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
원 포인트 레슨 (1)
서유림의 얼굴이 이렇게 반가울 수가.
그런데 혼자가 아니다. 옆에 웬 아가씨가 함께 걸어오고 있다.
강은영은 아가씨를 보자마자 본능적으로 위기감을 느꼈다. 어찌나 예쁜지 얼굴에서 광채가 뿜어지는 듯했다.
옆에 서기 싫다. 그 자체가 굴욕이 될 것 같다.
강은영이 그렇게 느끼는데 한동민은 오죽하겠는가?
‘서유림’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씹어 먹을 듯 얼굴을 찌푸리다가 그대로 얼음이 되어버렸다.
한순간에 넋이 나가버린 듯했다.
그러는 사이 서유림이 채희라와 함께 다가왔다.
“먼저 나와 계셨네요. 이쪽은 채희라라고 길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집이 서울이라고 하더라고요.”
“안녕하세요. 채희라에요.”
와! 얘 뭐야?
한동민을 만나는 순간 말투와 행동이 180도 바뀔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그것을 훨씬 뛰어넘는 반전이었다.
이렇게 수줍을 수가.
이렇게 얌전할 수가.
이렇게 청순할 수가.
채희라가 탄력 있는 생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기며 수줍게 인사하는데, 마치 세상물정이라고는 요만큼도 모르는 갓 입학한 대학 새내기 느낌이다.
“······아! 예. 아, 안녕하세요. 한동민입니다. 하하하.”
한동민이 막혔던 숨을 토해내듯 인사를 받았다.
“그런데 어떻게······?”
“부산 놀러왔다가 우연히 유림씨를 만났어요. 마침 서울 올라가신다고 해서······ 저도 서울이 집이거든요.”
“오늘 올라갈 계획이라고 해서 제가 함께 가자고 했습니다. 어차피 한 자리 남잖아요. 대리님이 싫다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요.”
서유림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채희라가 가능한 한 말을 적게 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해서였다. 말수를 줄여야만 수줍음이 느껴져서 청순미가 돋보인다나 뭐라나.
거기에 약간의 신비감은 덤이란다.
“싫다니요. 당연히 괜찮죠. 타시죠. 그런데 차가 누추해서······.”
대당 5억 원도 넘는 고급 외제차다. 게다가 매일같이 때 빼고 광내서 새 차처럼 번쩍번쩍하다.
그런 차가 누추하다니.
“그럼 실례할게요. 그런데······ 유림씨 발목 다친 것 괜찮아요? 운전하기 힘들 텐데.”
응? 내 발목이 다쳤다고?
서유림이 순간적으로 멍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0.5초 만에 채희라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요거, 요거······ 하여튼 요~물이라니까.
그런 수작을 부릴 거였으면 미리 말이라도 맞추던가. 그렇게 갑자기 던지면 내가 맞춰주기 힘들잖아.
서유림이 재빨리 눈치 채고 다리를 쩔룩이기 시작했다.
“괜찮아요. 운전하는 데는 큰 지장 없어······ 아야!”
“왜 그래? 발목 다쳤어?”
한동민이 서유림을 걱정해주는 척 부산을 떤다.
이만큼 부하직원을 아끼는 상사라 그거지.
그런데 이 팔 좀 놓자. 너랑 살 부대끼니까 속이 느글거린다.
보너스로 체력 좀 흡수해줄까 하다가 관뒀다. 채희라 하는 걸 보니 한동민 운전시키려는 것 같은데, 너무 피곤해서 졸기라도 하면 큰일 아닌가?
서울 도착할 때까지만 봐준다.
“절 도와주시다가 발목을 다치셨거든요. 조금 많이 삐끗하신 것 같던데. 붓진 않았어요?”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래도 운전은 어려울 텐데. 불안하네. 안되겠다. 전 그냥 버스 타고 갈게요. 마음만으로도 감사했어요.”
채희라가 작별을 고하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한동민이 놀라서 펄쩍 뛰었다. 이제 막 운전석으로 들어가려는 서유림을 끌어내렸다.
“그런 발목으로 운전하면 위험하지. 강은영씨가 대신 핸들 잡아.”
와, 이놈 발상 참 독특하네. 난 네가 직접 운전한다는 줄 알았다. 그걸 또 강은영씨한테 떠넘기냐?
강은영도 놀라서 어깨를 움찔했다.
“예? 제가요? 저······ 장롱면허인데.”
“강은영씨 나이가 몇인데 아직까지 장롱면허에요?”
한동민이 강은영을 나무랐다. 하지만 옆에서 채희라가 지켜보고 있으니 나무라는 것도 저렇게 부드러울 수가 없다.
물론 강은영은 순식간에 풀 죽은 표정을 했다.
