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
우린 제법 잘 어울려 (2)
“아리아나도? 괜찮겠어?”
“네. 많이 좋아졌어요.”
하긴, 정령계 시간으로 두 달이 넘게 흘렀다. 게다가 손목에 새겨졌던 약속의 문신도 모두 사라졌다.
그건 더는 서유림의 도움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아리아나가 충분히 회복되었다는 증거였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이걸 사용하세요.”
아리아나가 침대 밑에 감추어두었던 무엇인가를 꺼내주었다. 길쭉한 막대기처럼 생겼는데, 정크의 가죽으로 쌓여있었다.
딱 봐도 뭔지 알겠다.
얼른 받아서 가죽 끝에 삐져나온 손잡이를 잡아 뽑았다.
그러자 제법 근사한 칼이 나왔다. 지난번 창날처럼 끝만 뾰족한 게 아니라 칼날까지 예리하게 갈려 있었다.
“와! 이걸 언제 만들었어?”
“깜짝 선물로 드리려고 몰래 만들었어요. 이번에는 시간을 많이 투자해서 제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쓸 만할 거예요.”
쓸 만한 정도가 아니다. 너무도 훌륭하다. 무게도 적당하고, 길이도 적당하고, 게다가 이 날카로움과 예리함까지.
“정말 고마워. 뭐로 보답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저를 위해서 싸워주시잖아요. 오히려 제가 보답해야 할 게 더 많아요. 그런데 대나무창은 안 버리세요?”
“이건 절대 버려서는 안 되지.”
서유림이 대나무창을 소중하게 움켜쥐었다. 반으로 잘린 자루를 떼어버리고 긴 자루를 다시 이어붙인 상태였다.
아리아나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왜요?”
이유는 간단하다. 상대해야 할 마물에 따라서 칼이 유리할 때도 있고, 창이 유리할 때도 있으니까.
어차피 짐도 많지 않고, 길기만 할뿐 무게는 가벼우니 이걸 가지고 다닌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큰 부담은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
“아리아나가 나를 위해서 첫 번째로 만들어준 무기잖아. 이건 평생 간직할 거야.”
아리아나가 피식 웃었다.
감동한 것 맞지? 아닌가?
하여튼 여자는 어렵다니까. 도대체 속마음을 읽을 수가 없어.
“그럼 출발할까?”
“네.”
함께 동굴을 나섰다.
근데 아리아나. 그건 아니지. 이럴 땐 레이디 퍼스트가 아니라고.
“내가 앞에 설게.”
“괜찮겠어요?”
당연하지. 나 남자야!
“위험하다 싶으면 아리아나가 뒤에서 도와줘.”
“그게 나을 수도 있겠네요. 저는 특기가 마법이니까.”
자리를 바꿔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제야 모양이 좀 나오는 것 같다. 아무리 둘 밖에 없는 곳이라지만, 아리아나 엉덩이를 보면서 달리는 건 좀 그렇잖아.
게다가 옷이 웬만큼 야해야 말이지. 계속 뒤따라 달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엉뚱한 상상을 해버릴 것 같단 말이야.
방향은 당연히 요정의 샘물.
서유림은 새로운 무기인 칼을 휘두르며 마음껏 사냥했다. 고블린이건 정크건 일격을 넘기지 않고 사냥했다.
덕분에 이동속도가 무척 빨랐다.
동굴을 나와서 겨우 한 시간쯤 달린 것 같은데 벌써 요정의 샘물에 도착했다.
요정의 샘물에 입술을 직접 대고 목을 축였다.
“아 시원해. 근데 이 너머까지도 가보셨나요?”
“한 20km정도까지? 하지만 그 이상은 안 가봤어.”
“그럼 오늘은 더 멀리 가 봐요. 주변을 확인해봐야겠어요.”
“그러지.”
동굴과 반대방향을 향해서 다시 달리기 시작했다.
사람은 확실히 적응의 동물이다.
그것은 낯선 환경에 쉽게 적응한다는 의미도 되겠지만, 한편으로는 적응된 곳을 선호한다는 의미도 된다.
즉, 적응되지 않은 곳을 가면 그때부터 긴장과 스트레스가 느껴진다는 뜻이지.
서유림도 예외는 아니었다. 20km가량을 더 달리고 드디어 낯선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갑자기 긴장감이 느껴졌다.
마물의 종류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는데도 그랬다.
서유림의 움직임이 확연하게 느려졌다. 어디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신경을 날카롭게 세우고 주변을 살피며 걸었다.
그러다가 뭔가를 발견하고는 우뚝 멈추었다.
“앗! 저것들은 뭐지?”
“그라운드 오크에요.”
저게 오크라고?
키는 서유림의 가슴정도밖에 안 될 것 같다. 하지만 온몸이 울퉁불퉁 근육질이었다. 손에는 도끼며 망치며 몽둥이 같은 무기도 들고 있었다.
게다가 그 수가 제법 많았다. 대충 세어보니 일곱 마리나 되었다.
