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판을 좀 키워볼까? (2)
그러는 사이 투신도 다른 대기실에서 뛰어나왔다.
강규정은 아니군.
그런데 몸이 정말 좋았다. 키도 180cm가 조금 안 되고, 체형도 마른 편인데 느낌은 무척이나 묵직했다. 온몸이 돌덩이 같은 느낌이랄까?
팔뚝도 다리도 굵직굵직했다. 딱 보는 순간 ‘통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스피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파워 하나만큼은 엄청날 것 같았다.
아주 간단한 선수소개와 함께 심판이 경기규칙을 설명했다.
그러는 동안 투신은 눈싸움 따위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다른 곳에 두며 서유림과 눈 마주치기를 피하는 듯했다.
‘이상하네. 한동민의 사주를 받은 놈이 아닌가?’
드디어 경기가 시작되었다.
땡!
공이 울리자 투신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서유림은 헤드기어를 쓰고 있는 반면 투신은 그런 것도 없었다.
그만큼 아마추어와 프로의 실력 차가 크다는 뜻이겠지.
그대로 원투 스트레이트를 꽂아서 경기를 끝내버릴까 싶었지만, 일단은 참고 지켜보았다. 이놈이 어떻게 나오는지 봐야 하니까.
웬만하면 실력도 감추고 싶고.
그런데 정말로 다리를 부러뜨리고 할까?······ 이크!
투신이 다가오자마자 로우킥을 날렸다. 정확히 서유림의 정강이를 향해 있었다.
깜짝 놀라서 엉덩이를 빼며 간신히 피했다. 하지만 너무도 갑작스러운 기습이라서 발끝에 살짝 스쳤다.
와! 가볍게 찬 것 같은데 파워가 장난이 아니네. 보통 사람이 제대로 맞았다면 정강이가 부러졌을 수도 있겠다.
이놈 봐라.
투신이 원투! 잽을 날리다가 또다시 로우킥을 차려고 했다. 로우킥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놈이 무엇을 노리는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한동민의 거래 제안을 받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제안을 수락한 것도 분명했다. 겨우 돈 1천만 원에 참가자의 다리를 부러뜨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인정머리 없는 놈.
서유림은 기다렸다. 놈이 다시 로우킥을 시도할 때까지.
‘지금이다!’
투신이 잽을 툭툭 집어넣다가 다시 연속공격으로 서유림의 하체를 힘껏 걷어찼다.
서유림도 그 타이밍에 맞추어서 투신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두 사람의 정강이가 서로의 것을 부러뜨릴 듯 힘껏 휘둘러졌다.
서유림은 순간 투신의 표정을 볼 수 있었다.
멀리서 본다면 무표정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코앞에서 자세히 보면 표정이 있었다. 입술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가 있었다.
서유림도 아주 살짝 웃어주었다.
그와 동시에 정강이에서 빡!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경기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다들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는 듣지 못했겠지만, 정강이가 순간적으로 꺾이는 모습은 볼 수 있었을 테니까.
비명소리는 그 다음에 터져 나왔다.
“아악!
이어서 투신이 정강이를 움켜쥐며 바닥에 쓰러졌다.
이제 알겠지? 네 정강이가 소중하면 남의 정강이도 소중한 거란다.
하지만 이미지 관리는 해야지. 적어도 ‘개매너’ 소리는 듣지 말아야 하지 않겠는가?
서유림도 깜짝 놀라서 얼른 주저앉아서 투신의 상태를 살폈다. 무척이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으악! 괜찮으세요? 정강이뼈가 부러졌나 봅니다.”
그러는 사이 케이지 문이 열리고 의료진이 황급히 달려 들어왔다. 재빨리 응급처치를 시작했다.
그제야 심판이 서유림의 손을 들어주었다.
“서유림 선수 통과!”
“축하드려요.”
강은영이 마치 자신이 이기기라도 한 것처럼 신나서 박수를 쳐주었다. 다른 구매팀 직원들도 강은영을 따라서 박수를 쳐주었다.
하지만 한동민과 채희라는 별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지방 방송 틀어놓듯 자기들끼리 실컷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박수 소리가 들리자 ‘뭔데?’ 하는 표정으로 건성건성 박수에 동참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둘만의 이야기에 집중한다.
서유림은 그러거나 말거나였다. 지금의 기분을 마음껏 즐기듯 목소리를 높였다.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서유림이 주인공이니까.
“하하, 감사합니다. 와! 진짜 운이 이렇게 좋을까? 어제 꿈을 잘 꿨다 했어요.”
“어머! 무슨 꿈을 꿨는데요?”
이번에는 권진아가 물어준다. 이따금 당찬 모습도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성격이 얌전한 편이라서 잘 나서지 않는 친구인데.
