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39화 (39/196)

# 39

세월은 사람을 변하게 하더라. (3)

“응? 아, 그, 그래.”

얼른 넓은 자리로 옮겼다. 그리고는 마치 소개팅이라도 하듯 마주보고 앉았다.

시작은 조금 어색했다. 자칭 여자 박사라는 이학주도 어쩐 일인지 오늘은 영 분위기를 이끌지 못한다.

아가씨들의 미모가 그만큼 부담스러운 거겠지.

하지만 어색함은 잠시였다. 뜻밖에도 여자들이 분위기 메이커들이었다. 간단하게 통성명을 마치자마자 분위기를 주도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말 다들 친구세요?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것 같아요.”

당연히 그러겠지. 서유림이 심하게 어려보이니까. 게다가 두 친구도 실제 나이보다 조금 겉늙어 보였다. 얼핏 보면 열 살 가까이 차이나 보일 수도 있다.

“몇 살인지 물어봐도 돼요?”

“딱 서른 살입니다. 하하.”

이학주가 얼른 나서서 대답했다.

그러자 아가씨들이 서유림을 바라보며 깜짝 놀라는 표정을 했다.

“어머! 나이가 그렇게나 많았어요? 기껏해야 스물두세 살 쯤 될 거로 생각했는데. 너무 어려 보인다.”

“아가씨들은 몇 살이세요?”

“오빠들보다는 어려요. 호호호.”

그래. 나이가 뭐가 중요해? 호구조사 나온 것도 아닌데.

“야, 근데 너 어디에서 싸우고 왔냐?”

친구들이 비로소 서유림의 얼굴에 난 상처를 발견한 모양이다.

“별 것 아냐.”

아가씨들도 그 일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어주었다. 친구들도 그러려니 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

“그런데 해변에서는 대체 얼마나 뛰신 거예요? 저희가 본 것만 두 시간은 넘었는데.”

“글쎄요. 시간을 재고 뛰는 건 아니니까요. 그냥 자투리시간 활용하는 차원에서 뛴 겁니다.”

“와! 평소에는 얼마나 많이 뛰시기에. 그런데 그렇게 뛰고도 안 피곤해요? 속도도 엄청 빠르시던데.”

“만날 하는 건데요 뭐. 오히려 안 뛰면 몸이 찌뿌드드해요.”

“와! 대단하다! 허벅지 한번 만져 봐도 돼요?”

안 될게 뭐가 있어? 얼마든지 만져보라는 듯 다리를 내밀어주었다.

아가씨들도 거침이 없었다.

“와! 돌덩이야, 돌덩이!”

“멋지다!”

분위기는 자연스럽게 서유림에게 집중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까 깡패들 물리치고 구해준 것이 무척이나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을 테니까.

그러자 이학주가 자신에게도 관심 좀 달라는 듯 얼른 끼어들었다.

“유림이 진짜 몸 좋아졌네. 나랑 한번 비교해보자. 누구 허벅지가 더 좋은지 아가씨들이 비교해주세요.”

유도로 단련된 몸이다 그거지?

“어디 보자. 와! 이 오빠 허벅지도 장난 아니다.”

“둘 다 말벅지네. 그래도 유림오빠 허벅지가 조금 나은 것 같다. 완전 돌덩이잖아.”

이학주의 눈이 커졌다. 마치 ‘그럴 리가.’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나도 좀 만져보자.”

이학주가 직접 서유림의 허벅지를 만져 보았다. 그리고는 입을 떡 벌렸다. 아가씨들 말대로 돌덩이처럼 단단했다.

게다가 얼굴은 또 왜 저래? 5년 전에 보았을 때보다 더 어려진 것 같다. 피부도 뽀송뽀송해지고.

“너 못 본 사이에 완전히 슈퍼맨이 돼서 돌아왔구나!”

“운동 많이 했다니까.”

“잘했어, 잘했어. 그럼 이제 놀아볼까?”

이학주가 그때부터 화려한 입담을 발휘하며 분위기를 이끌기 시작했다.

시작은 당연히 술이다. 안주로 꼼장어 소금구이도 나왔으니 이제부터 달리기만 하면 된다.

“첫잔은 원샷입니다. 황홀한 밤을 위하여!”

구호가 너무 자극적인 것 아냐? 아가씨들이 부담스러워하면 어쩌려고?

그런데 괜한 걱정이다. 아가씨들이 더 좋아한다. 왠지 오늘 뭔가 역사를 이루려고 작심한 사람들 같다.

“위하여!”

술이 약하다고 빼는 사람은 없다. 다들 단숨에 잔을 비워버렸다.

