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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미친 잠재력-47화 (47/196)

# 47

송곳 파이터 (1)

한동민의 체력을 쪽쪽 빨아준 후에 자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강은영이 얼른 다가와서 책상 위에 비타500을 놓아준다.

뭐야?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게다가 그 눈빛은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데? 밥 달라는 강아지도 아니고.

나한테 뭐 부탁할 거라도 있나?

“내일 제가 응원 갈게요.”

강은영이? 왜?

그리고 왜 자꾸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건데? 설마하니 나를 홀려보겠다는 것도 아닐 테고.

응? 그런 건가?

생각해보니 강은영이 나를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이 며칠 된 것 같다. 부산을 다녀오고 얼마 후부터다.

아! 알 것 같다. 이제야 답이 나오네.

한동민의 변심 때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자면 한동민이 채희라에게 마음을 빼앗기면서부터 강은영을 찬밥처럼 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배를 갈아타야겠는데, 그게 쉽겠는가? 강은영이 한동민과 어떤 관계였는지는 명진식품 전 사원이 다 아는 바인데.

그러다가 내가 눈에 들어온 거겠지.

돈 많고 권력 있는 사람을 잡지 못한다면 몸이라도 좋은 사람을 잡자.

사실 내 몸이 최근이 부쩍 좋아지긴 했잖아.

게다가 내가 강은영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한때는 살짝 그런 적도 있었으니까.

그러니 한번 찔러보는 거겠지.

그런데 강은영씨. 사람은 변하는 거란다. 내가 뭐가 아쉬워서 당신 같은 아가씨에게 마음을 주겠어?

아, 물론 하룻밤 재미나게 놀자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지만.

“오전 열 시에 영등포종합체육관이라고 했죠? 꼭 갈게요.”

오든지 말든지. 굳이 응원 오겠다는 사람한테 ‘오지 마!’ 할 수는 없는 일이잖아.

“고마워.”

“저도 응원 갈게요.”

응? 권진아씨도?

“저도요.”

강철중씨도?

그러자 퇴근을 위해서 책상을 정리하던 한동민이 헛웃음을 놓았다.

“허허, 난리 났군. 팀원들 앞에서 무슨 개쪽이야? 서유림씨, 아무래도 내일 출전은 안 하는 게 낫겠어. 하하. 하~암. 씨발. 요즘 몸이 왜 이래? 한약도 소용없네.”

글쎄. 개쪽을 당할지 팀원들 개안(開眼)을 시킬지는 내일 보면 알겠지.

사실 난 내일 1차 예선을 통과하고 못하고는 별 관심 없다. 내 능력에 대한 믿음이 있으니까.

내 관심은 오직 크로스 카운터 기술이 실전에서도 먹히느냐 하는 것에만 있다. 비록 짧은 기간이긴 하지만 얼마나 공들여서 실력을 가다듬었는데.

빨리 내일이 왔으면 좋겠다.

그리고 빨리 실전에서 사용해보고 싶었다.

내 송곳 같은 크로스 카운터 한 방에 상대방이 나가 떨어지는 모습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두근했다.

그래! 송곳 같은 크로스 카운터 펀치! 송곳 파이터!

이제부터 링에서의 내 별명은 ‘송곳 파이터’가 될 거다.

“다들 고마워요. 그럼 내일 봐요.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아이고, 허리야. 오늘따라 허리가 더 아프네.”

서유림이 사무실을 나섰다.

다음날 오전 영등포종합체육관.

와! 그냥 지역 예선전일 뿐인데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

저들 중 일부는 예선 참가를 위해 온 참가자들이겠지?

서유림도 일단은 관중석에 앉았다.

삐걱. 삐걱.

중앙에는 임시로 만들어진 무대가 있었다. 옥타곤이나 링도 없이 대충 바닥만 설치한 무대였다.

동그랗게 그려진 선은 경기 중 밖으로 나가면 파울이라는 뜻이겠지.

“그럼 ‘주먹은 운다.’ 예선을 시작하겠습니다. 먼저 진행순서를······.”

조금은 지루한 설명.

삐걱. 삐걱.

진행상황을 보니 대략 20개 팀이 밖에서 몸을 풀며 대기하고, 2개 팀이 무대 뒤에서 대기하고, 나머지 참가자들은 이렇게 관중석에서 기다리는 방식이었다.

물론 대결은 체급별로 치러졌다.

하품을 스무 번쯤 하고 나서야 비로소 첫 번째 예선경기가 치러졌다.

삐걱. 삐걱.

서유림은 손으로는 연신 악력기를 움직이면서도 두 눈은 참가자들의 경기를 지켜보았다.

에이. 수준이 왜 저래? 저건 동네 양아치 싸움이잖아.