“옆에 아름드리나무가 있어서 심심풀이로 걷어찼는데, 나무 허리가 뚝 부러져버리더라고.”
“와! 그거 예지몽이다.”
강은영이 신기하다며 또 박수를 쳐주었다.
“조상님이 돌보신 거지. 투신 정강이가 아니라 내 정강이가 부러졌을 수도 있잖아. 와!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
“어머! 정말 그러네요. 생각만 해도 소름 돋아요.”
“그런데 서유림씨. 우리 동민씨와 내기하셨다면서요?”
채희라가 한동민과 이야기하다가 갑자기 툭 끼어들었다.
그런데 ‘역시 채희라!’라는 생각이 든다. 동민이라는 이름 앞에 ‘우리’라는 단어 붙여주는 것 봐. 저러니 한동민이 여태껏 키스도 한 번 못 해봤으면서도 채희라 하면 사족을 못 쓰지.
“그렇게 됐습니다. 저는 제가 질 줄 알고 여기저기 돈 빌려서 3천만 원 간신히 만들어놨었는데. 그 돈 모두 돌려줘도 되겠네요.”
“내기 액수가 3천만 원이나 돼요? 우리 동민씨, 돈 아까워서 어떻게 해요?”
“3천만 원이 아니라 5천만 원인데.”
서유림이 사연을 간략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어머! 그런 일이 있었어요? 어떡해. 어떡해.”
채희라가 한동민을 걱정해주는 척했다. 발까지 동동 구르는 모습이 누가 보면 자기 통장에서 돈 빠져나가는 줄 알겠다.
그러자 한동민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여유롭게 웃어주었다.
“에이, 아깝기는요. 약속을 했으면 지켜야죠. 저 그깟 5천만 원 아까워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아요.”
쯧쯧, 쓰린 속마음 감추느라 고생이 많다.
“역시 우리 동민씨라니까! 다들 봤죠? 우리 동민씨가 이런 사람이에요.”
역시 채희라. 적절하게 약을 잘 발라주는구나.
아! 그러고 보니 지금이 확실하게 못 박을 타이밍이로구나.
서유림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물었다.
“그럼 정말 주시는 거죠?”
“어머! 유림씨! 우리 동민씨가 주신다고 했잖아요. 사람 말을 왜 의심하고 그래요?”
채희라가 갑자기 서유림을 나무라며 한동민을 편들어준다.
그리고는 한동민에게 다시 애교를 부린다.
“동민씨. 아예 보란 듯이 이 자리에서 계좌이체 시켜버리세요. 그 정도는 모바일로 쉽게 이체할 수 있죠?”
한동민이 어깨를 살짝 움찔했다. 설마 이 자리에서 바로 주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던 모양이다.
“예? 아, 그······ 그럼요.”
한동민이 주섬주섬 휴대폰을 꺼냈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서 서유림의 통장번호를 받아서 5천만 원을 이체시켜주었다.
그리고는 휴대폰 화면을 보여주며 확인까지 시켜주었다.
“돈 입금한 것 보이지?”
“감사합니다, 역시 우리 대리님 남자라니까! 오늘 저녁은 제가 쏘는 거니까 마음껏 드세요.”
“치잇! 5천만 원씩이나 챙겼으면서 소고기도 아니고 겨우 삼겹살.”
채희라가 뚱한 표정을 했다. 그다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젓가락질도 깨작깨작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서유림을 쏘아보았다.
“그런데 설마 이대로 끝내는 건 아니겠죠?”
“그게 무슨······?”
서유림이 멍한 표정을 했다. 다른 팀원들은 물론이고 한동민조차도 채희라가 무엇을 말하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 의아한 표정을 했다.
“엎어 쓰기 한판 해야죠.”
이야, 정말 자연스럽다. 역시 채희라 연기력은 최고라니까. 지금이라도 연기 쪽으로 방향을 잡아야 하는 것 아냐?
서유림이 애써 굳은 표정을 하며 물었다.
“엎어 쓰기? 설마 저보고 우승이라도 하라는 건 아니겠죠?”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그래야 공정하죠. 안 그래요, 동민씨? 5천만 원이 뉘 집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그냥 날름 삼키고 입만 쓱 닦으면 그만이에요? 다시 되갚을 기회를 줘야죠.”
한동민의 눈이 순간 커졌다. 마치 심봉사가 심청이 소식 듣고 눈 뜨는 장면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망망대해에서 한줄기 등대불빛을 발견한 기분이라도 든 모양이지?
“그래. 엎어 쓰기 한판 해야지.”
한동민이 신이 나서 제안했다.