“에이, 역시 맥주는 싱거워. 차라리 쏘맥으로 해, 오빠!”

아가씨들이 남자들보다 더 화끈하다. 분위기가 시원시원하니 좋다.

“근데 유림아. 폭탄주 괜찮겠냐? 넌 그냥 맥주 줄까?”

아! 맞다! 5년 전 동창회에서 내가 술 조금 마시고 고주망태가 되었었지? 이학주가 그때 기억을 간직하고 있는 모양이다.

짜식, 나 또 인사불성 될까봐 마음 써주는 거야? 아니면 그거 핑계대로 은근슬쩍 굴욕 주는 거야?

어쨌건 그때의 내가 아니다.

이럴 때 호기 좀 부려볼까?

“쏘맥이 무슨 폭탄주냐? 일단 돌려봐. 아가씨들! 마시기 벅차면 흑기사 불러주세요.”

“와! 멋져요, 오빠!”

아가씨들은 놀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 같았다. 이학주가 분위기를 이끌자 장작불에 기름 붓듯 분위기를 더욱 띄웠다.

“마시자!”

“죽어보자!”

병뚜껑 돌리기 같은 게임도 시작했다. 걸리면 무조건 폭탄주 원샷이다.

“마~셔라! 마셔라 마~셔라!”

“안 마시면 쳐들어간다. 쿵짜라작작.”

그런데 무슨 여자들이 저렇게 술이 세?

게임에 남자만 걸리라는 법 있나? 병뚜껑에 눈 달린 것도 아닌데 남자여자 구별이 어디 있어?

남자들이 돌아가면서 여러 차례 흑기사를 해주었지만, 오늘따라 병뚜껑이 자꾸만 여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다 보니 남자나 여자나 마신 양에는 큰 차이가 없다. 적어도 개인당 열 잔은 넘게 마신 것 같다.

그런데도 아직 끄떡도 없다. 분위기만 뜨겁게 더욱 달구어졌다.

오히려 이학주와 한영훈이 슬슬 흐트러지기 시작한다.

특히 이학주가 제법 취한 모습을 보였다. 서유림에게 어깨동무 하고는 옛날 추억을 늘어놓는다.

“이제 와서 고백인데, 사실 내가 옛날에 이 새끼 많이 괴롭혔다.”

“어머, 왜에?”

“이 새끼 인물은 옛날부터 좋았거든. 키도 크고. 근데 새끼가 너무 비리비리한 거야. 몸만 키우면 완전 킹카인데. 운동 좀 하라고 그렇게 얘기해도 말을 들어야 말이지.”

그랬었나? 그러고 보니 이학주에게 그런 말을 유독 많이 들었던 것 같다. 왜 그렇게 비리비리하냐고. 운동 좀 하라고.

그런데 딱히 괴롭힘 당한 기억은 없는데. 단지 말을 좀 싸가지 없게 해서 기분이 나빴을 뿐이다.

“근데 이렇게 몸 좋아진 것 보니까 내가 오늘 기분이 너무 좋다. 오늘 내가 다 쏠 테니까 마음껏 마시고 놀아.”

“와, 오빠 짱!”

“잘 먹을게요, 오빠~~~앙!”

이놈이 원래 이런 놈이었나? 갑자기 이학주가 달리 보이려고 한다.

어쨌건 덕분에 어색함은 완전히 사라졌다. 이제는 웬만한 스킨십도 자연스럽다.

심지어 벌칙 핑계로 입술에서 입술로 안주 먹여주기도 한다.

이런 내가 걸렸네. 고맙게시리.

옆에 앉은 채희라가 어서 안주 먹여달라는 듯 아기 새처럼 나를 바라본다.

나야 좋지. 세 아가씨 중에서 특히 돋보이는 미인이 바로 채희라거든. 이학주가 저렇게 안절부절 못하는 이유도 채희라와 짝이 되고 싶어서고.

그래도 많이 개과천선한 듯하다. 예전 같았으면 벌써 나를 깔아뭉개려고 별 수작을 다 부렸을 텐데 오늘은 어째 얌전하다.

“뭐해? 빨리 먹여줘, 오빠. 우우~.”

포도를 받아먹으려면 입을 아! 하고 벌려야지. 그렇게 오므린 채로 내밀면 어떻게 먹여주라는 거야?

그래도 일단 해볼까? 받아먹을 자신이 있으니 저러는 거겠지.

포도를 물어다가 채희라의 입에 넣어주었다.

