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
싸움은 힘보다는 기술 (2)
여기저기에서 짧은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중에는 한동민의 목소리도 섞여있었다. 말도 안 될 정도로 일방적으로 이길 것으로 생각했던 최영만이 한 방에 나가떨어지니까 깜짝 놀란 것이겠지.
사실 나도 깜짝 놀랐다. 최영만이 뒤로 벌러덩 넘어지는 순간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무리 빈틈을 노렸다고 하지만, 어떻게 그걸 못 막아?
게다가 공격력을 숨기려고 힘을 50% 정도만 줬는데 어떻게 딱 한 방에 저렇게 될 수가 있어?
서유림이 당황한 표정으로 최영만을 바라보았다.
최영만은 혼이 나간 사람처럼 옥타곤 바닥에 큰대(大)자로 뻗어버렸다. 마치 기절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잠시일 뿐이었다. 2초쯤 지나자 정신을 차린 최영만이 ‘나 누워있었던 척한 거다.’라고 항변하듯 얼른 몸을 일으켰다.
아니, 일으키려고 했다. 하지만 아직도 멍한 느낌이 남아있는지 손으로 바닥을 짚어가며 일어서는 모습이 조금은 엉거주춤했다.
“아하하, 씨발 쪽팔리게.”
“괜찮아, 영만아?”
“그럼요. 방심했어요, 방심. 아 놔! 거기로 훅 들어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네. 하하. 훼이크 멋졌어요.”
최영만이 과장된 웃음을 지었다. 서유림의 훼이크를 칭찬한다는 듯 글러브 낀 손으로 박수까지 쳐주었다.
그런데 대체 뭐가 훼이크라는 거야?
어쨌건 2초면 충분하지 않을까? 매우 짧은 순간이긴 했지만, 최영만은 분명 넋이 나간 사람처럼 널브러져있었다.
지금도 눈과 다리는 살짝 풀려있었다. 스텝을 밟아보겠다는 식으로 제자리에서 통통 튀어보는데, 균형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 게 눈에 보였다. 이따금 무릎이 제멋대로 꺾여서 휘청거리기도 했다.
물론 시간이 갈수록 빠르게 안정을 찾았지만.
이 정도면 이번 판은 승부가 갈린 것 아닌가?
하지만 스파링에 승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게다가 서유림의 목적은 승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의 능력을 숨기는 게 목적의 하나였다.
“와, 그냥 눈 감고 쳤는데 그게 들어가네.”
서유림이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글러브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최영만이 더욱 황당한 표정을 했다.
“눈 감고? 아하하, 나 진짜. 아, 씨발 쪽팔려. 다시 해요. 아, 괜찮아요. 살살 한다니까요.”
물론 다시 해야지. 이런 스파링 기회는 나에게는 행운이나 마찬가지라고. 바짓단을 붙잡고서라도 부탁하고 싶은 판이다.
“그러시죠.”
스파링이 다시 시작되었다.
최영만이 투레질하듯 머리를 흔들어서 정신을 차리고는 서유림에게 달려들었다. 조금 전의 굴욕을 만회하기라도 하겠다는 듯 움직임도 주먹도 훨씬 거칠어졌다.
‘그래. 어디 마음껏 때려봐라. 다 막아낸다.’
서유림은 가드를 바짝 올린 상태에서도 두 눈은 부릅떴다. 최영만의 움직임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보인다. 주먹의 움직임, 그 주먹을 뻗기 위한 어깨의 움직임, 거리를 잡기 위한 발의 움직임, 발차기를 위한 무게중심의 움직임, 그리고 방어를 위한 현란한 위빙.
시간이 갈수록, 눈을 부릅뜨고 노려볼수록 그 움직임 하나하나가 세밀하게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보니 최영만이 날리는 펀치와 발차기의 대부분이 서유림의 가드에 막혔다.
그뿐이 아니었다. 최영만의 빈틈도 보였다.
서유림이 빈틈을 노리는 척 몸을 움찔움찔하면, 최영만이 자신을 공격하는 것인 줄 알고 깜짝 놀랐다. 얼른 가드를 올리며 거리를 벌리곤 했다.
문득 몇 년 전에 보았던 월드 베이스볼 클래식 야구경기가 생각났다.
일본과의 경기였다. ‘30년 망언’으로 한국 국민의 공분을 샀던 이치로가 1루에 있었다.
그때 투수가 박찬호였던가? 정확히 생각은 안 나네.
이치로는 2루 도루라도 할 것처럼 1루 베이스를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그러다가 투수가 ‘그냥 확!’ 하는 것처럼 고개를 돌리자 깜짝 놀라서 1루로 슬라이딩 해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해당 선수로서는 당연한 행동이겠지만, 난 그 모습이 왜 그리 웃기고 통쾌하던지.