훈수 두는 눈으로 보아서 그런가? 경기 수준이 형편없었다. 몸도 느리고, 주먹도 매섭지 못하고, 서브미션 기술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이따금 나와도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물론 ‘네가 직접 해봐라.’ 하면 저보다 못할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보이는 바로는 한심한 수준이었다.

그러다가 이따금 실력자들이 눈에 띄기도 했다.

오! 움직임이 매끄러운데.

반면 상대는 수준이 낮았다. 마음만 먹는다면 30초 이내에 승부가 날 수 있는 실력 차였다.

하지만 실력자는 경기를 빨리 끝내지 않았다. 마치 대회 관계자들에게 자신의 실력을 보여주겠다는 듯.

“서유림씨. 한호영씨. 무대 뒤로 내려와서 준비해주세요.”

이름이 불리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것도 시합이라고 긴장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쨌건 드디어 내 차례구나. 제발 약한 사람과 붙었으면 좋겠다.

물론 강한 사람과 붙어도 이길 자신은 있지만, 이왕이면 실력을 노출시키지 않고 빠르고 시원하게 끝내버리고 싶었다.

천천히 무대 뒤로 움직였다.

그런데 갑자기 서유림의 어깨를 잡아채는 손이 있었다. 거친 목소리와 함께.

“어! 너 그때 그 새끼 아니야?”

누군데 다짜고짜 막말이야? 내가 여기 왔다는 사실은 친구들도 모르는데. 오직 우리 구매팀 직원들밖에 모르는데.

서유림이 고개를 돌렸다.

어! 낯이 익은데? 어디에서 봤지?

특히 광대뼈에 나있는 칼자국이 인상적이었다. 분명 어디에선가 본 기억이 있는 얼굴······!

“아! 부산의 그 깡패!”

“이런 개새끼.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너······ 어! 너 이 새끼, 어디 가?”

칼자국 사내가 서유림을 다시 잡아채기 위해 손을 휘둘렀지만, 서유림은 이미 빠르게 내려가고 있었다.

분명히 말하는데, 이거 도망치는 거 아니다. 내가 지금 너하고 노닥거릴 시간이 없거든.

“경기 준비해야 하니까 용건 있으면 나중에 보자.”

“뭐? 경기?”

칼자국 사내가 서유림을 따라서 재빨리 내려왔다.

하지만 소용없을 거다. 저 문은 예선참가 신청자만 통과할 수 있거든. 바로 이 접수증을 가진 사람 말이다.

서유림이 접수증을 내밀자 검은 양복사내 두 명이 친절하게 ‘들어가세요.’ 하는 손동작을 해보였다.

어디 한 번 따라 들어와 봐.

어! 뭐야? 저 놈도 예선참가자였나?

칼자국 사내도 접수증을 내보이고는 실외에 마련된 몸 푸는 장소로 들어왔다.

다짜고짜 서유림을 향해 매서운 눈빛을 쏘아 보냈다.

“네가 서유림이냐?”

“그럼 당신이 한호영?”

딱 보니 키는 서유림보다 조금 작지만 몸무게는 비슷할 것 같았다. 이놈도 영락없는 미들급이다.

“개새끼. 재수도 더럽게 없구나. 예선 1차전에서부터 나를 만나다니. 그때는 내가 방심해서······.”

그놈 참 말 많네.

그러고 보니 앞니가 멀쩡하네. 그때 확실하게 털어줬어야 이빨을 제대로 못 깠을 텐데.

역시 아직은 힘을 다루는 것이 미숙하다. ‘이 정도면 앞니 두 개다.’ 할 정도로 힘을 조절할 수 있어야 하는데, 무식하게 세기만 하지 아직 그런 세세한 힘 조절은 불가능하다.

뭐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럽게 감이 집히겠지.

그나저나 시끄러워 죽겠네. 다른 사람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걸 아주 쉽게 말하던데, 나는 왜 그게 안 되지. 양쪽 귀로 다 들려서 그런가?

그런데 저 문신은 다 뭐야? 옷을 다 벗은 것 같은데, 벗었는지 입었는지 구분이 안 될 정도로 문신이 많다.

조폭인 것 티내려고 작정을 했구나! 그러면 상대방이 문신만 보고도 겁먹을 거라고 생각한 모양이지?

그냥 신경 쓰지 않고 경기 준비나 했다.

아마추어들이 참여하는 예선전이니만큼 보호 장비는 필수였다. 헤드기어를 착용하고 이종격투기용 글러브를 착용했다.

운동복도 지급되는 것으로 갈아입었다.

이렇게 완벽하게 세팅하고 나니 나도 선수가 된 느낌이다.

몸이나 풀어볼까? 헛둘! 헛둘!

그러는 와중에도 한호영은 험한 말을 그치지 않았다. 저놈은 주먹이 아닌 말로 나를 쓰러뜨리려는 것 같다.

“헤드기어 쓴다고 완벽하게 막아질 것 같지? 그래도 안면은 훤히 드러나거든.”

