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청개구리 심보를 다루는 법 (1)
가족은 아직 모두 잠들어있다.
[일찍 출근합니다.]
간단하게 씻고, 쪽지 하나 남겨둔 후, 배낭 하나를 메고 집을 나왔다.
운동복 차림이었다. 출근복은 배낭에 챙겨 넣었다.
체육관까지 뛰었다.
아침 6시 30분밖에 안 되었는데, 벌써 여러 명이 체육관에 나와 운동하고 있었다. 여자도 세 명이나 된다.
역시 세상에는 부지런한 사람이 참 많아.
남 신경 쓸 필요 있나?
줄넘기 하고, 고무줄 당기고, 샌드백 때리고.
원 투! 원 투!
몸을 혹사시키면서 실컷 땀을 흘리고, 차가운 물로 샤워를 하니 그렇게 개운할 수가 없다.
근처 해장국집에 가서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채웠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자꾸 고기가 끌리네. 전에는 야채가 훨씬 좋았는데. 몸이 변해서 그런 거야?’
> 맞습니다. 몸이 필요로 하는 영양소가 끌리는 겁니다.
그럴 줄 알았다. 그렇다면 마음껏 먹어야지. 콜레스트롤수치 걱정할 필요도 없는데.
빨리 강해지자. 가능한 한 이번 시즌에 ‘주먹이 운다.’ 본선 진출하고, 단숨에 우승까지 해버려야지.
그 와중에 한동민 돈을 좀 더 뜯어낼 방법도 찾아보고.
그러자면 낮에도 운동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갑갑한 사무실을 탈출할 좋은 방법이 없을까?
식사를 마치고 제 시각에 사무실에 출근했다.
권진아가 먼저 나와 있었다. 이어서 강은영을 시작으로 팀원들이 하나둘 출근했다.
오영훈도 늦지 않게 출근했다.
서유림이 오영훈을 슬쩍 바라보았다.
예상대로다. 눈 밑에 다크서클이 잔뜩 끼었다. 얼굴도 푸석푸석하고, 눈빛도 붉게 충혈 되어 있다.
반면 강은영은 쌩쌩했다.
그것만 봐도 간밤의 상황을 쉽게 알 수 있었다. 강은영이 일을 주도하고 오영훈이 도와줘야 하는 게 맞지만, 그 반대로 된 것이겠지.
어쩌면 한동민이 중간에 강은영을 불러냈을 수도 있다.
“강은영씨. 야간출장은 잘 다녀왔어?”
오영훈이 느닷없이 물었다. 목소리가 그리 좋지 않다.
강은영이 어깨를 살짝 움츠린다.
“······예.”
‘그랬군. 오영훈 혼자서 독박을 썼던 거야. 후훗.’
잠시 후, 한동민도 출근했다. 그제야 오영훈은 고개를 숙이고, 강은영은 고개를 들었다.
“오 주임. 라벨지 수정은?”
“완성해서 강은영씨 메일로 보냈습니다.”
오영훈이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 감정 감추기의 달인이다. 출세할 만 해.
한동민도 만족스러워했다.
“그렇지. 일은 저렇게 해야 한다니까. 서유림씨. 좀 보고 배워.”
배울 게 따로 있지. 나는 그냥 ‘배 째라’ 작전이 적성에 맞는 것 같다.
다시 바쁜 업무 속으로 들어갔다.
기업이라는 곳은 늘 사람보다는 일이 많은 곳이다. 특히 명진식품처럼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는 기업은 더욱 그렇다.
일이 많아서 이 인원으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된다 싶은 정도가 되어야 한두 명 찔끔찔끔 충원을 해준다.
그러니 온종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수밖에.
서유림도 그랬었다. 아니, 서유림이 특히 더 그랬었다. 워낙에 거절을 못 하는 성격이라서 다른 사람의 일까지 도와줘야 했으니까.
그런데 이제 상황이 역전되었다.
‘할일이 없네.’
서유림의 일이 줄어든 것은 아니다. 단지 다른 사람이 서유림에게 더는 업무를 부탁하지 않아서다.
그리고 또 하나.
머리가 팽글팽글 잘 돌아갔다. 집중력도 높아지고, 이해력도 높아졌다. 기억력도, 암산력도 마찬가지였다.
무엇보다도 융통성, 나쁘게 말하면 잔머리가 좋아졌다.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전에는 보이지 않던 해결방법이 툭툭 튀어나왔다.
그러다 보니 전에는 하루 온종일 씨름해야 해결되었던 일이 이제는 한두 시간 만에 해결되었다.