“저 신경 쓰지 마세요. 전 그냥 버스 타고 가면 돼요. 조심히 가세요.”
와! 채희라 연기력 좋네. 연기해도 되겠어.
이것으로 게임 끝이다.
한동민이 깜짝 놀라서 채희라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
“에이, 여기까지 오셨는데. 제가 운전하면 됩니다. 저 베스트 드라이버에요. 댁까지 편안하게 모셔다드릴 테니까 타세요.”
“안 그러셔도 되는데······. 죄송해서 어쩌지?”
표정 하나 동작 하나 명품이다 명품. 어쩜 저렇게 청순하고 얌전해보일까? 내 심장이 다 벌렁거릴 지경이다.
“강은영씨. 서유림씨하고 뒤에 타!”
쯧쯧. 졸지에 강은영이 헌 고무신짝 신세가 되었군. 저렇게 대놓고 팽을 당하다니.
하지만 강은영은 찍소리도 못했다. 언젠가는 이런 신세가 될 것을 본인도 예상하고 있었겠지.
서유림과 함께 뒷좌석에 앉았다.
대신 조수석은 채희라 차지였다.
한동민이 발바리처럼 뛰어와서 문을 열어주는 매너까지 보여준다.
“어머! 문도 열어주시고. 이런 대접 처음 받아 봐요. 정말 감동이에요.”
채희라 저거, 저거, 저거······.
선수네! 한동민보다 서너 수 위야.
이제 내가 또 나설 차례인가? 하여튼 각본도 잘 짠다니까.
“그런데 채희라씨는 애인 없어요?”
“······없어요.”
채희라가 수줍다는 듯 숨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채희라를 모르는 사람이라면 ‘무슨 수줍음이 저렇게 많아?’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에이, 채희라씨 같은 미인이 애인이 없다는 게 말이 돼요? 한 서너 명은 거느려야 정상이지.”
“부모님이 너무 보수적이라서 남자 사귀어본 적도 없어요.”
“정말요? 그럼 제가 한 달만 남자친구 해드릴까요? 일단 사귀어보고 맘에 들면 계속 사귀는 거죠.”
“어머. 안돼요~오.”
저 말투는 뭐야? 애교 부리는 것도 아니고.
마치 말은 안 된다고 하면서도 속뜻으로는 ‘좋아요. 돼요. 그렇게 해주세요.’ 라고 말하는 느낌이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지금쯤이면 한동민 거시기가 정신 못 차리고 껄떡대고 있을 것이다.
아! 어제 체력을 쪽 빨려서 그럴 힘이 없으려나?
어쨌건 심장은 콩닥콩닥 뛰고 있을 것이다.
나머지는 채희라가 알아서 하겠지 뭐.
“제 전화번호 아시죠? 혹시 생각 바뀌면 연락 주세요. 저는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 사람입니다.”
“안 되는데~에.”
채희라가 심하게 갈등된다는 듯 휴대폰을 만지작거린다.
화룡점정을 찍는구나.
난 이제 모르겠다. 할 일도 없고. 잠이나 자야겠다.
눈을 감고 몸을 뒤로 뉘였다.
그러자 옆에서 강은영이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서유림이 눈빛으로 물었다.
강은영도 소리 내지 않고 입술로만 말했다.
‘대리님이 직접 운전하시는데 자면 어떻게 해요.’
이러다 복화술 달인 되겠네.
뭐 어때? 내가 운전하는 것도 아닌데. 내가 잠자는 꼴 보기 싫으면 알아서 깨우겠지.
물론 채희라가 옆에 있는 한 그렇게는 못 하겠지만.
관심 껐다. 그리고는 눈을 감아버렸다.
잠시 후, 뒷좌석에서 서유림의 일정하면서도 깊은 숨소리가 들려왔다. 강은영을 바늘방석 위로 올려놓는 숨소리였다.
쿠울-.
* * *
명진식품 제3창고.
숙이고! 원투! 원투!
이게 아닌가? 다시 한 번 보자.
서유림이 휴대폰을 조작해서 동영상을 다시 재생시켰다. 세계 최대 격투기단체라는 UFC에서 타격으로 역대 최고라는 선수들의 동영상이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아일랜드 출신의 코너 막그리거와 한국 선수인 최두오의 동영상이 마음에 들었다. 펀치력도 뛰어난데, 그보다 환상적인 것이 타이밍이었다.
와! 저 짧은 틈을 놓치지 않네.
최두오의 동영상이었다. 상대방이 펀치 뻗기를 기다렸다가 슬쩍 피함과 동시에 재빨리 원투스트레이트를 날렸다.
이름만 들어도 설레는 크로스 카운터.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 힘들이지 않고 때린 것 같은데 치명타를 입은 것처럼 비틀거리며 주저앉았다.
