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우린 제법 잘 어울려 (1)
남자들이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여자들끼리 알아서 교통정리 해버린다.
채희라가 먼저 서유림의 팔짱을 끼며 달라붙는다.
“난 유림 오빠랑 한잔 더 할게. 가자 오빠. 맥주는 내가 살게.”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서유림을 질질 끌고 간다.
흘끔 뒤돌아보니 나머지도 제각각 짝을 지어서 흩어지고 있다. 이후에 갈 곳은 빤하겠지.
“오빠, 우리 저기 들어가서 한잔 더 하자. 난 조용한 게 좋더라.”
채희라가 가리킨 곳은 모텔이었다.
여자가 너무 적극적인 것 아냐? 좀 숨기고 빼고 내숭도 떨어줘야 더 매력이 사는 법인데.
물론 개인 취향이겠지만.
그리고 채희라 정도 미모면 굳이 그런 매력까지 갖출 필요도 없겠지만.
사실 조금 갈등이 된다. 이런 식으로 오늘 처음 만난 여자와 모텔에 들어가 본 경험이 전혀 없다.
TV를 통해서, 혹은 소위 잘나간다는 친구들을 통해서 이야기는 들어봤다. 하지만 움츠리고만 살아온 서유림에게는 그저 다른 세상의 일일 뿐이었다.
마음속으로는 ‘하고 싶다.’는 말을 수백 번도 더 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래도 되는 건가 하는 망설임도 있다. 처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채희라는 눈치가 빠른 여자였다. 내가 조금 망설이는 듯하자 그 이유를 단번에 알아챘다.
얼른 다가와서 두 팔로 목을 끌어안으며 안긴다.
“오빠, 부탁이 하나 있어.”
“뭔데?”
“책임지라는 말 하지 않을 테니까 오늘 하루만 나 애인처럼 대해줘. 사랑한다는 말도 좀 해주고. 그래줄 수 있어? 어차피 난 독신주의자니까 부담가질 것 없어.”
채희라 덕분에 마음이 모텔 쪽으로 많이 움직였다.
하지만 아직도 조금은 망설여진다.
아! 나 병신인가 봐! 여기서 왜 망설여? 네가 마누라가 있냐? 애인이 있냐? 아니면 힘이 부족하냐?
“오늘 하루만. 내가 언제 오빠 같은 남자한테 사랑 받아보겠어? 나 요즘 너무 외로워.”
채희라가 결심을 재촉하듯 진하게 키스해주었다.
이렇게까지 하는데 어떻게 거절해? 채희라 덕분에 드디어 결심이 섰다.
좋다! 가자! 누이 좋고 매부 좋으면 되는 거지 뭐.
“맥주는 내가 살게.”
편의점에 들렀다가 함께 모텔로 향했다.
그런데 맥주 캔 딸 틈도 없었다. 모텔로 들어오자마자 채희라가 굶주린 암사자처럼 달려들었다.
역시 여자는 외모로 판단하면 안 되는 부류다. 겉모습은 남자라고는 요만큼도 모를 것 같은 청순미녀인데 하는 행동은······ 와! 어지간히 급했나보다.
그래, 사실 나도 많이 참았다고.
서로서로 바삐 손을 놀렸다. 1초가 아깝다는 듯 서둘러서 침대 위로 몸을 날렸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은 참으로 다양하다. 아침에 출근했다가 저녁에 퇴근하는 사람도 있고, 저녁에 출근했다가 아침에 퇴근하는 사람도 있다.
한 달 죽어라고 일해도 200만 원도 못 버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에 2천만 원씩 쉽게 버는 사람도 있다.
세상에는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삶이 너무도 많다.
그런데 섹스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자세가 너무도 많았다.
이런 자세도 있었다니. 저런 자세도 가능하다니. 그야말로 섹스의 신세계를 체험하는 느낌이었다.
도대체 이 여자의 정체는 무엇일까? 이건 기기묘묘한 자세들은 대체 어디에서 배운 것들일까? 어떻게 하면 남자가 좋아하고 흥분하는지를 훤히 꿰뚫고 있다.