덕분에 어제 하루 만에 즉석카레 적정단가 산출부터 재고목록 정리, 거래처 정리까지 모두 끝내버렸다. 앞으로 사나흘 정도는 급한 일이 전혀 없을 정도다.
이래서 사람들이 ‘능력자’를 찾는구나 싶을 정도였다.
그러니 시간이 남아돌 수밖에.
이제 남는 시간에 뭘 해야 하나?
‘어학공부 좀 해볼까?’
사실 어학능력이 늘 콤플렉스였다. 그나마 자신 있는 영어도 외국 바이어와 직접 대화해보면 막히는 부분이 제법 많았다.
왜 그렇게 발음을 굴려서 하는지.
이래서 어학연수 다녀온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가 크다고 하는 모양이다.
중국어나 일본어는 말할 것도 없다. 3개국어나 4개국어를 원어민처럼 능통하게 구사하는 사람들 보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자존심도 상했다.
왜 하필 이런 언어 약소국에서 태어나서.
돌이켜 생각해보면 평생에 했던 공부의 절반은 영어공부였던 것 같다. 그 시간을 다른 공부에 투자했다면 얼마나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을까?
에휴, 신세한탄 한다고 달라질 게 있나?
그래도 정령 아리안 덕분에 머리는 팽글팽글 잘 돌아가니 공부할 맛은 나겠다.
오래전에 사놓고 아직 제대로 들춰보지도 못한 중국어 교재를 열었다. 그리고는 조금씩 공부하기 시작했다.
물론 눈치껏.
곧 그만둘 직장이라지만, 그래도 기본 예의는 지켜야지.
그런데 잠시 후, 오영훈이 깜짝 놀라서 일어섰다.
“강철중씨, 왜 그래? 어디 다쳤어?”
다른 팀원들도 덩달아 놀라서 고개를 돌렸다.
강철중이 사무실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허리는 한 쪽으로 살짝 구부린 채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창고에서 물건 빼다가 허리를 삐끗했습니다.”
딱 봐도 그래 보인다.
그런데 많이 다친 모양이다. 웬만해서는 아픈 내색을 않는 친구인데.
저것 봐. 걷는 것도 시원찮네.
가뜩이나 좋지 않았던 허리가 더 나빠진 듯했다. 창고 업무는 하나부터 열까지 무거운 물건을 직접 들고 옮겨야 하는 일인데, 저런 허리 상태로 일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병원에 가봐야 하지 않겠어?”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느낌이 안 좋아요.”
“가지. 내가 데려다줄게.”
오영훈이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황급히 나섰다.
창고관리는 오영훈과 강철중의 가장 큰 업무다. 말하자면 사수와 부사수 관계랄까?
그래서 오영훈은 동창인 서유림보다 부사수인 강철중을 열 배는 살뜰하게 챙긴다. 강철중이 일을 제대로 못하면 부족한 부분을 자신이 채워야 하니까.
그러니 강철중의 부상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일 수밖에.
당장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어쩌죠? 생산팀이 준 목록 정리해서 오늘 안으로 출고해줘야 하는데. 죄송하지만, 오 주임님께서······.”
오영훈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창고 업무는 노가다나 마찬가지라서 하나부터 열까지 힘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체력 약한 오영훈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벅찬 일이었다.
한동민에게 특별히 부탁해서 힘 좋은 강철중을 부사수로 삼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일을 다시 맡으라니.
잘못하면 자신의 허리도 강철중의 것처럼 삐끗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십중팔구 그렇게 될 것이다.
반면 서유림은 동공이 활짝 열렸다.
그렇지 않아도 갑갑한 사무실을 벗어날 방법만 찾고 있었는데. 이보다 좋은 기회가 어디 있단 말인가?
만약 창고 업무만 맡을 수 있다면 아침에 눈 뜨면서부터 밤에 눈 감을 때까지 온종일 운동만 하며 지낼 수 있을 것이다.
강철중의 허리가 삐끗한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기회란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서유림이 창고를 맡아주면 강철중도 고마워할 것이다.
‘저 업무 탐난다.’
하지만 창고 업무를 맡겨달라고 제안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면 청개구리 심보를 가진 한동민이 어깃장을 놓을 가능성이 크니까.
‘어떻게 해야 저 업무를 내가 가질 수 있을까?’
아!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한동민의 청개구리 심보를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다.
머리가 좋아지니 아이디어도 반짝반짝 빛나는구나!
서유림이 얼른 나섰다.
