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
원 포인트 레슨 (2)
직원들의 이야기를 조금 더 엿들었다.
아직 확실하게 발표된 내용이 아니라서 신빙성은 없다고 했다.
하지만 서유림은 그 액수가 확실하다고 믿었다.
유진그룹이 어떤 기업인가? 국내 10대그룹에 속하는 대기업 아닌가?
게다가 명진식품은 물론이고 계열사 대부분이 고속성장을 하고 있었다.
유진그룹 회장이 대통령 영부인과 막역한 관계이기 때문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이번 대통령 집권 때까지는 이런 성장이 계속될 거라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 유진그룹이 배팅을 하는 판이니 규모가 작을 수가 있겠나? 체면을 살리기 위해서라도 어마어마한 배팅을 할 것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10억 원은 오히려 작은 돈이었다. 국내의 다른 격투기 단체도 그 정도 상금을 내건 경우는 가끔 있었으니까.
갑자기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10억 원은 내 거다!’
다시 일어서서 동영상을 따라 원투 스트레이트를 연습했다.
그런데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어! 채희라네.
부산을 다녀오고 겨우 사흘째.
채희라는 매일같이 전화를 걸어오고 있었다. 그것도 하루에 두세 번씩.
점심 무렵 한 번, 저녁 무렵 한 번, 잠들기 전 무렵에 또 한 번.
특별한 용건은 없었다. 그냥 목소리 듣고 싶다는 정도.
만나서 놀자는 이야기도 없다.
하긴, 직업이 텐프로이니 서유림이 퇴근한 시각에는 손님 상대하기에도 바쁘겠지. 그때처럼 여행이라도 가서 여유가 생긴다면 모를까.
“어, 희라야.”
- 오빠. 이번에 ‘주먹이 운다.’에 나갈 거라고 했지?
“그랬지.”
- 근데 타격이 부족하다고 하지 않았나? 전담코치 한 명 사서 훈련하고 싶을 정도로.
사실 이런 일을 속 터놓고 이야기할만한 사람이 채희라밖에 없었다.
가족에게 이야기하자니 걱정만 하실 테고, 직장 동료들에게 이야기하자니 들은 체도 하지 않을 것이고.
오직 채희라만 내 편이 되어서 이야기를 잘 들어준다.
그러니 딱히 뭔가를 바라는 것 없이 그냥 하소연하듯 주절거리곤 했다. 그러고 나면 왠지 모르게 마음의 위안이 되곤 했다.
“맞아. 근데 갑자기 그건 왜?”
- 내가 아주 괜찮은 타격코치 한명 소개해줄까? 값은 공짜. 대신 나중에 내 부탁 하나 들어주기.
갑자기 눈이 번쩍 떠졌다.
타격코치?
게다가 채희라가 소개해준다고?
서유림은 채희라가 보통 여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녀 자체도 대단하지만, 그보다는 그녀가 만나는 사람들이 보통 사람들이 아닐 테니까.
채희라 같은 미녀 텐프로를 아무나 만날 수는 없지 않겠는가?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거나, 아니면 적어도 한 분야에서만큼은 기본적인 능력을 갖추었을 것이다.
물론 그런 걸로 사람을 판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말이다.
타격코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쪽 분야에서 웬만큼 성공을 거두었으니 채희라 같은 여자와 안면을 틀 수 있지 않았겠는가?
설령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없는 것보다는 무조건 나을 것이다.
문제는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점이다. 채희라가 나중에 무슨 부탁을 하려는 것일까?
문득 채희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조만간 내 이름으로 가게 하나 낼 건데. 함께 일 해볼래?]
혹시 호스트로 일 해달라는 부탁을 하려는 것은 아니겠지?
에이, 그건 말도 안 되고.
그러면 내 주먹을 자신의 가게를 위해서 써달라는 부탁을 하려는 걸까?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그건 들어줄 수 없는 부탁인데.
모르겠다. 혼자 고민할 이유 있나? 대놓고 물어보는 게 제일 속편하겠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냐? 무슨 부탁 할 건데?”
- 왜? 내가 깡패들하고 싸워달라고 부탁이라도 할까봐 겁나?
순간 가슴이 뜨끔했다.
하여튼 귀신이라니까.
- 걱정하지 마셔. 그런 부담 안 줄 테니까. 치잇. 난 그냥 오빠가 좋아서 순수한 마음에 도와주려는 건데. 그냥 가끔 만나서 나 사랑해줘.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진즉에 그렇게 말을 할 것이지.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잖아.
“나야 고맙지. 근데 타격코치라는 분은 누구야?”
- 우리 삼촌. 예전에 제법 이름 좀 날리던 권투선수였는데 지금은 은퇴하고 학생들 가르치고 있어. 오늘 저녁에 약속 잡아볼 테니까 시간 비워둬.