그때 이치로도 멋쩍은 표정을 했었던 것 같다. 투수는 공도 안 던지고 그냥 살짝 움찔한 것뿐인데 혼자 원맨쇼 하듯 온몸을 던져서 슬라이딩하지 않았는가?
지금 최영만의 모습이 꼭 그 꼴이었다. 서유림은 펀치도 날리지 않았는데, 단지 움찔움찔 하는 것만 가지고도 겁을 집어먹고 얼른 내빼지 않는가?
그런 일이 대여섯 차례 반복되자 최영만도 자신의 모습이 창피했던 모양이다. 더는 타격을 고집하지 않았다.
대신 자신의 주특기라는 그래플링으로 공격했다. 느닷없이 자세를 낮추더니 서유림의 하체를 잡으며 테이크 다운을 노리는 것이다.
서유림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한방이었다.
아니, 예상했다고 해도 방어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너무 빠르면서도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게다가 완벽하기까지 했다. 재빨리 몸을 움직이며 무게중심을 잡아보려고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어······!”
하는 순간 쿵! 하며 엉덩방아를 찧고 쓰러졌다.
최영만의 움직임은 마치 물 흐르는 것 같았다. 어느새 자신의 가랑이 사이에 서유림의 팔을 집어넣고는 암바를 시도했다.
힘은 서유림이 월등했지만, 기술에서 차이가 너무 컸다. 기술을 모르니 도저히 방어할 수가 없다.
팔이 뒤로 꺾이는 통증이 느껴졌다.
한동민의 말대로 그래플링 실력이 어마어마한 듯했다.
“항복! 항복!”
서유림으로서는 어떻게 당했는지도 모른 채 탭을 쳐야만 했다.
그제야 최영만이 팔을 놓아주었다.
“역시 영만이야. 타격이면 타격, 서브미션이면 서브미션. 못하는 게 없다니까.”
한동만이 최영만에게 박수를 보내주었다.
반면 서유림에게는 핀잔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회만 노리고 있었을 텐데 이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아니, 서유림씨. 그깟 격투기는 껌이라며.”
저놈이 왜 앞뒤 다 자르고 그 부분만 이야기하는 거야? 내가 분명 그랬지? ‘체육관 1년 정도만 다니면.’이라는 전제가 붙었을 때 격투기가 껌이라고.
근데 난 격투기 시작하고 겨우 보름 지났단다. 뭘 바라는 건데?
그리고 엄밀하게 따지면 이건 내가 이긴 게임이라고. 실제 경기였으면 그 한 방으로 끝난 셈이지.
하지만 서유림은 깔끔하게 인정했다. 패자가 말이 많으면 그보다 구차한 것도 없으니까.
이런 때에는 오히려 상대방을 추켜 세워주는 게 최고다. 그것도 이왕이면 최고의 찬사로.
그러면 상대방도 함부로 굴욕을 주지는 못한다. 물론 싸가지 없는 놈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역시 대단하시네요. 꼼짝을 못 하겠어요.”
서유림이 최영만을 위해서 엄지손가락을 세워주었다.
그러자 최영만이 겸손을 떨었다.
“아닙니다. 사실 이건 제가 진 게임이죠. 어때요? 1:1 된 셈이니까 한판 더 붙을까요?”
그렇게 해준다면 나야 땡큐지.
“좋습니다.”
다시 스파링을 시작했다.
최영만은 명분보다는 실리를 택했다. 타격은 위험요소가 있다고 판단하고 곧바로 그래플링으로 승부를 걸어왔다.
물론 나도 예상하고 있던 바다. 최영만이 테이크 다운 걸어오는 시점을 파악하고 재빨리 몸을 뺐다.
하지만 역시 힘보다는 기술이었다. 빤히 예상하고 타이밍에 맞추어 피했는데도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다.
이번에도 암바였다.
그것 참 신기하네. 그 자세에서 어떻게 그렇게 쉽게 암바로 이어질 수가 있지? 무슨 공식이라도 있는 것 같다.
“한판 더 할까요?”
이렇게 고마울 수가.
최영만은 무려 세 판을 더 스파링 해주었다.
하지만 이런 식이라면 세 판이 아니라 30판도 더 할 수 있을 것 같다. 한 판에 30초도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시작하자마자 최영만이 대놓고 테이크 다운을 노렸고, 그럴 때마다 나는 속절없이 당하기만 했다.
와! 신기해! 이건 말도 안 돼.
보다 못한 한동민이 하품을 하며 스파링을 만류했다.