“오 주임님은 강철중씨 대신 창고 업무 보셔야죠. 오 주임님 말고는 창고 업무 볼 사람이 없잖아요. 저는 마침 급한 일이 없으니 강철중씨 병원은 제가 함께 가겠습니다.”
이 정도면 한동민이 내 뜻을 알아들었을까?
이따금 보면 눈치가 없어 보일 때가 많아서 조금 걱정이다.
그런데 오영훈이 알아서 지원사격을 해준다.
“서유림씨. 창고 업무 맡기 싫어서 그러는 거야?”
그제야 한동민의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푸시하면 될 것 같다.
“에이. 그럴 리가요. 창고 업무는 저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걸요. 창고 업무 처리할 능력도 없고요. 제가 그 업무 맡으면 일주일도 못 돼서 병 날겁니다. 하하하.”
“아무 상관이 없다니. 우리 구매팀은 모두 가족 아니었나? 네 업무 내 업무가 어디 있어? 가족끼리.”
이야, 오영훈 멋지다! 여기에서 ‘가족’을 들먹을 생각을 하다니.
천재야 천재!
그렇게 조금만 더 도와다오. 그러면 한동민이 나서줄 것 같다.
“아무리 그래도 맡은 업무파트가 있죠. 창고는 오 주임님과 강철중씨 파트잖아요.”
“거 듣자하니 서유림씨 너무하네. 같은 가족끼리.”
한동민이 비로소 나섰다. 낚싯바늘에 주둥이가 단단히 걸린 것이다.
“강철중씨 병원은 오 주임이 함께 가주세요.”
이야! 한동민 멋지다. 팀장이 옆에 버젓이 앉아있는데, 혼자서 결정을 다 내려버리네.
그런데도 팀장은 쪽팔린 줄도 몰라요.
어쨌건 이젠 다 된 밥이다. 일이 이렇게 쉽게 해결되다니.
그래도 마지막까지 방심하면 안 되겠지.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
“그럼 창고 업무는······?”
“서유림씨 있잖아. ‘주먹이 운다.’에 나가려면 어차피 근력 키워야 할 것 아니야? 딱 정리됐네.”
하마터면 입술을 쭉 찢을 뻔했다.
어쩜 그렇게 내 마음을 잘 알아줘?
하지만 내색하면 안 된다. 싫어하는 척해야 일회성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창고 업무를 맡아볼 수 있을 테니까.
아예 업무분장을 새로 해줬으면 좋겠다.
서유림이 애써 표정을 감추며 투덜거렸다.
“전 맡은 업무가 따로 있습니다. 지금 업무도 시간이 부족해서 다 처리 못하고 있는데.”
“그럼 업무분장 다시 해주면 되겠네. 강철중씨는 어차피 허리 때문에 당분간 창고 업무 힘들 테니까 서유림씨가 아예 업무 가져가. 대신 자재관리 같은 건 강철중씨한테 떼어주면 되잖아. 그렇게 하면 되지 않을까요, 팀장님?”
저놈이 내 머릿속을 들어갔다 나왔나? 어쩜 저렇게 입맛에 딱딱 맞춰서 밥상을 대령하냐?
배기열 팀장의 의견이야 들을 필요도 없다. 어차피 한동민의 제안을 명령으로 받아들일 사람이니까.
저것 봐. 1초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고개 끄덕이잖아.
“그게 좋겠네요.”
“말 나온 김에 오늘부터 바꿔요. 인사팀에는 제가 얘기해놓겠습니다.”
벌써 상황이 종료 직전이다.
가만 보니 지금이 아주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체력흡수 마법’을 시험해볼 타이밍.
서유림이 벌떡 일어서며 한동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한동민의 손을 덥석 잡았다.
“대리님. 제 체력이 얼마나 부실한지는 대리님이 더 잘 아시잖아요. 제가 창고 업무 맡으면 일주일도 못 버티고 앓아눕습니다.”
“이거 놔.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래? 징그럽게.”
가만히 좀 있어봐. 내가 지금 널 상대로 첫 마법을 구현하고 있잖아. 이 영광스러운 순간에 웬 앙탈이야? 좀 도와줘라.
한동민이 손을 빼려고 했지만, 서유림이 부탁하는 눈빛을 하며 더욱 힘껏 잡았다.
“대리니~임!”
“징그럽게, 진짜. 이거 놓으라니까요.”
아따, 그놈 힘 좋네!
조금 더 체력흡수 마법을 사용해보고 싶었지만, 한동민이 힘으로 뿌리치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데 된 건가? 마법을 어떻게 사용하는 건지 미리 배워둘걸.
‘아리안. 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