주 약간 영향을 주는 것뿐이겠지.

하지만 실망할 것 없어. 넌 할 수 있으니까.

“명분을 만들면 됩니다. 제가 명진식품 이름을 달고 경기에 나가면 홍보효과가 엄청날 것 아닙니까? 그 점을 대표이사님께 말씀드리면 아마 긍정적으로 검토해주실 겁니다.”

“아! 홍보효과!”

한동민이 새로운 세상을 본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오래 생각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만약 사장님 허락만 떨어지면 엎어 쓰기 하는 거지?”

“알겠습니다.”

다음날.

대표이사 비서실에서 인터폰이 걸려왔다.

- 서유림씨 사장님 호출입니다. 지금 바로 사장실로 와주세요.

한동민이 이야기를 잘 해준 모양이다.

그래도 뭐든 확실한 게 좋겠지. 한동민이 함께 가준다면 이야기가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가도 결국 좋은 결과를 맺게 될 것이다.

어제의 적이 오늘의 동지가 된 셈이로군.

물론 오늘만. 아니, 이 순간만.

“한 대리님. 사장님 호출 받았습니다. 그 일 때문인 것 같은데, 함께 가주시겠습니까?”

“아, 그래? 당연히 함께 가야지. 가자고.”

서유림은 한동민이 삼킨 뒷말도 함께 들리는 것 같았다. ‘5천만 원 되찾으려면 그 정도는 해야지.’라고 말이다.

아니면 저놈이 저렇게 의욕을 보일 리가 없지.

“대리 승진?”

“예, 아버지. 이 친구가 우리 명진식품 이름을 걸고 ‘주먹이 운다.’에서 우승하면 홍보효과가 좋지 않겠어요? 그 공로라면 대리로 승진시킬 명분은 충분하다고 생각해요.”

아빠라고 안 부르고 아버지라고 부르네.

한명진 성격이 깐깐하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자식교육도 무척 깐깐하게 시킨 모양이다.

그런데 한동민은 왜 이 모양 이 꼴로 큰 거야?

한명진이 인삼차를 홀짝이며 서유림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해득실을 따져보는 듯했다.

“우승할 자신은 있고?”

“도전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 명진식품의 구호 중 하나도 ‘두려움 없이 도전하자!’잖아요. 서유림씨 덕분에 직원 전체가 도전정신을 키울 수 있을 겁니다.”

질문은 서유림에게 했지만, 한동민이 얼른 답을 가로챘다. 서유림이 ‘자신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할까봐 그랬겠지. 한명진은 ‘그런 정신이면 때려치워.’ 하고도 남을 사람이니까.

다행히 한명진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인다.

힘을 얻은 한동민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차피 이 거래는 우승이 조건입니다. 서유림씨가 우승할 경우에 대리 승진인 거고, 우승하지 못하면 그냥 없던 일로 하는 거죠.”

한명진이 고개를 좀 더 시원하게 끄덕인다. 비로소 결심이 선 듯했다.

“좋아. 그 도전정신 마음에 들어. 내가 생각해보고 오늘 안에 결정 내릴 테니까 가서 일들 봐.”

역시 성격이 시원시원하다. 사장실에 들어가고 10분도 안 돼서 이야기가 끝났다.

한명진의 결정은 더욱 신속했다. 한동민과 함께 사장실을 다녀오고 1시간도 안 돼서 공지가 떴다. 회사 건물 공고판은 물론이고 홈페이지 공지사항에까지 올라왔다.

창고에서 운동하던 서유림은 생산팀 직원의 호들갑 덕분에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공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서유림씨. 와서 이것 좀 봐요.”

생산팀 직원이 친절하게 공지를 프린트해서 보여주었다.

내용은 대충 이런 식이었다.

[‘주먹이 운다.’라는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직원에게는 경기당 100만 원을 후원한다.

16강에 진출할 경우 상금 2백만 원, 8강에 진출할 경우 추가로 3백만 원, 준결승에 진출할 경우 추가로 5백만 원, 결승에 진출할 경우 추가로 1천만 원을 포상한다.