어! 야야, 포도만 먹어야지. 그건 내 입술이라고. 어어, 막 물어뜯으려고 그러네. 도망가지 못하도록 목까지 끌어안고.

“포도맛 좋오~타! 까르르.”

어라! 이젠 대놓고 몸을 더듬네.

“오빠 가슴 진짜 넓다. 와! 복근 딴딴한 것 좀 봐.”

그러자 이학주가 다시 끼어든다.

“그런데 몸이 커지면 그것도 커지냐? 너 5년 전에는 딱 박카스 병이었잖아.”

저놈이 어떻게 알았지? 아! 오년 전 동창회 때 찜질방도 함께 갔었구나.

그런데 이런 분위기에서는 그런 건 서로 묻어줘야 하는 것 아니냐?

술이 취해서 자제력을 잃은 건가? 아니면 그냥 농담인가? 그것도 아니면 옛날 버릇이 다시 나오려는 건가?

덕분에 아가씨들은 재미있다며 까르르 까르르 웃는다.

“어머! 박카스 병이래. 호호호.”

“너무 재밌다. 오빠꺼 정말 박카스 병이야? 호호호.”

물론 그랬었지.

하지만 과거는 과거일 뿐이라니까.

아리안 덕분에 커진 것이 어깨나 가슴, 팔뚝만이 아니다. 크고 굵어져야 좋은 것은 하나같이 다 크고 굵어졌고, 단단해야 좋은 것은 하나같이 모두 다 돌덩이처럼 단단해졌다.

그거라고 예외이겠는가? 오히려 남자의 상징인데. 더하면 더하지 덜하지는 않았다.

아직 제대로 써먹어본 적은 없지만, 일단 한번 사용하면 핵잠수함 이상의 능력을 발휘할 자신이 있단다.

서유림이 활짝 웃었다.

“하하, 이거 보여줄 수도 없고.”

그러자 이학주가 건수를 물었다는 듯 얼른 일어섰다.

“우리 노래방으로 자리 옮길까? 가서 서유림이 팬티 한 번 벗겨보자. 찬성하는 사람.”

“저요!”

“저요!”

와! 이 여자들 봐!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손을 번쩍번쩍 드네.

그중에서도 특히 채희라가 가장 적극적이다.

“얼른 옮기자, 오빠! 여긴 보는 눈이 많아서 제대로 놀지도 못하겠어.”

이 정도면 제대로 노는 거지. 얼마나 더 제대로 놀아보겠다는 거야?

아무래도 오늘 분위기가 심상찮다. 갈 데까지 갈 분위기인데. 이래도 되나 몰라?

에라 모르겠다. 요즘 세상에 젊은 남녀가 마음 맞아서 하룻밤 즐기는 게 그리 큰 흉도 아니고.

물론 내 여동생들이 그런다면 도시락 싸들고 다니며 만류하겠지만.

그래서 내로남불. 내로남불. 하나 보다.

그래. 나도 내로남불이다.

“콜! 옮기자!”

곧장 노래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러자 다들 껍질을 한 겹 벗어던지는 듯했다. 내숭이라는 껍질.

보는 눈이 없어지자 호프집에서보다 더욱 화끈하게 놀기 시작했다.

특히 여자들이.

아예 오늘 미쳐버리겠다고 작정을 했구나.

와! 춤을 어쩜 저렇게 섹시하게 출까? 몸 전체가 바람에 흔들리는 버드나무가지 같다.

아무래도 수상해. 대체 뭐 하는 여자들이지? 놀아도 너무 잘 놀아.

근데 이학주 저놈은 술이 취할수록 자꾸 옛날 버릇이 튀어나온다. 채희라에게 달라붙어서 계속 질퍽거린다.

채희라가 서유림의 품에만 안기려고 하자 겁도 없이 도발을 한다.

“근데 유림아. 너 실제로 힘 좀 쓰냐? 괜히 헬스장에서 몸만 그럴듯하게 만든 것 아냐?”

“그런데 다닐 돈이 어디 있냐? 이거 노가다 근육이다.”

“오, 그래? 그럼 오랜만에 팔씨름이나 한번 해볼까?”

하하, 요놈 봐라. 유도선수출신이다 그거지?

그래, 잘됐다. 그렇지 않아도 힘자랑 한번 해보고 싶었거든. 너무 유치한 짓거리 같아서 생각도 안 하고 있었는데, 고맙게도 멍석을 깔아주네.

“좋지.”

서유림이 기꺼이 응했다.

“와! 재미있겠다!”

아가씨들도 흥미로워한다. 순식간에 팔씨름 대결을 펼칠 준비가 되었다.