어쨌건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특히 정령계에서 아리아나 때문에 참고 참았던 욕정이 눈 녹듯 가라앉는 느낌이다.
그렇게 30분가량을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함께 침대에 쓰러졌다.
사실 마음만 먹으면 30분이 아니라 1시간도 거뜬하다. 하지만 시간이 중요한 게 아니거든.
너무 길면 오히려 지루하고 힘만 든다.
진짜 중요한 건 궁합이지. 그 궁합을 맞춰주는 게 능력이고.
사실 내가 이런 말 할 처지는 아니다. 애인을 사귀어본 적이 없진 않지만, 그래도 여자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나 마찬가지거든.
힘 좀 생겼다고 주제도 모르고 자신감만 충만해진 듯하다.
진짜 고수는 바로 옆에 있는데.
채희라가 숨을 할딱이면서도 서유림의 가슴팍 위에서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오빠 진짜 멋지다. 이렇게 행복했던 건 처음이야. 고마워 오빠. 진심이야.”
“내가 고맙지.”
나도 진심이다. 이렇게 회포를 풀고 나니 십 년 묵은 체증이 쑥 내려간 것처럼 몸도 마음도 가뿐하다.
한편으로는 채희라에 대한 궁금증이 커진다. 그렇게 안 봤는데 그토록 다양한 기술을 가지고 있는 줄 전혀 몰랐다. 적어도 섹스에 대해서만큼은 박사급이다.
대체 어디에서 배운 기술들이야?
그 물음이 목구멍까지 튀어 올라왔지만 간신히 삼켰다.
그런데 채희라가 알아서 힌트를 던져준다.
“오빠 돈벌이 시원찮으면 차라리 호스트바에나 나가. 오빠 정도면 한 달이면 외제차 타고 다닐 수 있어.”
너 혹시······?
서유림이 눈빛으로 물었다.
채희라는 숨기지 않았다.
“맞아. 나 텐프로야. 아까 그 깡패들도 사실은 서울에서 손님으로 한번 만났던 애들이었어.”
사실 조금 예상은 했었다. 노는 모습이 평범하지가 않았거든. 남자 다루는 솜씨는 더더욱 그렇고.
“그러고 보니 경력이 벌써 8년이나 됐네.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이쪽으로 진출했거든.”
경력 8년? 그럼 나이가 28살이라는 거야?
와! 그렇게 안 봤는데! 동안도 이런 동안이 없네!
“어때? 조만간 내 이름으로 가게 하나 낼 건데. 함께 일 해볼래? 낭비만 하지 않으면 한 달에 3천만 원은 쉽게 모을 수 있어. 운 좋으면 힘 좋은 스폰서 잡아서 떵떵거리며 살 수도 있고.”
거짓말 같지가 않았다. 텐프로들이나 호스트바의 남자 종업원들이 돈을 어마어마하게 많이 번다는 이야기는 귀동냥으로 들었으니까.
단지 그 이상으로 펑펑 써서 돈을 모으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마음만 먹으면 1년에 수억 원 모으는 건 일도 아니라고.
그런데 가게를 낸다는 것을 보니 채희라는 돈을 낭비하지 않고 제법 모은 모양이다. 아니면 빵빵한 스폰서를 잡았거나.
뭐,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어쨌건 그쪽으로는 관심이 가지 않는다. 이런 어마어마한 능력을 얻었는데, 그런 식으로 낭비해서야 되겠는가?
좀 더 건설적이고 참신한 곳에 써야지.
“먹고살기 힘들어지면 연락할게. 하지만 지금 삶도 나쁘지 않다. 근데 넌 어쩌다가 텐프로가 된 거냐? 사연이라도 있냐?”
“세상에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
꼭 인생 다 살아본 할머니처럼 이야기하네. 아직 사회경험도 제대로 못 해본 풋내기가.
아니지. 텐프로도 사회경험은 사회경험이지.
