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판을 좀 키워볼까? (1)
그냥 두면 안 되겠네. 체력흡수도 적당한 수준에서 마무리할까 했는데, 연장 작업 좀 해야겠다. 아예 그 짓(?)을 영구히 못할 정도로 바닥까지 빨아주마.
“가르쳐줘서 고마워.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어. 한 대리님은 날 왜 그렇게 싫어하는 거지?”
“그 사람 원래 심보가 고약해요. 누구라도 한명 붙잡고 괴롭혀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에요. 오빠가 뜻대로 당해주지 않으니까 약이 바짝 올라있는 것 같아요. 게다가 3천만 원이나 걸려 있잖아요.”
3천만 원 때문에? 그건 아닐 거다. 한동민 같은 놈에게 3천만 원은 그렇게까지 큰돈이 아닐 테니까.
그럼 뭐야? 별 이유 없이 그런다는 거잖아. 자기 기분에 따라서.
그런데 다리를 부러뜨린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괘씸하네.
그럼 나도 가만히 있을 수 없지. 체력흡수만으로는 만족이 안 될 것 같아.
“그러니까 포기하세요. 한 대리님이 이상한 제안으로 꼬드겨도 절대 하지 마요. 걱정돼 죽겠단 말이에요.”
그럴 수야 없지. 다음 기회를 노리면 무려 3개월이나 기다려야 한다고.
다치지 않을 자신도 있다. 설령 다친다고 해도 빠르게 회복될 자신도 있고.
그런데 가만. 한 대리가 이상한 제안으로 꼬드겨?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번뜩 떠오르는 아이디어가 있었다.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시도한다고 밑질 것은 전혀 없는 방법이었다.
“알았어. 은영씨 말대로 최종예선은 안 나가는 방향으로 할게. 팀원들 실망할 테니까 은영씨가 잘 좀 얘기해줘.”
“아, 다행이다. 알았어요. 정말 잘 결정했어요, 오빠.”
“그럼 난 일하러 가볼게.”
창고에서 열심히 땀을 흘리고 퇴근 무렵이 되어서야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강은영이 이야기를 잘해놓은 모양이다. 서유림이 들어오자마자 팀원들이 한마디씩 물어본다.
“서유림씨 최종예선 안 나간다면서? 정말이야?”
“왜에? 아깝게.”
한동민도 눈빛을 초롱초롱 빛내며 바라보고 있다.
서유림이 대수롭지 않게 웃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최종예선은 무리더라고요. 나가서 득 될 것도 없고. 괜히 다쳐서 어디 부러지기라도 하면 한두 달 운동도 못하고 놀아야 하잖아요. 그동안 죽어라고 운동해서 이정도 몸 만들었는데,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면 내년에도 본선 진출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요.”
“저렇게 뭘 모른다니까. 경험이 얼마나 중요한 건데.”
한동민이 툭 던지듯 이야기한다. 그리고는 자신은 관심 없다는 듯 시선을 책상 위로 돌린다.
그러면서 다시 흘리듯 이야기한다.
“남자가 그렇게 겁이 많아서 어디에다 써먹어? 난 모르겠다. 나가든지 말든지. 안 나가면 나야 3천만 원 굳으니 좋지 뭐.”
오! 연기 자연스러웠어. 어디 학원 다니나?
슬쩍 마음이 움직인 것처럼 해줘야겠지? 원래 심리전은 밀고 당기는 게 중요하다잖아.
“경험이 중요하긴 중요하겠죠?”
“당연하지. 그리고 혹시 알아? 이번에도 운이 좋아서 본선 통과하게 될지?”
“하긴, 손해 볼 건 없겠죠?”
“손해는 무슨. 다치는 게 무서워서 못 나간다면 격투기는 아예 할 생각을 말아야지.”
서유림이 혹하는 표정을 지었다.
강은영이 그 모습을 보고는 손짓 눈짓으로 만류하느라 정신이 없다.
서유림이 고민된다는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흔들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무리겠네요. 투신을 상대로 어떻게 행운을 바라겠어요? 그냥 다음번 노리죠. 괜히 다치면 큰일인데.”
한동민이 순간 움찔했다. 얼른 뭔가를 말하려다가 애써 삼켰다.
대신 대수롭지 않은 목소리로 흘리듯 이야기했다.
“그러시던가. 나야 돈 굳어서 좋다니까.”
여유가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여유는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사라져갔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지나자 이제는 서유림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가서 드라마 한번 보여줘. 서유림씨가 ‘주먹이 운다.’ 본선 진출하면 얼마나 짜릿한 인생역전이겠어? 우리 구매팀 체면도 살고 말이야.”
한동민이 눈치가 좀 있는 줄 알았는데 영 깡통이네.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아직도 모르겠어?
좀 더 직접적으로 언급을 해줘야겠네.
“그렇긴 한데 얻는 것도 없이 위험요소가 너무 커요. 경험이야 지금 실력에서는 체육관 스파링으로도 충분하고요.”