채희라가 중간에서 심판을 해주었다.

“시이~~~작!”

어라! 그런데 이학주 이놈도 힘을 제법 쓰네. 역시 유도선수 출신이구나. 묵직하게 버티는 힘이 느껴진다.

하지만 그래봐야 가소로운 수준이다.

서유림이 이학주를 여유롭게 바라보다가 한순간에 힘을 바짝 주었다.

그러자 이학주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아프기도 하고 놀랍기도 할 거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내 힘을 느끼기에는 충분했을 테니까.

그대로 이학주를 확 패대기쳐버릴 수도 있다.

만약 이학주가 예전 모습 그대로였다면 이미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 정도 힘은 되니까.

하지만 이학주는 많이 변해있었다. 술에 취하자 예전의 못된 버릇이 조금씩 튀어나오긴 했지만, 그래도 귀여운 수준이었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고등학생 때 이학주에게 신세도 많이 졌다. 골목길에서 중학생들에게 삥 뜯길 때도 도움을 받았고, 이학주 덕분에 일진들의 괴롭힘에서도 벗어났었다.

어찌 보면 그런 고마운 구석은 모두 잊고 얄미웠던 구석만 기억하는 내가 못난 놈일 수도 있지.

그래. 괜한 치기 부리지 말자.

누군가를 혼내주는 일이야 손바닥 뒤집는 것보다 쉽지만, 한번 잃은 우정을 되찾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잖아.

게다가 이학주를 패대기친다고 해서 가슴이 후련해질 것 같지도 않았다. 오히려 두고두고 찜찜할 것만 같다.

서유림이 힘을 살짝 죽이고 이학주의 팔을 부드럽게 넘어뜨려주었다.

“와! 유림 오빠 짱이다.”

“어떻게 해. 나 유림 오빠한테 반했어.”

아가씨들이 팔딱팔딱 뛰며 좋아했다.

이학주도 멋쩍은지 너털웃음을 놓았다.

“이야. 인정! 네가 이겼다. 그런데 잠깐만. 나 물 좀 빼고 오자.”

조금은 쪽팔린 모양이다. 슬그머니 자리를 피한다.

서유림도 얼른 이학주를 따라나섰다.

“나도 물 좀 빼고 온다.”

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 싶었다.

그동안 이학주를 은근슬쩍 미워했던 게 미안한 것일 수도 있고, 이번 기회에 이학주와 좀 더 깊이 친해지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모르겠다. 사람 마음은 역시 복잡해.

이것저것 따질 필요 없다. 그냥 마음이 끌리는 대로 행동하면 되는 거지.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학주와 어깨동무 한번 하고 싶다. 괜히 오줌도 한번 같이 싸고 싶고.

이학주와 나란히 화장실로 들어갔다.

소변기 앞에 다른 사람이 있다.

이학주가 망설임 없이 좌변기로 향했다.

“이리 들어와서 같이 싸자.”

그것도 좋지.

함께 바지를 까고 좌변기를 향해 오줌을 갈겼다.

이학주가 피식 웃었다.

“새끼, 진짜 물건 좋아졌네. 오줌발도 세지고. 내 것보다 낫다. 진짜 몰라보게 변했네.”

“너도 많이 변한 것 같다. 예전보다 싸가지가 좀 생겼어.”

“내가 좀 그랬지? 하하. 나이 먹으면 철이라도 들어야지. 섭섭했던 것 있으면 다 잊어라. 씨발 인제 와서 어쩌겠냐?”

그래. 과거를 붙잡고 있으면 미래를 어찌 잡겠냐?

그리고 사실 고마운 점도 많았다.

함께 화장실을 나왔다. 이학주가 몸을 의지하듯 어깨동무를 했다.

“유림아. 우리 친구 맞지?”

이놈이 징그럽게.

“그렇다고 치자.”

“그럼 자주 좀 놀러 와라 새끼야. 타향살이를 해서 그런지,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요즘은 친구 생각이 간절하다. 생각해보니까 나중에 늙으면 친구밖에 안 남겠더라고.”

그건 그래.

“오늘처럼 아가씨 데리고 오면 더 좋고. 하하.”

“새끼. 잿밥에 더 관심이 있었네.”

“인마. 여자 싫은 남자가 어디 있냐? 오늘 무조건 끝까지 가는 거다. 화이팅!”

그렇게 분위기를 정리하고 다시 미친 듯이 놀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자정을 훌쩍 넘어 깊은 새벽이 되어버렸다.

이제 어쩐다? 이대로 헤어지면 섭섭한데.

뭐든 마침표가 중요한 거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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