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
고블린 킹 (1)
“으드드득! 아, 잘 잤다.”
서유림이 기지개를 시원하게 켰다. 정령계에서 맞이하는 아침은 늘 넘칠 정도로 상쾌했다.
그런데 아리아나가 이상하다. 꼭 잠을 설친 사람처럼 얼굴에 피로가 잔뜩 묻어있다.
“어디 안 좋아요?”
서유림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하지만 아리아나는 가볍게 웃어주었다. 대신 처음 보는 바지를 내밀었다.
“괜찮아요. 이것 한번 입어보세요.”
어제 잡아서 벗겨온 정크의 가죽으로 만든 바지였다.
서유림의 눈이 커졌다.
“밤새 잠 안 자고 이걸 만들었던 겁니까?”
“잠은 낮에 자도 돼요. 온종일 잠만 자는걸요. 눈대중으로 만들었는데, 맞을지 모르겠어요.”
아리아나가 이야기를 마치고는 고개를 저쪽으로 살짝 돌려주었다.
뭐야? 여기에서 갈아입으라는 거야?
밖에서 갈아입고 오려고 했더니만.
뭐 까짓, 원한다면야.
서유림은 얼른 입고 있던 바지를 벗고 정크의 가죽바지로 갈아입었다.
“맞춤옷 같아요. 너무 좋아요.”
아리아나가 다시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행이에요. 그렇다고 해도 너무 무리하진 말아요. 특히 고블린 킹을 만나면 절대 맞서 싸우지 마세요. 아니, 근처에도 가지 마세요.”
“그놈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고블린 킹은 맹독을 사용해요. 그건 레벨업에 의한 리셋으로도 치료되지 않고, 제 치료마법으로도 치료할 수 없어요.”
그렇다면 정말 위험하다. 잘못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얘기 아닌가?
아니지. 확률 상 거의 죽는다고 봐야겠지.
아리아나의 말대로 무조건 피해야 할 것 같다.
“고블린 킹은 어떻게 생겼나요?”
“보는 순간 알 수 있을 거예요. 어쨌건 피부색이 알록달록하다 싶으면 무조건 피하세요.”
“알겠습니다. 조심할게요.”
서유림이 알록달록한 피부색을 머릿속에 심어두며 동굴을 나섰다.
역시 경험은 무엇보다도 값진 재산이다. 한번 매복을 당하고 나니 짙은 수풀만 보여도 부쩍 경계심이 생긴다.
가능한 수풀이 적은 길을 따라서 요정의 샘물로 향했다.
고블린이 출몰하면 앞 뒤 옆을 모두 살피며 조심조심 사냥했다.
하지만 그 어디에도 고블린의 매복은 없었다. 요정의 샘물에 도착해서 먹을 것을 잔뜩 구하고, 다시 동굴로 돌아올 때까지 평온하기만 했다.
다음날도 마찬가지고 그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고블린 무리와 정크를 만나기는 했지만, 모두 안전하게 사냥을 끝마쳤다.
레벨은 어느새 22가 되었다.
[레벨 22]
근력 : 221
순발력 : 228
체력 : 214
감각 : 249
스텟창을 확인할 때마다 뿌듯함이 느껴졌다. 하루가 다르게 능력치가 쑥쑥 성장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이제는 모든 스텟이 인간 잠재력의 평균치라는 200을 넘어서고 있었다.
정령계에 한 번 올 때마다 최대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대략 5일 가량이라고 했다.
그 이상 머물 수도 있지만, 그러면 인간계로 돌아가서 적응하기 힘들다고 했다. 마치 잠이 덜 깬 것처럼 몽롱한 상태가 된다고 해야 할까?
그럼 당연히 5일 정도는 머물다가 돌아가야지.
나흘째가 되었다.
서유림은 아침이 되자마자 다시 동굴을 나섰다.
목적지는 여전히 요정의 샘물이지만 주변의 지형도 익히고, 몬스터도 더욱 많이 만나기 위해서 매일 길을 바꿔가며 움직였다.
덕분에 이제는 주변 지형이 웬만큼 익숙해졌다. 정령 아리안을 만나면서 기억력이 크게 향상된 덕도 있었다.
처음 와보는 길인데도 불구하고 이곳이 어디쯤인지도 대충 파악이 되었다.
‘저 바위만 돌면 요정의 샘물이 나오겠군.’
서유림이 빠르게 움직였다.
그러다가 멈칫했다. 요정의 샘물 인근에 고블린 떼가 가득했기 때문이다. 어림잡아도 20마리는 넘었다.
얼른 몸을 낮추며 주변을 살폈다.
이제 고블린 대장이나 뿔 고블린 따위는 전혀 두렵지 않다. 지난번처럼 포위된다고 해도 충분히 빠져나올 자신이 있다.
그만큼 많이 경험했고 또 많이 성장했으니까.
문제는 고블린 킹이다. 신체능력이 발달하는 것과 독을 이겨내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니까.