오히려 서유림보다 더 큰 사회경험을 해본 것일 수도 있겠다.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을 상대하는 일이니까.
그것도 술 취한 진상고객들을.
그것도 오로지 입담과 몸으로.
“아빠는 일찍 돌아가시고, 엄마는 병원에 입원하시고. 그러다 보니 고3때부터 졸지에 소녀가장이 됐어. 병원비는 물론이고 생활비까지 내가 혼자 다 마련해야 했지.”
몸이 열 개여도 모자랄 정도로 많은 아르바이트를 뛰었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해도 한 달에 벌 수 있는 돈은 200만 원이 채 못 되었다. 어머니 병원비는커녕 생활비로 쓰기에도 부족한 돈이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텐프로가 되었다.
“돈은 제법 많이 벌었어. 남자들이 날 좋아하더라고.”
그랬겠지. 그 정도 외모면 명진식품 퀸카라는 강은영이나 권진아 정도는 오징어가 아니라 꼴뚜기로도 만들 수 있을 테니까.
“그런데 엄마는 결국 돌아가시고······.”
채희라가 거기까지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더는 이야기하기 싫어진 모양이다.
나도 더는 듣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까지 괜히 슬퍼지려고 한다.
“이제 오빠 얘기 해봐.”
“난 명진식품이라는 곳에 다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나같이 시시콜콜한 이야기였다.
물론 요정이니 정령이니 하는 이야기는 쏙 뺐다. 그저 콤플렉스 해결을 위해서 운동을 열심히 했다는 식으로 포장했다.
“와, 한동민 완전히 개새끼네.”
채희라는 청초한 외모와 달리 입이 제법 걸었다.
하긴, 텐프로 생활을 하자면 자연스럽게 억센 여자들과 부대낄 것이고, 살아남기 위해서는 함께 억세져야 했겠지.
“그랬구나. 회사생활도 쉬운 게 아니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겠냐?”
서유림은 채희라가 조금 전에 했던 말을 살짝 바꿔서 들려주었다.
채희라도 그걸 생각했는지 피식 웃었다.
“그건 그래.”
그러더니 다시 서유림의 몸 위로 올라왔다.
“근데 오빠. 우리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지 않아?”
“글쎄. 다른 건 몰라도 속궁합은 잘 맞는 것 같다.”
“그치그치? 나도 그렇게 생각했는데.”
그런데 뭐? 왜 그렇게 몸을 살랑살랑 흔들어대는데?
에라, 모르겠다. 나도 부족했거든. 오늘 한번 죽어보자!
다시 격정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몸을 늘어뜨렸고, 둘이 호흡을 맞추듯 함께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 *
“오셨어요?”
아리아나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정령계 입장을 알려주었다.
그런데 입장부터 너무 자극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것 아냐? 내가 누누이 말했잖아. 옷 그렇게 입고 스트레칭 하는 것 아니라고.
특히 그 가슴 좀 어떻게 할 수 없겠어? 저 봐, 저 봐. 금방이라도 비집고 나올 것 같잖아. 아슬아슬해 죽겠네!
앗! 뭔가 보인 것 같다!
얼른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잔상이 지워지지가 않는다. 오히려 자꾸 생각나네. 웬만큼 자극적이어야 말이지.
어떻게 저런 가는 몸매에 그렇게 큰······ 아냐, 아냐. 생각하지 말자. 그럴수록 나만 힘들어진다.
조금 전에 채희라와 실컷 회포를 풀었는데, 또 몸이 흥분되려고 한다. 인간계와 정령계의 몸이 달라서 그런 건가?
그래도 예전만큼 몸이 확 달아오르지는 않는다. 이 정도면 참아줄만 해.
어쨌건 이럴 땐 빨리 분위기를 바꿔줘야 한다. 헛되이 몸이 달아오르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인데.
그렇지 않아도 정령계로 들어오자마자 확인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과연 정령소환력이 올랐을까? 올랐다면 얼마나 올랐을까?