“됐어, 됐어. 지루해 죽겠네. 서유림씨는 쪽팔리지도 않아?”
쪽팔리긴 뭐가 쪽팔려? 자고로 무식한 것과 약한 것은 쪽팔린 게 아니란다. 유식한 척하다 무식한 게 들통 나거나, 강한 척하다가 약한 게 들통 날 때가 쪽팔린 거란다.
난 처음부터 약하다고 밝혔어.
어쨌건 스파링은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서유림이 최영만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비록 나이가 한참 어린 동생이었지만, 인사를 받을 자격은 충분했다.
“스파링 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건 진심이었다. 최영만과의 스파링이 아니었다면 서브미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전에도 대충은 알고 있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타격가라고 해도 서브미션 실력이 부족하면 B급 선수밖에 될 수 없다는 것을.
하지만 ‘주먹이 운다.’는 겨우 아마추어들의 싸움이 아닌가? 신체능력이 좋아지면 그것으로 충분히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절대 아니었다. 서브미션을 익히지 않는다면 제아무리 신체능력이 뛰어나도 한 방에 승부가 갈릴 것이다.
그것을 가르쳐주었으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그뿐이 아니었다.
자신감도 얻었다. 내 스피드에 대한 자신감. 내 맷집에 대한 자신감.
특히 내 펀치력에 대한 자신감. 힘을 많이 빼고 쳤는데도, 게다가 상대의 헤드기어를 쳤는데도 엄청난 데미지를 입혔다.
만약 제대로 된 시합이었다면 한 주먹에 상대를 끝낼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주먹이 운다.’에서 내가 승리할 수 있는 공식을 찾은 기분이랄까?
그래. 나는 지금부터 한방 펀치로 승부한다!
물론 서브미션 같은 다른 기술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되겠지. 하지만 그런 것들을 내 승부스로 삼기는 무리다. 단지 수비 차원에서 훈련해야 할 것이다.
오늘 얻은 게 무척 많다. 부산에 오길 정말 잘했다.
“정말 많이 배웠습니다. 감사합니다.”
서유림이 연신 고마움을 보였다. 그러자 최영만도 아니라는 듯 연신 손을 내저었다.
“오히려 덕분에 제가 많이 배웠습니다. 그런데 정말 격투기 배운지 보름밖에 안 되셨어요? 그러면 천재 수준이신데.”
다행히 싸가지가 없는 놈은 아니었다. 서유림과 최영만이 서로를 칭찬하는 말을 주고받으니 분위기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동민은 그런 상황이 영 불쾌한 모양이다. 얼른 상황을 종결시켰다.
“서유림씨는 그만 가봐. 서울에는 내일 오후 세 시쯤에 출발할 테니까 늦지 않게 오고. 아! 휴대폰 꼭 켜놔.”
서울에 있었어도 어차피 온종일 운동만 했을 거다. 여기에서 하나 거기에서 하나 무슨 차이랴?
오히려 이곳이 훨씬 낫겠다. 답답한 실내에서 운동하는 것보다는 확 트인 바닷가에서 운동하는 게 훨씬 나을 것이다.
게다가 부산에 친한 친구도 몇 명 있다. 오랜만에 얼굴 좀 보는 것도 괜찮겠지.
그보다는 한동민 저놈에게 황홀한 밤을 허락하고 싶지가 않다. 오히려 찝찝한 밤을 선물하고 싶다.
글러브를 벗자마자 한동민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대리님. 잠시 저하고 얘기 좀······.”
한동민이 서유림에게 질질 끌려오듯 하며 의아한 표정을 했다.
“갑자기 무슨 얘기?”
사실 할 이야기는 없다. 단지 체력 흡수를 위해서 스킨십을 한 것뿐이다.
그런데 이유도 없이 스킨십 하면 이상하잖아. 이럴 땐 아무 말이나 둘러대면 되는 거야.
“부산까지 왔는데 그냥 가면 섭섭하잖아요. 오늘 밤에 아가씨 헌팅이나 하면 어때요?”
그러자 한동민이 매서운 눈으로 서유림을 노려보았다.
“내가 놀러 온 줄 알아? 헌팅은 무슨 얼어 죽을.”
하긴, 좀 무리수이긴 했다. 노는 것도 급이 있는데. 대표이사 아들씩이나 되는 놈이 주임도 못 단 사원과 함께 놀아줄 리가 있겠나?
게다가 밤에 데리고 놀려고 강은영까지 데리고 왔는데.
그래도 덕분에 체력은 충분히 흡수했다.
이놈 벌써부터 하품하고 난리네.
“하~암. 차에서 얼마나 긴장했는지 피곤해 뒈지겠네. 은영씨. 그만 나가자고. 일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