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6
특별하지 않은, 하지만 특별한 (2)
자꾸 그러지 말라니까. 괜히 오금이 저려오잖아.
“······왜요?”
“인간계에 힘을 감추려면 그 대상이 필요할 테니까요.”
“그게 왜 하필 저냐고요?”
“그야 물론 유림씨를 특별한 존재로 보고 계시기 때문이겠죠.”
그건 싫은데.
난 평범한 게 좋다고.
게다가 특별하다고? 내가?
‘특별’은 무슨. ‘평범’ 축에도 못 끼는 놈인데.
물론 지금은 달라졌다. 무척 특별한 놈이 되긴 했지.
하지만 그건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잖아. 특별한 존재인 요정 아리아나와 정령 아리안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만약 아리아나와 아리안이 내 인생에서 사라진다면 난 다시 ‘평범’ 축에도 못 끼는 인생을 살게 되겠지.
이런 내가 어딜 봐서 특별해? 만약 정령신이 그렇게 생각했다면 눈이 삐어도 단단히 삔 거지.
“전 전혀 특별하지 못한 놈인데요.”
“그 특별함을 판단하는 분은 정령신이에요. 유림씨가 평범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도 정령신께는 특별하게 보일 수 있죠. 혹시 인간계에서 특별한 일 없었나요? 정령신께서 유림씨를 특별하게 볼만한 일.”
뭐가 있었을까?
서유림이 허공에 시선을 두고 가만히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한 것은 없었다.
손수레가 차 옆구리 박은 것을 특별하다고 해야 하나.
에이, 그건 아니지.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인데.
그 일과 관련해서 내가 인심 좀 쓴 것?
어쩌면 그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때 아리안이 갑자기 말투를 이상하게 바꾸면서 끼어들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렇게 대단한 일이 아니라고. 내가 착해서 그런 것도 아니고. 나도 잔머리 잔뜩 굴리고 이런저런 따질 것 다 따져본 후에 내린 결론이라니까.
어쨌건 아리안과 관련해서는 그 어떤 것도 아리아나에게 이야기할 수 없다. 어디까지 비밀로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하나둘 이야기하다 보면 자칫 실수로 금단의 말까지 흘릴 수 있다.
서유림이 고개를 흔들었다.
“전혀 없었어요.”
아리아나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정령신의 뜻을 누가 알겠어요. 그냥 제 착각일 수도 있으니 너무 마음 쓰지 마세요.”
뭐야? 지금까지 실컷 얘기해놓고. 사람 애간장 태울 것 다 태워놓고 인제 와서 마음 쓰지 말래.
“주무세요. 5분 후에 수면마법 걸어드릴게요.”
아리아나가 서유림을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그리고는 눈을 감아주었다.
의도가 너무도 눈에 보이는 행동이다. 5분간 얼굴 실컷 감상하라는 거지?
이럴 때 보면 요정이 아니라 천사라니까. 날 너무 많이 배려해주는 것 같아.
하지만 오늘은 그 아름다운 아리아나의 얼굴도 그다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무려 ‘정령신’씩이나 되는 존재가 나한테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은데 어떻게 여자 얼굴에 눈이 가겠는가?
게다가 왠지 아리아나의 추측이 맞는 것 같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령신이 날 시험해보고 있다는 느낌이 자꾸만 들었다.
아리안의 말도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유림씨를 알고 싶어요. 지금보다 더 깊이, 자세히. 유림씨를 보여주세요.]
정말로 정령신이 나를 콕 찍은 걸까?
그건 정말 싫은데. 난 정말 평범하게 살고 싶은데.
‘아리안. 대답해줘요. 아리아나의 말대로 정령신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건가요?’
아리안은 이번에도 서유림의 질문을 깔끔하게 씹어주었다. 마치 서유림의 몸에서 떠나기라도 한 것처럼 전혀 대답이 없다.
대신 아리아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생각해요?”
왜 자신의 얼굴을 감상하지 않느냐는 거겠지.
지금 그럴 상황이 아니라니까.
“아까 제가 한 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정령신.”