긴장된 마음으로 망막에 새겨진 마법 정보를 확인했다.
[마법]
체력흡수 : 25
정령소환 : 9%
“와! 5%나 올랐다!”
서유림이 깜짝 놀라서 소리쳤다.
“뭐가 올랐는데요?”
“정령소환력! 인간계에서 열흘이 넘게 노력했는데도 3%밖에 안 올랐는데, 어제 하루만에 5%나 올랐어.”
“어머! 축하드려요. 어떤 좋은 일을 하셨기에 그렇게나 많이 올랐어요?”
“별 것 아닌데. 그냥 불량배 해치우고 아가씨 몇 명 구해줬어.”
서유림이 상황을 간단하게 이야기해주었다.
아리아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겨우 그 정도 일로 5%씩이나 오를 리는 없는데. 그것 말고 다른 일은 없었어요?”
다른 일? 전혀 없었는데.
운전으로 한동민과 강은영 골탕 먹인 게 좋은 일은 아닐 테고, 최영만과의 스파링도 마찬가지고, 친구들과 오랜만에 만나서 술 한 잔 한 것도 정령소환력에 영향을 미칠 일은 아니고.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는 게 없······!
아, 하나 있다!
문득 채희라가 들려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이렇게 행복했던 건 처음이야. 고마워 오빠. 진심이야.]
근데 이걸 아리아나에게 이야기해줘도 될까?
에이, 무슨 상관이야? 아리아나가 질투할 리도 없고.
“사실은······.”
서유림이 채희라와의 이야기도 들려주었다.
예상대로 아리아나는 무척 담담했다. ‘섹스’라는 단어를 ‘악수’ 정도로 가볍게 들어 넘기는 것 같았다.
“그 아가씨가 진정으로 행복을 느끼고 고마워했다면 정령소환력에 영향을 줄 수 있을 거예요. 하지만 그래도 너무 많이 올랐는데요?”
와! 유레카!
그런 일로도 정령소환력이 오를 수 있다니.
그렇다면 채희라가 매번 그런 식으로 잠자리를 부탁해줬으면 좋겠다.
어쨌건 그것도 주된 이유는 아닌 것 같다고?
그럼 다른 게 또 뭐가 있었을까?
혹시 이학주? 아닌데. 그놈이 나한테 고마움을 느낄 게 뭐가 있어.
혹시나 싶어서 이학주와의 일도 이야기해주었다.
아리아나도 고개를 갸웃했다.
“저도 확신을 못하겠어요. 제가 책정하는 게 아니라서.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은 있을 것 같아요.”
그렇구나! 뭐 여러 가지 일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거겠지.
답도 안 나오는 걸로 고민하는 건 체질에 안 맞다. 코앞에 닥친 일에나 집중하자.
아리아나도 스트레칭을 마치고 허공을 향해 손을 오므리고 있었다. 마치 수돗물이라도 받는 것처럼.
그러자 손 안에 물이 고였다.
정령의 힘이 아니었다. ‘워터 크리에이션’이라는 마법이었다. 저렇게 아무 때나 물을 만들어서 세수도 하고 목욕도 할 수 있다.
어디 그뿐인가? 아이스, 파이어, 라이트, 윈드 등등. 아리아나가 구사할 수 있는 마법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로 많았다.
아리아나가 세수를 마치고 바람의 정령을 불러서 물기를 말렸다.
마법과 정령을 자유자재로 활용했다.
보면 볼수록 부럽다.
나도 저렇게 마법과 정령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헛된 생각이다. 레벨 100이 훨씬 넘었는데도 마력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었다.
겨우 25.
레벨이 130 가까이 오를 때까지 마력은 겨우 5 오른 게 전부다. 오히려 정령소환력 오르는 것보다도 더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레벨업으로 마력 올리겠다는 생각은 아예 접었다.
그나마 흡수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게 어디야?
“사냥 다녀올게. 뭐 필요한 것 있어?”
“오늘부터는 저도 함께 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