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
세월은 사람을 변하게 하더라. (1)
서유림도 운동복차림 그대로 느긋하게 체육관을 나섰다.
부산에 아는 친구가 있다. 고등학교 동창 한영훈.
기억을 더듬어보면 좀 더 있겠지만, 당장 생각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친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한영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 오랜만이다, 유림아! 당연히 나가야지. 그렇지 않아도 오늘 밤에 학주랑 한잔하기로 했는데 잘됐다.
에잉? 이학주도 함께?
사실 이학주도 고등학교 동창이고, 무척 친하게 지냈던 놈이기도 하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놈이다. 왠지 어울리지 않는 부류라고 해야 할까?
이학주는 어려서부터 몸도 좋고 운동신경도 남달랐다. 외모도 모델 뺨치는 수준이라서 고등학생 때부터 여대생을 사귀고 다녔었다.
대학교도 체육학과 유도부로 들어갔다. 때문에 여자들에게는 늘 선망의 대상이었다.
반면 서유림은 정반대의 이미지였다. 키만 멀대 같이 큰 말라깽이였다. 그래서 늘 자신감이 없었고, 놀림의 대상이었다.
이학주가 고등학생 때 장난삼아 했던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그런 몸으로 결혼해서 애나 만들 수 있겠냐?]
이학주에게는 장난이었을지 몰라도 약한 몸이 콤플렉스였던 서유림에게는 그 이야기가 뼛속에 박힐 정도로 아팠다.
이학주는 그런 놈이었다. 일진이 되어서 약한 친구들을 괴롭히거나 하진 않았지만, 자기만 아는 이기주의가 강한 놈이었다.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는 비열한 짓도 서슴지 않았던 것 같다.
5년 전 동창회 때 만난 게 마지막이었는데, 그때도 이학주는 그리 달라진 모습이 아니었다. 여전히 서유림의 부실한 체력을 놀림의 대상으로 삼았었다.
그래서인지 이학주 생각만 하면 괜히 위축도 되고 한편으로는 화도 나고 그랬다.
내가 고등학생 때 그런 놈과 왜 친하게 지냈었는지 몰라? 지금 생각해보면 참 이해가 안 되는 일이다.
하지만 시간이 꽤 지났다.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철이 들 수도 있잖아. 이학주도 그새 철이 들었을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서유림이 달라졌다. 이젠 나도 과거의 서유림이 아니라고.
그걸 이학주에게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자신의 변한 모습에 이학주가 어떤 반응을 보일까?
서유림이 시원하게 대답했다.
“좋아. 어디로 몇 시까지 가면 될까?”
- 너 지금 해운대라고 했지? 그 부근으로 약속장소 바꿀게.
서유림은 통화를 마치자마자 해운대로 가서 백사장을 뛰기 시작했다.
‘서브미션 실력을 키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하악. 하악.”
> 체력이 1 올랐습니다.
역시 백사장을 뛰는 것은 학교 운동장이나 보도블록을 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힘들다. 모래가 발목을 잡고 안 놓아주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서유림은 멈추지 않았다. 운동효과가 좋아서 짧은 시간에 스텟 향상이 더욱 빠르니 오히려 더욱 신이 났다.
‘돈을 좀 들여서라도 전문 코치를 구해야 할까?’
“하악. 하악.”
> 순발력이 1 올랐습니다.
몸은 해운대 백사장을 뛰면서도 머릿속은 온통 서브미션 훈련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주변사람들이 자신을 신기하면서도 흥미롭게 바라보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특히 여자들의 시선이 유독 많았다. 어떤 여자들은 오직 서유림을 구경하기 위해서 해운대 해변에 앉아있기도 했다.
“대체 몇 시간째 뛰는 거야?”
“와, 체력 짱이다!”
“게다가 저 몸 좀 봐. 난 근육이 우락부락한 사람보다는 저렇게 쭉 뻗은 남자가 좋더라.”
“얼굴도 잘생겼다 얘.”
“뭐 하는 남자지? 체육대학교 학생인가?”
몇몇 여자는 적극성을 보이기도 했다.
꼭 남자만 여자를 사냥하라는 법 있는가? 여자도 마음에 드는 남자가 보이면 사냥할 수 있는 법이다.
“잘생긴 오빠. 목 타면 이리 와서 맥주 한잔해요.”
사실 서유림도 여자가 싫지 않다. 예쁜 여자를 보면 자신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유혹하고 싶은 마음도 크다.