‘여기에서는 잘 안 보이는군.’
바위 위로 기어 올라갔다. 너무 가팔라서 오르기는 힘들었지만, 덕분에 주변을 한눈에 살펴볼 수는 있었다.
이번에도 주변 숲에 고블린이 잔뜩 매복해있었다. 바람도 없이 수풀이 움직이는 것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고블린 킹은 보이지 않았다.
수풀에 매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따금 매복한 고블린이 움직이면서 눈에 띄었는데, 피부색이 알록달록한 놈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른다는 생각에 한 시간을 더 지켜보았다.
‘확실히 없군! 혹시 있다고 해도 조심해서 사냥하면 문제없겠지.’
어차피 요정의 샘물은 필요하다. 오늘이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저놈들을 해치워야 할 것이다.
게다가 욕심도 났다. 저놈들 모두 귀중한 경험치가 아니겠는가?
서유림이 바위를 내려갔다. 그리고는 망설임 없이 달려들어서 눈에 보이는 놈들부터 난도질하기 시작했다.
고블린 떼도 발광을 시작했다. 서유림을 공격하기 위해서 우르르 몰려다녔다.
끼루- 끼루루루-
고블린 떼 울부짖는 소리가 오늘따라 유난히 시끄럽다. 사람의 신경을 건드리는 주파수대인 듯했다.
이놈들은 우는 소리도 무기인 모양이다.
이따금 안쪽으로 달아나며 서유림을 유인하려는 움직임도 보였다.
하지만 서유림은 안전선을 확실하게 그어놓고 그 안으로는 절대 들어가지 않았다.
바위 위에서 꼼꼼하게 지켜보았기 때문에 어디까지가 안전지역인지는 이미 확인해둔 뒤였다.
그 주변만을 겉돌며 놈들을 밖으로 유인해서 사냥했다.
‘많이도 몰려왔군.’
지금까지 사냥한 뿔 고블린만 다섯 마리다. 대장 고블린도 20마리가 넘었고, 숲 고블린은 세는 것을 포기했다.
중간에 섬광도 몇 번 경험했다.
이런 식으로만 매일 사냥할 수 있다면 100레벨도 금방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가슴 벅찬 일이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에선가 날카로운 파공음이 들려왔다.
시잇-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서유림은 잔뜩 긴장하고 있었다. 온 신경은 ‘언제 어디에서 튀어나올지 모르는 고블린 킹’에게만 집중되어있었다.
그래서인지 이상한 소리가 들리자마자 반사적으로 몸이 반응했다. 재빨리 몸을 날리며 땅바닥을 굴렀다.
‘뭐였지?’
아니, 그런 걸 생각할 때가 아니다. 정체 모를 위험이지 않은가? 일단은 피하고 보는 게 상책이다.
서유림이 뛰었다. 고블린의 매복지에서 멀어지는 방향으로.
그러자 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뿔 고블린이었다. 그런데 머리의 뿔은 두 개였고, 덩치도 다른 놈들보다 월등하게 컸다.
무엇보다도 피부가 알록달록했다.
아리아나의 말이 맞았다. 보는 순간 ‘저놈이 고블린 킹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 매복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전혀 다른 방향에서 다가오고 있는데, 수십 마리의 고블린 떼를 거느리고 있었다.
문득 고블린 떼의 울음소리가 생각났다. 오늘따라 왜 그렇게 시끄럽게 울부짖었나 했는데, 고블린 킹을 부르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맞설 엄두가 나지 않았다.
‘피하자. 피하는 게 상책이다.’
서유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었다.
그런데 고블린 킹의 뛰는 속도가 생각보다 빨랐다. 서유림이 전력을 다해서 달리는데, 그 속도를 따라잡고 있었다. 좀처럼 거리가 벌어지지 않는다.
그래도 다행인 점은 있었다. 고블린 킹을 제외한 다른 놈들은 빠르게 뒤쫓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른 놈들은 낙오되고 오직 서유림과 고블린 킹 둘만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이 되었다.
‘요정의 망토를 사용해야 하나?’
그러면 더 위험해질 것 같다. 서유림이 웅크리고 있는 동안에 고블린 킹이 수하들을 잔뜩 불러서 주변을 포위해버리면 그땐 정말 끝장이다.
뿔 고블린도 지능이 높은데 고블린 킹은 얼마나 똑똑하겠는가? 그만한 지능은 충분히 갖추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계속 달아나는 것도 무의미했다. 딱 보니 서유림의 체력보다는 고블린 킹의 체력이 월등했다.
서유림은 벌써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조만간 체력이 바닥나면 결국 따라잡히고 말 것이다.
어차피 맞붙어야 할 상황이라면 체력이 조금이라도 남아있을 때가 낫지 않을까? 다른 놈들은 모두 따돌렸으니 고블린 킹 한 놈만 상대하면 될 일이었다.
‘그래. 더 지치기 전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