물론 바라는 바다. 채희라에게 부탁해서 일부러 분위기를 잡은 것도 엎어 쓰기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다. 물론 가장 큰 목적은 5천만 원을 그 자리에서 계좌이체 받기 위한 것이었지만.
사람이 거래할 때에는 에누리라는 것이 있어야 하는 법이다. 이쪽에서 유리한 조건을 얻으려면 애간장을 살짝 태워줄 필요가 있다.
“죄송합니다만, 그때 내기는 술김에 한 겁니다. 제가 미쳤다고 말도 안 되는 내기를 하겠습니까?”
“사람이 그러면 못 쓰지. 나한테도 만회할 기회는 줘야 하는 것 아냐?”
“당연히 그래야죠. 그런데 다른 분들은 왜 이렇게 조용해요? 이런 부당한 일을 보고도 다들 모른 척하시네.”
오! 채희라 잘한다. 저건 내가 시키지도 않은 시나리오인데.
채희라가 훑어보자 직원들이 시선 피하기 바쁘다. 특히 오영훈.
하지만 채희라는 이미 오영훈을 찍었다.
“오영훈 주임님이라고 하셨죠? 주임님은 우리 동민씨하고 친하다고 들었는데, 아닌가 봐요. 동민씨랑 사이가 나빠요?”
“예? 그, 그럴······ 리가요.”
오영훈이 깜짝 놀라서 얼른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왜 모른 척하고 계세요? 주임님은 5천만 원 먹고 입 쓱 닦는 것이 정당하다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그래요. 오 주임이 한번 얘기해 봐요.”
한동민도 이거다 싶었는지 오영훈을 공략했다.
그제야 오영훈이 마지못해 한동민을 지원사격 해주었다.
“당연히 엎어 쓰기 해줘야죠. 서유림씨. 그게 맞는 거야. 그렇게 입 쓱 닦는 거는 예의가 아니지.”
네가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이번 일로 널 원망하진 않으마. 웬만큼 의리의 사나이가 아니라면 이런 상황에서 내 편을 들어주는 건 힘들 테니까.
게다가 너는 의리라고는 코딱지만큼도 없는 놈이잖아. 내가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그게 네 모습이 맞지.
넌 나중에 딱 그만큼만 혼나도록 하자.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고기나 드시죠. 와! 여기 삼겹살 좋네.”
서유림의 목소리에 흥이 가득하다. 채희라와 한동민이 엎어 쓰기를 몇 차례 더 이야기했지만,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그럴수록 한동민의 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물론 아깝긴 하다. 하지만 그건 사소한 문제다. 그보다는 서유림이 얄미워서 미칠 지경이었다.
‘저놈을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속 시원하게 복수하지?’
삼겹살이 맛있을 리가 없었다. 소주도 오늘따라 썼다.
게다가 이놈의 만성피로는 왜 이렇게 갈수록 심해지는 건지. 아무래도 오늘은 일찍 들어가서 쉬어야 할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요즘은 만날 집에서 쉬기만 하네. 젠장.’
“아 참! 제가 약속 있었던 걸 깜빡했군요. 먼저 일어서겠습니다.”
한동민이 적당한 핑계를 대며 일어서려고 했다.
“대리님. 제가 사는 건데, 고기는 더 드시고 가셔야죠.”
서유림이 얼른 따라 일어서며 한동민의 손을 붙잡았다.
‘이 친구, 스킨십을 왜 이렇게 좋아해? 징그럽게.’
“미안해. 약속이 있어.”
“그럼 저도 함께 가요. 동민씨 없으면 제가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요.”
“그래요. 제가 댁까지 모셔다드릴게요.”
한동민이 서유림의 손을 빼고는 채희라와 함께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한동민은 채희라와 헤어지고 곧장 오피스텔로 들어왔다.
평소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불타는 금요일, 불타는 토요일을 어찌 그냥 보내겠는가? 게다가 옆에 엘프처럼 예쁜 채희라까지 있는데.
제아무리 체력이 떨어지더라도, 너무 피곤해서 쌍코피를 흘리더라도, 아니 설령 채희라의 배 위에서 복상사를 당하더라도 어떻게든 밤의 쾌락을 불태웠을 것이다.
채희라가 거부한다면 삼삼한 아가씨 한 명 유혹해서 대신했겠지. 그것도 귀찮으면 강은영이라도 불렀겠지.
그런데 그런 의욕조차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체력이 부족했다. 도통 여자에게 마음이 동하지를 않았다.
이유도 없이 피곤해서 그냥 쉬고 싶은 마음뿐이다.
그것만 생각하면 죽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아! 씨발. 내가 대체 어쩌다가 이 꼴이 된 거야? 이 나이에 좆도 못 세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