예쁜 아가씨들이 관심을 보여주면 당연히 마음이 끌릴 수밖에.
지금도 마찬가지다. 바닷바람처럼 청량한 아가씨의 목소리에 시선이 절로 움직였다.
순간 눈이 시원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와! 예쁘다!
20대 중반쯤 되었을까? 세 명의 아가씨가 앉아있는데, 하나같이 예쁘고 늘씬했다. 게다가 옷차림도 시원시원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운데 앉은 아가씨가 압권이었다. 저 정도면 배우를 해도 크게 성공했을 것 같다.
바로 그 아가씨가 서유림을 부르고 있었다.
와! 저런 미인이 나를 불러줬어? 내 외모가 바뀌긴 많이 바뀐 모양이구나. 이런 경험을 다하고.
“이리 오라니까요. 안 잡아먹어요. 호호호.”
“난 잡아먹고 싶은데? 까르르.”
“어머 얘. 너무 야하다. 깔깔깔.”
여고생도 아니고 웬 웃음이 저렇게 많아? 낙엽 구르는 것만 봐도 배를 잡고 까르르 웃을 것 같다.
오라는 데 못 갈 이유 있나? 그렇지 않아도 살짝 갈증이 느껴지던 참이었다. 너무 예뻐서 부담스러움이 좀 느껴지긴 했지만, 뭐 어때? 내가 먼저 옆구리 찌른 것도 아니고.
서유림이 방향을 틀어서 아가씨들에게 뚜벅뚜벅 걸어갔다.
“어머, 진짜 왔어, 언니! 어떻게 해. 호호호.”
가운데 아가씨가 나이가 많았어? 오히려 더 어려 보이는데.
“뭐 어때? 이런 맛으로 부산 놀러 온 것 아니니? 맥주 드릴까요?”
가운데 아가씨가 캔 맥주 하나를 내밀었다. 역시 가장 예쁜 아가씨가 가장 용감한 듯했다.
“감사합니다.”
서유림이 캔 맥주를 받아서 단숨에 꿀꺽꿀꺽 삼켰다. 아가씨들이 고개를 들어서 심하게 꿀렁이는 목젖을 감상했다.
“사투리 안 쓰네. 오빠 부산 사람 아니에요?”
“서울에 삽니다. 일 때문에 잠깐 출장 왔어요.”
“어머! 우리도 서울에서 왔는데. 근데 혼자 왔어요?”
따지고 보면 혼자인 셈이지. 적어도 내일 오후까지는.
“네.”
“잘됐다. 우리랑 놀아요.”
역시 가운데 아가씨가 가장 적극적이다. 반면 왼쪽의 아가씨는 수줍음이 좀 있는 모양이다.
“어머, 언니! 어쩌려고 그래?”
“나이가 너무 어린 것 같아, 언니! 게다가 짝도 안 맞잖아.”
역시 사람은 외모로만 판단하면 안 된다. 가운데 아가씨가 가장 어려 보이는데, 나이는 가장 많은 모양이다. 양쪽 아가씨가 모두 언니라고 부른다.
그런데 더 웃긴 건 나에 대한 평가다.
나이가 어리다고? 그것도 ‘너무’ 씩이나?
대체 날 몇 살로 보는 거야? 정령 아리안 덕분에 좀 어려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20대 초중반은 되어 보일 텐데.
사실 아가씨들도 그 정도밖에는 안 되어 보인다. 설마 심하게 어려보이는 30대 유부녀들은 아니겠지?
“어리면 더 좋지 뭐. 근데 짝은 좀 문제네. 오빠 혹시 불러낼 친구 없어요? 짝은 맞추고 놀아야죠.”
나이 ‘심하게’ 어려보인다면서 꼬박꼬박 오빠라고 부르는 이유는 또 뭐야?
게다가 짝은 맞추고 놀아야 한다고? 그것 참 상상력 자극하는 말이네. 대체 뭘 하고 놀겠다는 생각인 거야?
불러낼 친구야 물론 있지. 그것도 딱 두 명. 둘 모두 총각이란다. 여자라면 환장할 놈들이지. 게다가 다들 어디 가도 빠지지 않을 외모들이고.
문득 이학주가 생각났다. 아가씨들과 합석하게 되면 그놈이 어떤 식으로 행동할지가 눈에 보이는 듯했다.
틀림없이 가운데 아가씨를 차지하기 위해서 기를 쓰겠지. 그리고 결국은 성공할 테고.