“얻는 게 왜 없어? 그럼 내가 또 돈 걸어줄까? 백만 원 어때? 이번에 본선 진출하면 1백만 원 추가로 줄게.”
놀라워라. 3천만 원 내기가 걸려있는데, 추가로 걸린 돈이 겨우 1백만 원이야?
너 카드 안 해봤어? 레이스를 할 때는 최소한 따당(‘그거의 두 배로’를 의미)은 해줘야 하는 거라고.
“에이, 백만 원 보고 그런 모험을 하기는 좀······. 가능성도 거의 0%에 가까운데. 그냥 포기하겠습니다.”
“이야, 서유림씨 많이 컸네. 백만 원이 뉘 집 개새끼 이름 취급하고. 좋아. 1천만 원은 어때?”
우와! 단번에 열 배가 올라갔다. 그럼 좀 더 올릴 수도 있겠는걸.
서유림이 고민된다는 듯 인상을 팍팍 썼다.
“1천만 원요? 아! 탐나네! 에이, 그래도 안 하는 게 낫겠습니다. 1%로라도 가능성이 보여야죠.”
한동민은 줄기차게 설득했다.
그리고 다음날인 금요일, 최종예선을 하루 앞두게 되자 액수를 더 올렸다.
“좋아. 그럼 내가 2천만 원 쏜다. 만약 내일 최종예선에서 통과하면 5천만 원 그대로 통장에 꽂아준다.”
5천만 원이라. 그런 큰 돈을 저리 쉽게 쾌척하다니.
하긴, 한동민에게는 그깟 5천만 원은 몇 달 술값 정도밖에 안 되겠지. 아니면 100% 통과 못할 거라고 확신하거나.
어쨌건 금액이 더는 올라가지 않을 것 같다.
“정말이세요?”
“당연하지. 권진아씨. 당장 계약서 만들어서 뽑아줘.”
“예? 제가······요?”
권진아가 망설인다. 강은영에게 대충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모양이다. 이번에 최종예선에 출전하면 서유림의 다리가 부러질 거라는.
자신의 손으로 서유림의 다리를 부러뜨리는 것 같아서 망설여지는 거겠지.
하지만 한동민을 누가 말려?
“뭐 해요? 어서 만들지 않고? 빨리 만들어서 서유림씨 줘요.”
“······알겠습니다.”
권진아가 마지못해 계약서를 만들어서 두 장을 출력했다. 서유림에게 내미는데 눈빛에 걱정이 한가득이다.
서유림이 활짝 웃었다.
“걱정하지 마. 설마하니 어디 부러지기야 하겠어?”
그리고는 필체도 힘차게 서명했다.
한동민은 이번에도 팀원들을 공증인으로 세웠다. 모든 팀원이 계약서에 서명을 마쳤다. 그렇게 2차 계약서는 일사천리로 만들어졌다.
한동민이 서명 완료된 계약서를 흔들어보였다.
“서유림씨. 2천만 원이야. 열심히 해봐.”
저런 귀여운 놈. 도저히 그냥 둘 수가 없다.
얼른 다가가서 어깨를 주물러주었다.
“역시 우리 대리님은 통이 크셔. 제가 2천만 원 받으면 팀원들에게 삼겹살 한번 쏘겠습니다.”
“그것도 좋지. 하하하.”
한동민이 뭐가 그리 좋은지 흡족하게 웃는다.
그러다가 다시 어깨를 으쓱으쓱 해 보인다.
“이상하네. 서유림씨가 주무르면 시원하긴 한데 몸이 노곤해져.”
“잔뜩 뭉쳤던 근육이 풀어지면 오히려 몸이 노곤하게 느껴지는 법이니까요. 당연한 현상입니다.”
“그런가?”
그렇긴 개뿔이. 이쯤 되면 내 손에 거부감을 느낄 법도 한데, 너도 참 둔감하구나. 머리가 나쁘면 몸이 고생이라더니 네가 딱 그 꼴이다.
“아무튼 내일은 대리님도 경기장 와주시는 거죠?”
“나도 그러고 싶은데 내일 중요한 약속이 있어. 대신 다른 팀원들이 나가서 응원 좀 해줘요. 우리 가족이잖아요.”
뜻밖이네. 내 다리 부러지는 현장을 직접 확인하고 싶지 않나?
얼마나 중요한 약속이기에.
문득 채희라가 생각났다. 둘이 무슨 약속이 잡혀있나?
확인해보면 알겠지.
“그럼 저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서유림은 사무실을 나오자마자 채희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채희라의 목소리는 무척 밝았다.
- 어머!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나? 오빠가 먼저 전화를 걸어주고.
곧바로 용건부터 이야기하자니 채희라에게 미안한 마음이 든다. 이렇게 반겨주는데.
잠깐이나마 기분은 좀 맞춰주자. 급할 것도 없는데 뭐.
“저녁은 먹었고?”