“삼촌?”
- 친삼촌은 아니고. 오빤 거기까지는 몰라도 돼. 사연이 복잡해.
둘이 어떤 관계일지는 대충 짐작이 간다.
하지만 채희라 말대로 서유림이 참견할 문제는 아니다. 서유림은 그저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으면 되는 일이니까.
- 아무튼 오늘 저녁에 시간 되지?
물론이지. 내가 누군지 몰라? 나 칼퇴근 서유림이라고.
“땡큐!”
늦은 오후.
서유림은 퇴근하자마자 약속장소로 향했다.
복성체육관.
대중교통을 이용해도 30분 걸리고, 뛰어가도 1시간 이내에 도착할 것 같아서 그냥 뛰어갔다.
체육관 건물은 낡은데다가 규모도 작았다. 외관만으로 평가한다면 조금 실망스러운 수준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기대가 되었다.
이런 체육관에 있는 사람이라면 금전적으로 여유롭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채희라 같은 여자와 안면이 있다.
그렇다면 돈 외의 다른 무엇인가가 있다는 뜻 아니겠는가?
희망을 품고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막상 안으로 들어가니 겉에서 보는 것보다는 조금 넓어보였다. 내부는 그저 흔한 복싱 체육관이었다.
“오빠, 여기!”
채희라가 저쪽에서 손을 흔들었다.
타이트한 운동복 차림이었다. 줄넘기를 심하게 했는지 운동복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채희라도 이곳에서 운동을 하는 모양이다.
그런데 나는 왜 저런 모습이 더 섹시해보이지?
애써 무덤덤한 척하며 다가갔다.
“인사드려. 배복성 관장님이셔. 복싱 실력이 이거야 이거. 진짜 끝내주셔.”
채희라가 엄지손가락을 쭉 내밀었다.
그런데 깜짝 놀랐다. ‘배복성’이라는 이름과 외모가 너무도 일치한다.
나이는 50대 초반쯤 되었을까? 배가 뿔룩하다. 강성체육관 관장도 배가 뽈록한 편인데, 배복성 관장과 비교하면 날씬한 편에 속하겠다.
그런데 실력이 그렇게 좋다고? 왠지 모르겠지만, 채희라가 장담하니 신빙성이 팍팍 올라가는 느낌이다.
하긴, 외모가 뭐가 중요해? 실력이 중요하지.
얼른 허리를 깊이 숙였다. 소개해준 채희라 체면을 생각해서라도 최대한 예의를 갖춰야 할 것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서유림입니다.”
“반가워. 이번에 주먹이 운다.에 나간다고? 그거 예선 시작까지 열흘 정도밖에 안 남았잖아. 준비는 많이 했어?”
입을 열자마자 술 냄새가 짙게 풍겼다. 낮술을 하고 왔나? 아무래도 저 배가 전부 술로 만들어진 모양이다.
“지금 준비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즌도 있고 그다음 시즌도 있으니까요.”
물론 이번 시즌에 끝을 본다. 다음 시즌 운운한 것은 ‘그 실력으로 되겠어?’ 같은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일 뿐이다.
“그럼 어디 실력 좀 볼까? 몸은 밖에서 이미 다 풀어놓은 것 같은데, 시간도 없으니까 바로 시작할까?”
“저는 좋습니다.”
곧바로 링에 올랐다. 헤드기어와 두툼한 글러브를 착용하고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청년과 가볍게 스파링했다.
물론 펀치에 전혀 힘을 주지 않았다. 단지 타격폼과 타이밍 맞추는 데에만 집중했다.
“됐어, 됐어. 더 볼 것도 없네. 그만 내려와.”
서유림이 다시 배복성 앞에 섰다.
“운동을 제대로 배워본 적이 전혀 없구먼!”
“예.”
“막막하네. 어디부터 가르쳐야 할지.”
당연히 그러겠지. 내 능력을 전혀 모르니까. 아저씨는 그냥 내가 필요한 것만 가르쳐줘.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실례되는 말씀인 건 알지만······ 원 포인트 레슨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원 포인트 레슨?”
서유림이 얼른 휴대폰을 열어서 최두오의 동영상을 보여주었다. 상대방의 펀치를 피하면서 원투스트레이트를 꽂아 넣는 영상이었다.
이어서 코너 막그리거의 동영상도 보여주었다.
“이번 주먹이 운다에서 목표로 삼은 동작입니다. 이기건 지건 이 원투 스트레이트 한 번만 제대로 넣어봤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기본기 없이는 나오기 힘든 자세인데. 열흘 정도밖에 안 남은 시점에서 되려나 모르겠네.”
보통 사람이라면 물론 불가능하겠지.