적어도 여자 유혹하는 능력 하나는 타고난 놈이니까.
하지만 빼앗기기 싫다. 가운데 여자도 마음에 들지만, 그보다는 승부욕이랄까? 이학주에게 패배감을 안겨주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것도 놈이 가장 자신있어하는 ‘여자 유혹하기’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는 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왠지 해볼 만한 싸움이 될 것 같다. 나도 이젠 만만찮은 놈이 되었거든.
근데 이거 김칫국 아닌가?
아가씨들은 그냥 농담 삼아 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아무려면 어때? 합석하게 되면 합석하는 거고, 싫다면 마는 거지 뭐.
“오늘밤에 친구들하고 만나기로 했어요. 저까지 포함해서 딱 세 명. 혹시 생각 있으면 같이 놀까요?”
“와! 잘됐다.”
그런데 아직 오후 다섯 시밖에 안 되었다. 친구들 만나려면 아직도 다섯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그 긴 시간동안 세 명이나 되는 아가씨들을 혼자 감당할 생각을 하니 막막했다. 시간도 아깝고.
“이따 열 시에 저기 보이는 꼼장어 집에서 만나기로 했으니까 생각 있으면 오세요. 전 운동 좀 더 해야 해서.”
“좋아요. 이따 봐요.”
서유림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 아가씨들이 다른 남자 만나서 사라지면 어떻게 하느냐고?
자고로 오는 여자 안 막고 가는 여자 안 잡는다고 했다. 당연히 쿨하게 보내줘야지.
어느새 밤이 깊었다. 지금쯤 출발해야 친구들과의 약속에 늦지 않을 것이다.
다시 백호체육관으로 향했다. 뛰어서 20분가량 거리다.
깔끔하게 몸을 씻어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양복바지에 흰색의 반팔 와이셔츠 차림이었다.
이 옷차림으로 뛸 수는 없지. 아가씨들과 다시 만날 수도 있는데 땀 냄새 풀풀 풍길 수는 없잖아.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장소로 향했다.
어! 그런데 저거 뭐야?
길가에서 남녀가 뒤섞여 실랑이하고 있었다. 남자 다섯 명에 여자 세 명이었다. 그런데 여자 세 명의 얼굴이 낯익었다. 아까 해변에서 만났던 아가씨들이다.
그런데 웬 깡패들에게 행패를 당하고 있는 것 같았다.
순간 모른 척해야 하나 싶었다. 어려서부터 워낙 약골로만 살아오다보니 싸움을 보면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무조건 피하고 보자는 생각부터 드는 것이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니 이젠 그럴 필요가 없었다.
나도 충분히 강하잖아.
오히려 이따금 길에서 깡패에게 붙잡혀보고 싶은 마음마저 들었다. 내 능력을 실험해보고 싶었다.
하지만 개똥도 약에 쓰려면 없다고 시비를 걸어오는 깡패가 없었다.
그런데 드디어 기회가 온 것이다.
게다가 피하고 싶어도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정령 아리안이 곧바로 참견하고 들었기 때문이다.
> 정령의 계약자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닫아서는 안 됩니다.
알아, 알아. 나도 그냥 지나칠 생각은 없었다고.
어차피 길도 막혀서 재빨리 지나갈 수도 없다. 게다가 정령 아리안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생각나는 게 있었다.
[정령소환]
사실 궁금해 죽겠다. 정령소환력을 100%까지 올리고 나면 과연 어떤 능력이 생기는 갈까?
새로운 정령을 소환할 수 있다고는 하는데 그게 대체 뭘까? 새롭게 소환되는 정령은 어떤 모습일까? 어떤 능력을 갖추고 있을까?
아리아나가 이런저런 설명을 해주긴 했지만, 직접 경험해봐야지만 실감이 날 것 같다.
그래서 정령소환력을 빨리 100%까지 키우고 싶었다.
그런데 도무지 기회가 오지 않는다. 착한 일 하는 것도 쉬운 게 아니라니까. 그렇다고 시간도 없는데 착한 일 찾아서 길거리를 헤매고 다닐 수도 없고.
그런데 마침 그 기회가 제 발로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아가씨들을 도와주면 정령소환력이 오르지 않겠는가? 아가씨의 머릿수가 무려 세 명이나 되니 한 번에 많은 정령소환력을 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제발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어쨌건 이런 기회를 놓친다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기사아저씨. 여기에서 세워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