- 아직. 조금 있다가 먹으려고. 근데 오빠. 나 오늘 재미있는 일 겪었다? 들어볼래?
들어보니 시시콜콜한 이야기다. 근데 뭐가 그리 좋다고 혼자 깔깔대며 이야기한다.
이쯤에서 서론은 마무리 지어야겠지? 그래도 나름대로 성의껏 리액션은 해주었다.
“하하, 그것 참 재미있네. 그런데 너 내일 혹시 한동민 대리하고 약속 있어?”
- 어떻게 알았어? 사주는 것도 별로 없으면서 자꾸 만나자네. 귀찮아 죽겠어. 그냥 잘라버릴까 봐. 그래도 되겠지?
역시 그랬군.
그런데 채희라가 저렇게 실망하는 것을 보니 한동민이 생각보다 주머니가 두둑하지 못한 모양이다. 아니면 채희라 통이 큰 건가? 한동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어쨌건 조금 불안해진다. 이러다가 내 돈 5천만 원도 못 받는 것 아냐? 그러면 곤란한데.
어떻게 해야 다른 말 못 하고 확실하게 받아내지?
어렵지 않게 방법이 떠올랐다. 내겐 채희라가 있잖아. 채희라를 활용하는 거다.
요즘은 정령 아리안 덕분에 잔머리가 팽글팽글 잘 돌아간단 말이야.
“한동민 자르는 건 네 마음인데 그전에 나 좀 도와줘라.”
- 도와줘? 뭘 어떻게?
다음날.
‘주먹이 운다.’의 최종예선은 주제가 ‘3분을 버텨라.’이다. 현역 프로 격투선수인 이른바 ‘투신’을 상대로 3분을 싸우는 것이다.
물론 아마추어가 투신을 이길 수는 없는 일.
대신 3분 동안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주느냐가 관건이다. 설령 1분 만에 경기불능 상태가 된다 하더라도 채점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주면 본선에 진출할 수 있다.
물론 투신을 이기면 본선에 진출하는 것은 당연하다.
최종예선 역시 체급별로 진행되었다.
서유림의 몸무게는 미들급 체중에 속하는 83kg에게 멈추어 있었다. 하루에 2kg 가까이 쭉쭉 불어나다가 83kg이 되자 급정거를 한 것이다.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83kg이 서유림에게 최적의 몸무게인 것이다.
어깨, 가슴도 마찬가지다. 어깨넓이는 57cm까지 성장한 후 멈추었고, 가슴둘레도 딱 보기 좋은 정도까지만 성장하고 멈추었다.
그런데도 영양은 아직 부족했다. 골밀도나 근육강화는 아직 더 성장할 여지가 남아있으니까.
미들급은 당연히 미들급 투신과 경기를 갖게 될 것이다.
“참가자들은 대기실로 모여주세요.”
장내 안내방송에 따라서 대기실로 향했다.
대기실 벽면에 사진들이 죽 붙어있었다. 투신들의 사진이었다.
간략한 소개도 있었다. 그래봤자 이름, 체급, 전적 정도의 정도에 불과했지만.
이중에 서유림을 상대할 투신도 있을 것이다.
미들급에 해당하는 투신을 보니 총 세 명이었다. 그런데 그중에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서유림과 1차 예선에서 맞붙었던 부산 깡패 한호영이 형님이라고 불렀던 놈.
이름이 강규정이었던가?
‘이놈도 미들급이었네.’
혹시 한동민과 물밑거래한 놈이 이놈일까?
가능성은 반반.
어쨌건 상관없다. 만약 오늘 경기 중에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한다면 그 다리는 서유림의 것은 아닐 테니까.
대회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한 명씩 불려나가서 투신과 맞붙기 시작했다.
밖에서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들려왔다. 입장료를 5천 원씩이나 받는데도 3천 명이 넘는 관중이 몰려들었다.
그 소리가 체육관을 들썩이게 할 정도로 컸다.
이거 긴장되네. 관중들의 함성소리가 사람의 심장을 이렇게 뜨겁게 만들어놓는구나.
“다음, 서유림씨 준비하세요.”
드디어 내 차례로구나. 한참을 기다렸다.
과연 어떤 놈이 내 상대가 될까? 정말 내 다리를 부러뜨리려고 들까?
만약 그러려 한다면 그대로 되돌려 주리라.
최종예선의 무대는 옥타곤에서 이루어졌다. 심판도 있었다.
와! 관중이 정말 많구나. 한동민을 비롯한 구매팀 팀원들을 찾아보려 했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아! 저기 있구나!
강은영과 권진아가 벌떡 일어나서 두 손을 크게 흔들고 있다. 덕분에 구매팀 직원들이 있는 곳을 간신히 찾을 수 있었다.
서유림도 가볍게 손 인사로 화답해주었다.
옆에는 한동민과 채희라도 함께 와있었다. 하지만 한동민도 채희라도 서유림에게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서로 눈을 맞춰가며 배시시 웃곤 했다.
‘희라가 나 때문에 고생이 많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