“강한 놈들이야?”
“지금 유림씨 능력으로는 한 마리 사냥하는 것도 불가능할 거예요.”
강해 보이긴 했다. 그런데 1:1이 불가능할 정도로 강한 놈들이라니.
아리아나가 서유림의 능력을 과소평가하는 것은 아닐 터. 싸워서 이기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도망치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라운드 오크들도 서유림을 발견하고는 사납게 달려오고 있었다. 속도가 무척 빨랐다.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요정의 망토로 숨을까?”
그런데 아리아나가 고개를 흔든다.
“아뇨. 우리 둘이 힘을 합하면 사냥할 수 있을 거예요. 제가 결속마법으로 묶어놓을 테니까 그 틈에 빨리 사냥하세요.”
결속마법?
궁금했지만, 한가하게 질문이나 주고받을 때가 아니었다. 그라운드 오크는 이미 지척까지 다가왔고, 아리아나 역시 결속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건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다. 팀으로 하는 싸움이다.
누군가가 싸움을 주도하면 다른 사람이 호흡을 맞춰줘야 한다. 서로 따로 노는 것은 자살행위다.
아리아나는 이미 싸움을 시작했다.
그렇다면 서유림이 아리아나에게 맞춰줘야 하겠지.
‘잘하는 짓인가 모르겠군!’
두려웠지만 어금니를 깨물었다. 아리아나가 정성을 들여서 만들어준 칼을 뽑아들고 그라운드 오크를 노려보았다.
그런데 사납게 달려들던 그라운드 오크들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추었다.
완전히 멈춘 것은 아니다. 조금씩은 움직인다. 하지만 마치 수십 배로 느려진 슬로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굼뜨기가 짝이 없었다.
저게 결속마법이로구나.
그럼 지금 공격하면 되는 건가?
슬쩍 아리아나를 바라보았다.
아리아나는 온통 그라운드 오크들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손은 마법진을 형성하듯 모양을 만들고 있었고, 입술도 주문을 외듯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런 아리아나에게 지시를 기대한다는 건 바보 같은 짓이겠지.
이럴 때에는 눈치껏 움직여야 한다. 그것도 늦게 전에.
서유림이 그라운드 오크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라운드 오크가 두 눈을 부릅뜨고 서유림을 노려보았다. 그 표정이 마치 ‘감히 내게 덤비느냐?’ 하며 협박하고 있는 듯했다.
두려웠다. 그라운드 오크의 쇠망치가 그대로 머리통으로 날라들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이젠 물러설 수도 없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였다.
‘젠장, 나 지금 잘 하고 있는 거겠지?’
서유림이 그라운드 오크의 목을 향해 칼을 힘껏 휘둘렀다. 온 힘을 다해서.
그라운드 오크는 꼼짝도 못했다. 찔끔찔끔 움직이긴 했지만, 너무 느려서 움직이는 것 같지도 않았다.
결과는 빤했다. 서유림의 칼이 시원하게 그어졌다. 비록 그라운드 오크의 목을 완전히 잘라내지는 못했지만, 목젖을 깊이 베는 데는 성공했다.
그라운드 오크가 붉은 피를 분수처럼 흐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됐다 싶었다.
하지만 서둘러야 한다. 어쩌면 아리아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속으로 ‘빨리, 빨리’를 외치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유림은 놈들의 목젖만 노리며 베고 또 베었다.
일곱 마리가 이렇게 많았나? 최대한 서두른다고 서두르는데도 시간이 제법 걸렸다.
기어이 마지막 놈의 목젖을 베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는 얼른 고개를 돌려서 아리아나의 상태를 확인했다.
아리아나가 팔을 떨어뜨리며 막혔던 숨을 터뜨렸다. 터져 나오는 숨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하아. 하아.”
“괜찮아?”
“네, 괜찮아요. 몸이 생각보다 덜 회복됐나 봐요. 겨우 이 정도에 마력이 바닥날 줄은 몰랐어요. 시간을 조금만 더 끌었으면 위험할 뻔했어요.”
역시 서두르길 잘했다. 이래서 팀은 호흡이 중요한 거라니까.
그런데 아리아나가 무척 지쳐 보인다.
반면 서유림은 쌩쌩했다. 그라운드 오크 7마리를 사냥하면서 무려 3레벨이나 올랐기 때문이다.
그라운드 오크가 그만큼 강력한 마물이라는 뜻이겠지.
팀원으로서 그냥 있을 수 없다.
그라운드 오크의 마나스톤을 빼내서 아리아나에게 내밀었다.
“감사해요.”
마나스톤은 밖으로 빠져나오는 순간부터 마력이 약해지기 때문에 오래 보관하고 사용할 수가 없다.
길어야 사나흘?
마나스톤이야 마물을 사냥하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굳이 아낄 필요 없이 그 자리에서 모조리 소모하는 게 낫다.
하지만 서유림은 마나스톤을 활용할 수가 없다. 마나스톤의 마력을 흡수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마족과 요정 둘뿐이라고 했다.