최두오가 재빨리 달려가서 펀치 몇 대를 더 꽂아 넣고 경기를 마무리했다.
서유림도 저런 경기를 하고 싶었다.
원 샷 원 킬!
빈틈에 꽂아 넣는 단 한 방의 결정타!
상상만으로도 멋진 장면이었다.
그러자면 동영상을 열심히 분석하고 그 타이밍을 배워야 할 것이다.
연습만이 살 길이다!
다시 해보자. 피하고! 원투! 원투!
그러다가 물품 주문이 들어오면 재빨리 근력운동으로 바꾸었다.
> 근력이 1 올랐습니다.
서유림의 스텟은 여전히 빠르게 오르고 있었다.
잠재력 덕분이었다. 정령계에서 스텟을 잔뜩 올려놓으니 인간계의 육체가 잠재력을 따라잡기 위해서 쑥쑥 올랐다.
근력이나 순발력, 체력만이 아니었다.
청력, 시력 할 것 없이 모든 감각도 계속해서 발달했다.
덕분에 창고 밖에서 두런두런 나누는 이야기도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엿들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때 문득 벽 뒤쪽에서 ‘서유림’이라는 이름이 들려온 것 같다.
‘누가 내 얘기 하나?’
서유림이 박스를 내려놓고 가만히 귀 기울였다.
몇몇 사람이 벽 바로 뒤에서 휴식을 취하며 잡담을 나누는 듯했다.
예상대로 서유림과 관련한 이야기였다.
“그 친구, 그렇게 열심이라며?”
“그렇더라고. 처음 현장으로 왔을 때는 저 비리비리한 몸으로 얼마나 버틸까 싶었는데, 의외로 깡다구가 좋더라고. 깜짝 놀랐어. 게다가 성실하고. 그 약골로 물품조달 펑크 한 번도 안 냈다니까. 괜찮은 친구야.”
“대단하네. 역시 사람은 겪어봐야 안다니까.”
서유림의 입술이 쭉 찢어졌다.
사실 이 회사에 오래 붙어있을 생각은 없다. 그다지 정든 사람도 없고. 적당히 일하다가 더 좋은 자리가 나면 재빨리 옮길 계획이다.
그런데도 칭찬 들으니 기분은 좋다.
잠시 휴식도 취할 겸 직원들의 대화를 좀 더 엿들었다.
대화내용은 어느새 다른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서유림도 흥미를 가질만한 내용이었다.
“소문 들었어? 조만간 유진그룹 회장님이 우리 명진을 방문하실 계획이라던데.”
“그건 금시초문인데. 유진 회장님은 일본에서 살고 계시지 않나? 한국을 방문하신다고 해도 본사도 아닌 명진식품을 왜······?”
“회장님 특기잖아. 작은 계열사 불시에 방문하기. 그러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다 긴장하게 될 테니까.”
“하여튼 별난 분이라니까. 그런데 혹시 한상민 실장이 이번에 MAN FC 인수하는 것 때문에 한국에 방문하시는 건가?”
“그런 거겠지. 하여튼 격투기 좋아하는 건 집안 내력인가 봐. 하하.”
어! 이게 무슨 말이야?
서유림으로서는 하나같이 금시초문이었다. 유진그룹 회장의 명진식품 방문도 그렇고, 한상민 실장의 MAN FC 인수도 그렇고.
이야기를 들어보니 알만한 직원들은 다 아는 소식인데 서유림만 모르고 있는 듯했다.
갑자기 소외감이 느껴졌다. 직원들과 제대로 소통하지 못하니 저런 소식도 혼자만 모르고 있는 것 아닌가?
아무튼 관심 가는 이야기였다. 유진그룹의 한상민 실장이 격투기 마니아라는 건 알고 있지만, 국내 최대 MMA 종합격투기 단체인 MAN FC를 인수한다니.
그렇다면 당연히 대회 규모가 커질 것이다. 상금 규모도 커질 것이고.
‘오호, 이거 슬쩍 구미가 당기네.’
그런데 직원들의 이어지는 이야기가 서유림의 구미를 더욱 당겼다.
“그럼 첫 대회 상금규모도 들었겠네? 모든 사람한테 출전기회를 주고 토너먼트 방식으로 치러진다던데.”
“그래? 그건 금시초문인데.”
“거기까지는 모르는구나. 나도 그냥 전해들은 거라서 확실하진 않은데, 체급별 우승상금이 무려 10억 원이래.”
“체급별로 10억 원?”
서유림도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10억 원!
갑자기 한동민과 내기로 건 액수인 3천만 원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모든 사람에게 출전기회를 준다지 않는가? 그럼 엄청나게 치열한 예선 경기를 치러야 하겠지만, 그래도 매력적인 액수였다.
이거야 말로 먹을 판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