만약 최종 우승할 경우 추가로 2천만 원을 포상하며 최저근무년수와 상관없이 특진인사 처리한다.]

와! 이거 번외수입이네. 그럼 최종 우승하면 총 수입이 얼마가 되는 거야?

우승상금 5천만 원.

한동민에게 이미 뜯어낸 5천만 원에 또다시 뜯어낼 5천만 원.

포상금으로 받는 돈만 4천만 원이 훨씬 넘는다. 이것만 해도 대충 2억 원 가까이 된다.

하마터면 입술이 쭉 찢어질 뻔했다.

하지만 표정관리 해야 한다. 이건 내가 원해서 하는 게 아니라 한동민이 억지로 시켜서 하는 거라니까.

“아니, 표정이 왜 그러세요? 잘된 일 아닌가요?”

“그런 일이 있습니다.”

“무슨 일인데요?”

“이건 여러분만 아셔야 합니다. 다른 데 소문내면 안 돼요.”

서유림이 생산팀 직원들에게 한동민과의 계약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미 뜯어먹고 종결된 계약 이야기는 쏙 빼고 오늘 안에 새롭게 체결할 계약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듣는 입장에서는 당연이 눈이 돌아갈 수밖에.

“예에? 우승하지 못하면 5천만 원을······?”

“쉬잇! 어디 가서 이야기하지 마세요. 이거 발설한 것 들키면 한동민 대리한테 찍혀서 개고생 한다고요.”

“아, 알겠습니다.”

“아휴, 내 팔자야. 5천만 원을 어떻게 마련하지? 혹시 돈 좀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 한 1천만 원 정도만.”

“저도 카드값 해결하기 바쁜 신세라서. 어! 벌써 점심시간이네.”

“그러네. 빨리 가자고. 오늘은 팀원들하고 함께 먹기로 했잖아. 서유림씨도 얼른 가서 점심 드세요.”

매정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돈’이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마자 엉덩이에 불을 붙이고 도망가네.

하긴, 요즘에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오히려 돈을 척척 빌려주는 사람이 별종이고 호구지.

그래도 효과는 확실할 것이다. 서유림의 사정을 친한 사람들에게만 이야기해줄 것이고, 소문은 그렇게 빠르게 퍼지겠지.

그럼 서유림이 한동민 돈을 1억 원이나 따먹었다는 소문이 나도 오히려 원망은 한동민이 다 듣게 될 것이다.

적어도 서유림이 억울한 입장이었다는 건 모두가 알아주겠지.

‘나도 밥 먹으러 가볼까? 다른 팀원들 반응이 궁금하네.’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은 한동민도 구내식당에서 팀원들과 함께 식사한다.

서유림이 자리에 앉자마자 한동민이 서류 두 장을 내민다. 예상대로 계약서였다. 다른 팀원들은 이미 공증인으로 서명을 마친 상태였다.

“내가 조건 들어줬으니까 서명해.”

입술이 씰룩거리는 것을 참고 일단 한숨부터 내쉬었다.

“휴우, 꼭 이렇게까지 하셔야 하겠습니까?”

“됐어. 한 마디도 하지 마. 서명이나 하라고.”

한동민이 낮은 목소리로 강요했다. 다른 직원들이 알아서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하긴, 이건 말도 안 되는 조건이니까.

구매팀 팀원들에게도 입단속을 단단히 시켰겠지.

서유림이 땅이 꺼지듯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서명하는 순간 5천만 원이 날아간다고 확신하는 듯이.

하지만 결국 한동민이 원하는 대로 서명해주었다.

마.지.못.해!

한동민이 서류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그리고는 피식 웃었다.

“열심히 해봐. 회사에서 책정한 포상금만 4천만 원이 넘으니까. 잘하면 한 방에 2억 원이야. 후훗.”

그래. 나도 알고 있다. 그러니까 5천만 원이나 마련해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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