“이제 됐어요. 조금만 쉬었다 가요.”
그 자리에 앉아서 요정의 샘물을 나누어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서유림은 궁금한 게 많았다. 새로우면서도 강력한 마물을 접하고 나니 더욱 그랬다.
“그라운드 오크는 강한 마물에 속하나?”
“정령계에서 가장 흔한 마물이 오크에요. 그라운드 오크는 오크의 동생쯤으로 생각하면 돼요.”
그럼 비교적 약한 마물에 속한다는 편이네.
강한 놈들은 대체 얼마나 강한 걸까?
그런데 그때 저쪽에서 갑자기 두두두- 팟! 하는 소리가 들렸다. 거대한 말 한 마리가 이쪽을 향해 맹렬히 다가오다가 힘껏 도약한 느낌이랄까?
그런데 무슨 소리가 저렇게 커?
뭔가 싶어서 고개를 돌리려는 순간 아리아나의 외침이 들렸다.
“피해!”
그뿐이 아니었다. 서유림을 냅다 발바닥으로 밀어냈다.
원래 팀이란 척! 하면 착! 하고 알아들어야 한다. 순간적으로 아리아나의 의도를 읽고 그대로 몸을 굴리며 옆으로 피했다.
아리아나 역시 서유림을 밀어낸 반동으로 몸을 굴렸다.
이어서 거대한 물체가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슈아악-
그리고는 서유림과 아리아나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다시 강한 충격이 일어났다.
쿵!
코끼리를 닮은 마물이었다. 그런데 상체에 비해 하체가 비정상적일 정도로 잘 발달한 놈이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이건 마른하늘에 마물 벼락이었다. 대체 얼마나 멀리 뛸 수 있는 놈이기에 단번에 이렇게 엄청난 도약을 해왔던 것일까?
그런데 더욱 이상한 것은 하체였다. 갑자기 수렁에 빠지듯 땅속으로 쑥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놈이 빠져나오기 위해서 버둥거렸지만, 땅이 놓아주지 않았다.
“빨리 사냥하세요.”
아리아나가 저렇게 만든 모양이다.
재빨리 칼을 빼서 놈의 목을 그었다.
엄청나게 발달한 하체에 비해서 상체는 덜 발달했기 때문에 놈을 죽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리아나가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어요. 스톤풋까지 있는 것을 보니 방심하면 절대 안 되겠어요.”
“그런데 땅은 아리아나가 저렇게 만든 거야?”
“땅의 정령을 이용했어요. 스톤풋은 다리만 제압하면 힘을 쓰지 못하기 때문에 저게 가장 좋은 방법이에요.”
아리아나가 옆에 있으니 든든하다. 마법도 잘 다뤄, 정령도 잘 다뤄, 게다가 지식까지 저렇게 풍부하니 뭐가 걱정이야?
‘나만 잘하면 되겠군!’
“그런데 나만 마물을 사냥해서 어쩌지? 아리아나도 마물을 사냥해야 레벨도 올리고 체력도 회복할 텐데.”
“전 신경 쓰지 마세요. 마물을 사냥한다고 해서 유림씨처럼 빠르게 성장하지는 못하니까. 전 정령신의 후보잖아요.”
아 그랬지!
이런 마물 수백 마리를 사냥한다고 해도 잠재력의 크기는 크게 변하지 않을 것이다. 발휘할 수 있는 힘의 변화도 거의 없을 테고.
그렇다면 미안해도 어쩔 수 없지. 내가 혼자 독식하는 수밖에.
“그런데 이 부근에 스톤풋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조심해야겠어요.”
“아까처럼 땅의 정령을 이용하면 되는 것 아닌가? 그렇게 하니까 사냥이 아주 쉽던데.”
“한 마리뿐이었으니까요. 서너 마리만 되었어도 감당하기 힘들었을 거예요.”
“그땐 어쩔 수 없이 요정망토를 사용해야 하겠군.”
“그 수밖엔 없겠죠. 하지만 워낙에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놈들이라서 피하기도 쉽지 않아요. 조심해야 하겠어요.”
생각해보니 그렇다. 땅의 울림이 한번 느껴지자마자 놈의 공격이 이루어졌으니까. 대체 도약력이 얼마나 뛰어난 건지.
“차라리 다른 곳으로 갈까? 좀 안전한 방향으로.”
“아뇨.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어요. 스톤풋은 다른 마물이 탈것으로 활용하거든요. 인간들이 말을 타는 것처럼요.”
그럼 스톤풋보다 더 강력한 마물이라는 뜻 아닌가?
“그게 왜 기회라는 거지?”
“너무 강한 마물이라면 숨어야겠지만, 적당히 강한 놈들이라면 사냥해서 마력의 서를 구할 수도 있을 거예요.”
서유림의 눈이 커졌다.
“아! 마력의 서!”
기억난다.
레벨업과 상관없이 마력을 쭉쭉 올릴 수 있는 방법. 그것이 바로 바로 마력의 서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