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송곳 파이터 (3)
미안. 널 이렇게 만날 줄 알았다면 감자떡이라도 하나 사오는 건데. 아니면 대일밴드라도.
내가 예지 능력은 없거든.
그래도 다행히 선물할 거는 있다. 비록 길바닥에서 주은 거긴 하지만.
아까 점심 먹고 편의점에서 커피 한 잔 뽑아먹었거든. 그런데 바닥에 100원짜리 동전이 떨어져있지 뭐야?
알지? 길바닥에서 주운 동전은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것. 봐! 벌써 나한테 ‘강규정’이라는 행운을 가져다줬잖아.
물론 이 동전이 너한테까지 행운을 가져다줄지는 모르겠지만.
“행운의 동전입니다.”
강규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눈빛도 매서워졌다. 동전을 확인하자마자 내팽개쳤다.
“이런 개새끼······.”
쯧쯧, 그래서 네가 성공을 못하는 거다. 자기 복을 자기 손으로 내팽개치다니.
그것도 모자라서 주먹을 불끈 쥐고 위협적인 모습을 했다.
어허, 왜 그러실까? 알 만한 사람이. 대회 관계자가 예선참가자 구타하면 어떻게 되는 줄 몰라서 그래?
그때 진행자가 다시 대기실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서유림씨. 뭐하고 있어요? 얼른 준비하지 않고?”
“아, 예. 그럼 조만간 링에서 봐요. 선배님 파이팅!”
서유림이 부들부들 거리는 강규정에게 작별인사를 고하고는 얼른 달려가서 헤드기어와 글러브를 착용했다.
60%가량으로 떨어져있던 체력은 강규정 덕분에 순식간에 70%가량으로 채워졌다. 그리 큰 차이는 아니지만, 경기력에 미치는 영향은 제법 있을 것이다.
잠시 후 무대로 올라갔다.
그런데······.
피하고! 원투!
‘어? 뭐야?’
상대가 너무 싱거웠다. 실전 경기를 통해서 크로스 카운터 타이밍 잡는 연습하겠다고 슬쩍슬쩍 주먹을 뻗었다.
그러다가 완벽한 타이밍이 왔다. 욕심이 날 정도로.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나도 모르게 힘이 조금 들어간 펀치를 뻗고 말았다.
그런데 그 한 방을 맞고 놈이 피식 쓰러진 것이다.
이렇게 허무할 수가. 실전연습 좀 더 하고 싶었는데.
* * *
“와! 대단해요.”
“멋져요.”
짝짝짝.
사무실에서 난리가 났다. 배기열 팀장부터 막내 권진아까지 서유림을 향해 아낌없이 박수를 보내주었다.
서유림도 마음껏 으스댔다. 이런 때 기분 한 번 내는 거지.
“강은영씨 봤지? 권진아씨도 봤지? 내가 원투! 한 방으로 끝내버린 것. 두 번 다 1분도 안 돼서 케이오로 끝내버렸잖아. 강철중씨도 봤죠?”
“물론이죠. 서유림씨 주먹이 그렇게 센 줄 처음 알았어요.”
“으하하하. 저도 처음 알았다니까요. 이야, 어떻게 딱 한 방에 끝낼 수가 있지? 이참에 이 길로 나가봐?”
서유림이 자신의 주먹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그러자 저쪽에서 비아냥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재수 좋게 한두 번 이긴 것 가지고 촐싹대기는.”
네가 왜 안 나서나 했다.
“서유림씨. 사람 운이 매번 좋은 줄 알아? 사람이 겸손할 줄 알아야지.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 몰라? 완전히 운빨로 이긴 것 가지고 왜 그렇게 나대?”
“아하하하. 운도 실력이죠. 혹시 알아요? 최종예선에서도 운이 좋아서 통과하게 될지. 그러면 3천만 원! 아시죠?”
“웃기고 있네. 아마추어하고 프로하고 같아? 최종예선은 프로와 붙는 거야. 서유림씨가 무슨 수로 통과해?”
“전 왠지 느낌 좋은데요? 1천만 원 내기해도 좋을 만큼.”
서유림이 슬쩍 떠보았다. 덥석 물어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쉽게 물어주진 않네.
“내기 같은 걸 해야지. 근데 오늘은 창고에 일 없어? 왜 아직도 사무실에서 얼쩡거리고 있는 거야?”
나도 구매팀 직원이거든. 사무업무도 일부 있거든.
물론 사무실보다는 창고가 낫긴 하지. 네가 나가지 말라고 해도 빨리 나가고 싶어 근질근질하다.
“그럼 전 창고 가보겠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창고로 향했다.
소문은 이미 구매팀 밖으로까지 퍼진 상황이었다. 아직 최종예선을 통과한 것도 아닌데 다들 서유림을 보자마자 축하의 말부터 전한다.
“두 사람 가뿐하게 밟아줬다면서요?”