하지만 난 평범한 수준을 넘어선 능력자라라니까. 잘하면 될 수도 있어. 아저씨는 그냥 가르쳐주기만 하면 돼.
“그래도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그래요, 삼촌. 삼촌도 그랬잖아요. 목표를 높게 잡아야 절반이라도 오를 수 있다고.”
채희라가 적당한 시점에 끼어들어준다.
“그건 그렇지. 좋아. 우리 희라의 부탁이니까 특별히 내가 직접 가르쳐주지. 이쪽으로 와봐!”
배복성이 서유림을 구석의 공간으로 이끌었다.
“먼저 눈이 좋아야 해. 상대방의 움직임을 읽는 눈. 내가 가볍게 펀치를 날려볼 테니까 움직임을 읽고 방어해봐. 막아도 좋고 피해도 좋아.”
배복성이 글러브를 끼고 서유림에게 펀치를 날렸다.
부산에서 만났던 최영만의 펀치보다 속도가 훨씬 느렸다.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다.
하긴, 나이도 있는데다가 글러브 무게가 월등하게 차이나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서유림이 제법 날쌔게 피하거나 막았다.
배복성의 눈이 살짝 커졌다. 눅눅하게 가라앉아있던 눈빛도 조금씩 초롱초롱해지는 느낌이다.
“허허, 이 친구 봐! 재미있네!”
뭐가 재미있다는 거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눈을 크게 뜨고 배복성의 펀치를 막거나 피하는 데만 집중했다.
배복성의 펀치가 조금 더 빠르고 강해졌다. 게다가 날카로워지기까지 했다. 가드를 올리고 있는데, 그 안을 파고들고 안면을 때리는 것도 있었다.
채희라의 말대로 실력이 가볍지는 않은 것 같았다. 이렇게 가드를 쉽게 뚫고 펀치를 넣다니.
하지만 서유림의 놀라움보다는 배복성의 놀라움이 더욱 컸다.
“이 친구 눈을 안 감네! 그것만 해도 절반은 성공이야. 남들보다 두세 배는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겠어.”
눈을 왜 감아? 그러면 어떻게 막거나 피하라고.
가장 기본 아닌가?
하지만 배복성은 어느새 신이 나있었다.
“제법 감각도 있고. 재미있겠는걸. 좋아. 오! 잘 피하네! 그렇지!”
배복성의 펀치가 쉬지 않고 날아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펀치의 강도도 세지고 속도도 빨라졌다.
이제야 배복성의 몸이 풀리는 건가? 아니면 아까는 일부러 살살 해줬던 것일까?
아무래도 후자였던 듯하다. 펀치 속도가 점점 더 빨라진다. 처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피하기 힘들 정도의 펀치였다.
배복성의 펀치를 피하기 위해서 눈을 더욱 크게 떴다.
“그렇지. 거기에서 딱 멈춰봐. 내가 펀치를 날리면 이런 자세가 되지? 그러면 내가 이쪽 가드를 올리고 있어도 이 공간은 비어있을 수밖에 없어. 그 타이밍을 정확하게 노려서 치면 되는 거야.”
배복성이 동작 하나하나를 손으로 움직여주면서 자세히 가르쳐주었다.
설명이 친절해서인지, 내 이해력이 좋아서인지 이론상으로는 대충 이해가 갔다. 어느 타이밍에 주먹을 어떻게 뻗어야 하는지에 대한 느낌이 왔다.
그러는 사이 채희라는 짐을 챙기고 체육관을 나섰다.
“전 이만 가볼게요.”
“그래. 내일 보자고.”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다시 배복성 관장과의 훈련에 집중했다.
“이때 때려! 늦었어.”
“지금이야. 에헤이. 타이밍이 엇박자잖아.”
역시 쉬운 일이 아니구나. 기분 상으로는 완벽한 타이밍에 주먹을 집어넣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자꾸만 타이밍이 어긋났다. 내가 봐도 이건 아니다 싶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하지만 이제 겨우 시작 아닌가?
아직 열흘 남았다. 열흘 안에 타이밍을 몸으로 익힌다!
서유림이 눈을 부릅뜨고 훈련을 계속했다.
시간이 순식간에 지났다. 어느새 ‘주먹이 운다.’의 예선 날자가 되었다.
‘드디어 내일이군!’
가슴이 뛰었다.
과연 내가 예선을 통과할 수 있을까?
만약 부산의 최영만 같은 놈과 처음부터 만나게 된다면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때 기술적인 실력 차가 워낙 컸으니까.
하지만 기술이 전부는 아니지. 내게는 맷집과 펀치력이 있잖아.
게다가 그때와 비교해서 스텟도 엄청나게 올랐다.