아, 시끄러. 헤드기어에 방음장치가 되어있었으면 좋겠다.

“내가 오늘 네 코를 묵사발로 만들어주지. 부러진 코 세우려면 돈 좀 들 거다. 그런 다음······.”

어! 가만있어봐! 이건 좀 들어둬야겠다. 충분히 참고할만한 가치가 있는 정보거든.

코를 어떻게 한다고? 오! 그거 재미있겠네!

너한테는 조금 미안하게 됐다.

분명히 말하는데 너한테 개인적인 원한은 없다. 그냥 평소에 지은 죗값 치르는 거라고 생각해라.

그러는 사이 다시 이름이 불렸다. 함께 대기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분위기가 조금 다른 사람이 대기실 안으로 들어왔다. 한호영이 얼른 손을 흔들며 반겼다.

“형님! 여깁니다.”

“어, 그래! 드디어 호영이도 왔구나!”

“제가 본선 진출하면 형님께서 투신 상대로 나와 주시는 겁니까?”

“웬만하면 그러려고. 그래도 열심히 해라. 사장님께서 직접 보고 계시기 때문에 실력 없으면 투신 할아버지가 와도 본선 진출 못해.”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단 오늘은 저놈 코뼈부터 부러뜨리고요.”

한호영이 갑자기 서유림을 가리켰다.

투신이라는 자의 시선도 당연히 함께 따라왔다.

“아는 사이야?”

“부산에서 방심한 틈에 기습당했다고 했잖아요.”

“그럼 그때 말했던 새끼가 저 새끼야?”

이놈들 정말 형편없네. 나이도 어린놈들이 자꾸 새끼 새끼 하고 있어.

어쨌건 분위기가 그리 좋지는 않다. 저놈이 투신과 아는 사이일 줄이야.

상관없지 뭐. 아는 사이면 어쩔 건데? 네가 대신 출전하기라도 할래?

물론 그렇다고 불꽃 튀기며 싸울 필요는 없다. 개가 짖는다고 함께 짖으면 똑같이 개새끼 취급당할 테니까.

아예 시선을 돌리고 아무 목소리도 안 들리는 척했다.

다시 투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쉽다! 저 새끼 최종예선전 올라오면 내가 재미있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걱정하지 마세요, 형님. 그 재미, 제가 실컷 보여드릴 테니까요.”

“그래그래.”

그러는 사이 다시 이름이 불렸다.

얼른 경기장 안으로 들어갔다.

순간 여기저기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파이팅!”

“그 새끼 죽여 버려요.”

하나같이 한호영을 응원하는 목소리다. 떨거지들을 참 많이도 데려왔다. 얼핏 봐도 한호영을 응원하러 온 사람만 20명은 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저 플래카드는 또 뭐야?

[부산 핵주먹 한호영! 우승까지 GO! GO!]

펀치력 좀 있나 보지?

가만있어봐. 그때 부산에서 맞아보지 않았나? 별로였었던 것 같은데.

오늘 다시 맛 좀 볼까?

땡!

한호영은 저돌적인 놈이었다. 공이 울리자마자 냅다 달려와서 주먹부터 날렸다.

폼은 제법 깔끔했다. 권투를 제법 오래 연습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스피드는 떨어졌다. 마음만 먹으면 모든 공격을 피하거나 막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일부러 살짝살짝 맞아보았다.

주먹이 가볍지는 않았다. 핵주먹이나 돌주먹까지는 못 되겠지만, 자갈주먹 정도는 될 것 같았다.

물론 서유림에게는 아무런 충격을 주지 못했다. 헤드기어 없이 맨얼굴로 맞는다고 해도 얼마든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다.

한호영은 열심히 주먹을 날렸다. 자신의 주먹으로 서유림의 가드를 깨뜨려버리겠다는 듯.

발치기도 열심히 시도했다. 하지만 동작이 너무 커서 100% 다 수비해낼 수 있겠다.

반면 서유림은 공격하지 않았다. 한호영의 움직임을 매섭게 살피며 이리저리 몸을 피하고 가드로 막아내기만 했다.

물론 간간이 주먹을 뻗긴 했지만, 힘을 완전히 뺐다.

이유? 간단하다. 최대한 시간을 끌기 위해서.

언제 이렇게 실전연습을 해봐? 기회가 왔을 때 충분히 활용해야지.

좀 더 힘을 내보라고, 친구!

그런데 이런!

한호영이 주먹은 제법 좋은데 체력이 형편없었다. 겨우 30초도 못 돼서 벌써 숨소리가 거칠다. 주먹도 확연하게 느려졌다.

실전감각 좀 익혀볼까 했는데, 더는 시간을 끌 의미가 없다.

기회를 노리면서 아까 한호영이 들려준 말을 떠올렸다.

‘코를 어떻게 한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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