“서유림씨 다시 봤어요. 커피나 한잔 할까요? 제가 쏩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현장 직원들과 나란히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전에도 가끔 짤막한 대화를 나누곤 했었기 때문에 어색함은 전혀 없었다.
“아무튼 축하해요. 꼭 본선 진출해서 한동민 대리 돈 따먹으세요.”
내기 소문이 벌써 현장까지 퍼졌나?
그렇다면 잘됐다. 물론 계약서가 있는 한 딴소리는 못하겠지만, 전 직원이 다 알고 있으니 더욱 확실한 보증이 될 것이다.
“감사합니다.”
“어! 저기 컨테이너 들어오네요. 이제 일해야겠습니다. 그나저나 큰일이네. 오늘 들어오는 건 빠레트 작업이 안 되는 거라서 일일이 손으로 상차해야 하는데. 저걸 언제 다 실어?”
“막막하네! 나 요즘 어깨 물리치료 받고 있는데.”
“벌써부터 엄살떨면 어쩌자는 거야? 나도 허리 안 좋은데.”
그러는 사이 30대 중반의 여자가 서류철을 들고 내렸다. 대찬 기질로 소문이 자자한 영업팀 전미숙 대리였다.
“얼른 싣죠. 제가 카운트해볼게요.”
그러고 보니 출고될 완제품이 산처럼 쌓여있었다. 박스 크기를 보니 무게도 제법 나갈 것 같다.
저걸 일일이 다 손으로 실어야 한다니. 아무리 20피트짜리 컨테이너라고 하지만, 시작하기도 전에 기가 질릴 일이었다.
그때 직원 하나가 서유림을 흘끔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눈빛이 어딘가 모르게 애처로웠다. ‘조금만 도와줬으면.’ 하는 말을 목구멍에서 삼키고 있는 듯했다.
서유림의 눈이 번쩍 떠졌다.
기회다! 정령소환력을 올릴 수 있는 기회.
물론 확실한 것은 아니다. 직원들이 크게 고마워하지 않는다면 정령소환력은 변화가 없겠지.
그래도 손해 볼 건 없다. 어차피 운동 삼아서 애먼 박스를 들었다 놨다 하지 않는가?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그 방향으로 운동하는 게 몇 배는 낫겠지.
이왕이면 도움을 청하기 전에 알아서.
그래야 더 고마워하지 않을까? 가정교육을 제대로 받은 사람이라면.
물론 한동민 같은 놈이라면 고마워하기는커녕 호구로 생각하겠지만.
만약 그런 기색이 보인다면 다음부터는 절교지!
“제가 지금은 시간여유가 있는데, 좀 도와드릴까요?”
“정말요? 그래주시겠습니까?”
“서유림씨도 바쁘실 텐데······.”
입술 쪼개지는 것 봐라. 그래. 마음껏 기뻐하고 고마워해라. 정령소환력 오를 수 있을 정도로.
그게 나에게 보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어려울 때 돕고 사는 거죠. 제가 머리는 나빠도 힘은 좀 씁니다. 제가 올려드릴 테니까 안에서 차곡차곡 쌓으세요.”
“주말에 시합 뛰셔야 할 분이 이렇게 무리하셔도 될지 모르겠네요.”
“그래요. 무리하지 마세요.”
자꾸 마음에도 없는 말 할래?
“다치지 않을 정도로 요령껏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마음 변하기 전에 시작하죠.”
“아, 예!”
직원들이 바삐 움직였다. 서유림의 말마따나 마음 변하기 전에 얼른얼른 끝내야 할 것이다.
서유림이 박스를 올려주면 그걸 안쪽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이야! 이거 운동 되네! 신난다!
“제가 교대해드릴까요? 좀 쉬면서 하셔야 할 것 같은데.”
“이게 힘보다 요령이거든요. 생각만큼 힘들지 않습니다. 대여섯 빠레트만 더 올리고 쉬죠.”
“와! 서유림씨 체력 짱이네!”
“변강쇠네 변강쇠야!”
전미숙 대리도 물품을 카운트하면서 서유림을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 근력이 1 올랐습니다.
운동은 몰아서 해야 효과가 있는 법이다. 조금 힘들다고 자주자주 쉬어주면 효과가 반감된다. 힘이 들 때일수록 근육을 더욱 바짝 조여줘야 스텟이 팍팍 오른다.
> 체력이 1 올랐습니다.
그렇게 옮기다 보니 그 많은 양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차곡차곡 쌓아올리는 것까지 도와주고 나니 딱 점심시간이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다음에 저희 도움 필요한 일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하하, 알겠습니다. 빨리 끝나서 다행이네요. 전 식사하러 가보겠습니다. 전미숙 대리님도 다음에 뵙겠습니다.”
“고생하셨어요.”
서유림이 얼른 식당으로 달려갔다.