‘아리안. 지금 스텟이 어느 정도 되지?’
> 근력은 321, 순발력은 336, 체력은 373, 감각은 232입니다.
오늘만 벌써 세 번째 묻고 세 번째 들었다.
듣고 또 들어도 기분 좋은 소리라서 자꾸 묻고 자꾸 확인하고 싶었다.
정령 아리안도 귀찮아하지 않는데 뭐 어때?
대부분 능력치가 일반 사람의 3배가 넘었다. 이 정도면 각각의 능력치가 세계 최고수준 아닐까?
물론 어마어마하게 힘이 세거나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사람도 있겠지만, 그래도 세계 0.01% 안에 든다고 확신했다.
능력치의 합은 아마 1등이겠지.
이 정도라면 기술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예선 정도는 가볍게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최고 무대인 UFC도 아니고 국내에서 아마추어를 상대로 한 인재 발굴 프로그램인데 뭐.
그래도 아직 부족해.
그 누구를 만나더라도 압도적인 실력차로 이길 수 있어야 한다. 변수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강해져야 한다.
“피하고, 원투! 숙이고, 원투! ······.”
시간이 날 때마다 휴대폰 동영상도 분석하고, 직접 몸으로 원투 스트레이트 타이밍 잡는 연습을 계속했다.
겨우 열흘 정도밖에 안 되는 연습시간이었지만 효과는 컸다. 머리나 눈이 아닌 몸으로 타이밍을 익혔다.
덕분에 이제는 배복성 관장의 펀치에 맞추어서 정확한 타이밍에 맞받아치는 것도 가능했다. 배복성 관장도 인정하는 수준이었다.
“그 정도면 선수급이지.”
느낌 좋아. 다시.
“피하고! 원투! 숙이고! 원투!”
펀치 연습이 지루해지면, 20kg으로 맞춘 덤벨을 각각 한손에 들었다. 그 상태로 원투 스트레이트도 뻗어보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온몸의 근육을 단련시켰다.
처음에는 제법 운동이 되었는데, 이것도 무게가 적응되었는지 그리 묵직한 느낌은 들지 않았다.
‘내일부터는 덤벨을 각각 30kg에 맞춰야겠구나. 다시 해볼까?’
웃쌰! 웃쌰!
어느덧 늦은 오후가 되었다. 다시 칼퇴근을 준비할 시간이 된 것이다.
서유림이 깔끔하게 샤워를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갔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앓는 소리부터 했다.
“창고 다녀왔습니다. 아휴, 허리야!”
그에 대한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팀원이 몇 명이나 된다고 저렇게 차이가 날까?
특히 강철중 사원과 한동민 대리의 반응이 극명하게 엇갈렸다.
강철중은 늘 미안한 표정이었다. 서유림이 사무실만 들어오면 바늘방석에 앉은 것처럼 안절부절못했다.
반면 한동민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만성피로에 시달려서 늘 다크서클을 붙이고 살면서도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다.
아직은 살만하다 그거겠지.
이러다가 만성피로로 죽어버리면 어쩌나 싶은 걱정마저 들었는데, 저 웃음을 보니 안심이다.
아직 한참 더 빨아줘도 되겠어.
“드디어 내일이네.”
“뭐가요?”
“뭐긴 뭐야? 주먹이 운다지.”
“예? 그게 벌써 내일이었나요?”
서유림이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는 듯 깜짝 놀라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었다.
“상관없습니다. 어차피 이번 시즌은 그냥 경험삼아 참가하는 거니까요. 내년 시즌에는 틀림없이 본선 진출할 수 있을 겁니다.”
“적당히 해. 고수들 앞에서 괜히 까불다가 어디 부러져서 오지 말고.”
그러기를 바라는 거겠지.
하지만 염려 붙들어 매셔. 내가 부러뜨리면 부러뜨렸지 거꾸로 당할 일은 없을 테니까.
“에이, 설마하니 그 정도로 심하게 하겠어요?”
“후훗, 당해보면 알겠지.”
한동민은 뭐가 좋은지 피실피실 웃었다.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웃을 수 있나 보자?
서유림이 그런 한동민 뒤로 다가가서 어깨를 주물었다.
“그런데 내일 응원 와주실 거죠?”
“응원은 무슨. 나 바쁜 거 몰라?”
“에이, 우리 가족이잖아요.”
“됐어. 다른 팀원들한테 부탁하던가. 난 약속 있어.”
나도 알고 있다. 그 약속대상이 채희라라는 것까지도.
아마 한껏 부풀어 있겠지. 혹시 채희라의 속살이라도 만져볼 수 있을까 싶어서 말이야.
하지만 기대하지 마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클 테니까. 아마 비아그라 열 알을 먹어도 남자구실 제대로 하기 힘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