조금 무리했나? 체력이 딸리는 느낌이다. 식당에 가자마자 한동민 체력부터 흡수해야겠다.
그런데 한동민이 자리에 없다. 오늘도 따로 식사약속이 있는 모양이다.
아쉽네.
그렇다고 다른 직원의 체력을 흡수할 수는 없다. 나도 양심이 있는데 멀쩡한 사람의 체력을 도둑질해서야 하겠는가?
그럼 한동민 체력은 왜 도둑질하느냐고?
걔는 체력 있어봤자 국가경제발전에 도움이 안 되잖아. 그렇다고 인구증가에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서유림이 식판 가득 음식을 담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는 우걱우걱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이봐, 강은영씨. 밥 먹을 때는 그렇게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야. 소화 안 되게.
시간이 갈수록 강은영의 눈빛이 그윽해진다. 혼자서 상상을 키우고 있는 느낌이다. 도대체 뭘 바라고 있는 거야?
물론 대충은 안다. 그런데 어디까지 바라는 건지를 모르겠다.
잠깐의 즐거움? 아니면 평생의 반려자?
만약 잠깐의 즐거움을 원하는 거라면 함께 놀아줄까? 강은영 정도 외모라면 누구라도 탐낼 만하지.
솔직히 끌리는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참아야 한다.
사람과 짐승이 다른 게 뭔데? 본능을 자제할 줄 아는 이성이잖아.
남자는 자고로 방망이 관리를 잘해야 한다고 했다. 마음이 조금 끌린다고 되나가나 마구 휘둘러대면 그 방망이가 언젠가는 자기 뒤통수를 치는 법이다.
물론 즐길 수야 있지.
하지만 상대를 잘 골라야 한다.
차라리 생판 모르는 여자가 낫다. 잠깐 즐기고 서로 모른 척하면 다시 마주칠 일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니까.
물론 마음이 통하면 몇 번 더 만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강은영처럼 수시로 마주쳐야 하는 사이라면 그런 선택이 불가능하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계속 만나다 보면 깔끔한 정리가 쉽게 되겠는가?
아무래도 조만간 깔끔하게 선을 그어줘야 할 것 같다.
다른 남자 알아보라고.
식사를 마치고 영양제를 듬뿍 먹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일어나겠습니다. 옮겨야 할 짐이 산더미라서요.”
그러자 강은영도 기다렸다는 듯 얼른 일어선다.
“어머! 그걸 깜빡했네. 저도 먼저 일어설게요.”
뭘 깜빡했는데? 거짓말인 게 너무 티나잖아.
예상대로다. 강은영이 서유림을 졸졸 따라온다. 그것도 모자라서 팔짱을 끼며 바짝 달라붙는다.
이 여자가 왜 이래? 허락도 없이.
얼른 팔을 빼려고 하는데 강은영이 이상한 말을 한다.
“오빠 이번 주말에 최종예선 나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왜?”
“아까 한동민 대리가 투신인가 뭔가 하는 사람과 통화하는 것 살짝 엿들었거든요.”
투신?
그래서 서유림을 따라왔던 거구나. 은밀하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바짝 달라붙었던 거고.
괜히 오해했다가 쪽팔릴 뻔했네.
“통화내용이 뭔데?”
“그걸 맨입으로 가르쳐달라고요? 오빠 신상에 무척 중요한 일인데. 최소한 술 한 잔 정도는 사줘야죠.”
왜 그렇게 눈을 새치름하게 뜨고 보는 건데? 그런다고 내가 쉽게 넘어갈 것 같아?
그리고 한동민이 투신과 통화했다면 내용이야 듣지 않아도 빤하다. 이미 가치를 잃은 정보라는 뜻이지.
차라리 이 기회에 선을 확실하게 그어주는 게 좋겠다.
그렇다고 자존심에 상처를 줄 수는 없고.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잖아.
“오늘은 운동 끝나고 애인하고 약속이 있는데.”
“어머! 오빠 사귀는 여자 있었어요?”
문득 아리아나 얼굴이 생각났다. 정령계가 아닌 인간계에서 아리아나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야말로 꿈같은 일이다.
하지만 꿈은 그저 꿈일 뿐이지.
“최근에 만났어.”
“아······!”
해결했군. 이제 좋은 남자 만나서 잘 사세요.
“굳이 얘기해주지 않아도 돼. 설마하니 어디 부러지기야 하겠어?”
“다리를 부러뜨리라고 하던데요.”
순간 눈앞에서 스파크가 튀는 느낌이 들었다.
가벼운 분노였다.
한동민 이 자식 안 되겠네. 날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그렇다고 다리를 부러뜨리라는 사주는 너무하는 것 아냐?
“오빠 다리 부러뜨리는 데 성공하면 1천만 원 준다고 하더라고요.”
기가 찼다.
내가 대체 한동민한테 뭘 얼마나 잘못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