알긴 아는군.
“예. 계속 마음에 쓰이네요.”
“그럴 필요 없어요. 유림씨가 마음 쓴다고 달라질 것도 없고, 마음 쓰지 않는다고 달라질 것도 없어요. 정령신의 뜻을 누가 거역하겠어요.”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에 그렇게 속 편하게 생각하고 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어?
막말로 아리아나는 그럴 수 있겠어? 아리안이 당신의 순결을 두고 거래를 해왔다는 걸 알고도 담담할 수 있겠어?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내가 아리아나의 순결을 갖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리아나는 나에게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일까?
내가 적극적으로 구애하면 혹시 마음의 문을 열어주지 않을까?
서유림이 비로소 아리아나를 향해 몸을 돌려 누웠다.
이런 심각한 상황에서도 아리아나는 심장을 울릴 정도로 아름답게만 느껴졌다. 미치도록 갖고 싶을 정도로.
그래. 정령신의 문제는 천천히 생각하자. 지금 혼자 머리 싸맨다고 답이 나올 것도 아니잖아.
지금은 아리아나만 생각하자. 아리아나에게 마음의 문을 열 기회를 줘보는 거다.
“아리아나.”
“네.”
“저 안아주세요.”
‘안아주시면 안 될까요?’ 하고 물으려다가 남자답지 못한 것 같아서 시원하게 뱉어버렸다.
아리아나는 흔들림이 없었다. 표정이 없으니 감정도 생각도 읽을 수가 없다.
아주 짧은 침묵이었지만, 서유림에게는 길게 느껴졌다. 잔잔한 호수에 돌을 던진 꼴이 되었으니까.
서유림이 그 무게감을 자신의 조용한 목소리로 흔들었다.
“······첫날밤에 그랬던 것처럼.”
침묵이 다시 이어졌다.
다시 무게감이 느껴질 즈음에야 아리아나가 입술을 움직였다.
“거기에서 멈출 것 아니잖아요.”
가슴이 뜨끔했다. 꺼져가는 모닥불만큼이나 조용한 목소리였지만, 서유림에게는 큰 목소리였다.
“점점 더 큰 걸 원할 거잖아요.”
말해 무엇 할까?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게 사람의 욕심인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자꾸만 더 자극적인 걸 찾아서 파고들겠지. 그리고 결국에는 아리아나의 순결을 원하겠지.
아니. 사실은 지금도 원하고 있다. 다만 열을 세기 위해서는 하나, 둘, 셋을 거쳐야 하는 것처럼 단계를 밟아가고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부끄럽지 않았다.
건강한 남자인 이상 당연한 건데 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다.
“그러겠죠. 나도 남자니까.”
“그러면 안 돼요. 저는 정령신의 후보로 태어난 몸. 순결을 빼앗기면 잠재력을 모두 빼앗기고, 자격도 잃게 돼요.”
서유림의 가슴이 다시 한 번 뜨끔했다.
조금 전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미안함이랄까?
이제 봤더니 아리아나를 갖는다는 것은 그녀의 잠재력을 빼앗는다는 의미였다. 그런 것도 모르고 그녀를 갖고 싶다는 식의 이야기를 했으니.
이 얼마나 큰 결례인가?
“그럼 마족이 아라이나를 노리는 것도······?”
“맞아요. 제 순결을 짓밟는 거죠. 제 생명에너지도 빼앗을 거고요. 그러면 저는 껍데기 같은 몸만 남겨지고, 그나마도 마침내는 마물들의 먹이가 되겠죠.”
그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할 것까지는 없는데.
자신의 순결을 가질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는 식의 일침 같았다.
만약 그런 의도로 한 이야기였다면 효과는 확실했다. 아리아나를 갖고 싶다는 마음이 쏙 들어갔으니까.
“저는 그런 존재입니다. 정령신의 자리를 두고 경쟁하는 수많은 후보들 중 하나. 저를 좋아할수록 유림씨 마음만 아파질 거예요.”
“그랬군요. 몰랐습니다. 죄송해요.”
더는 아리아나의 얼굴을 감상할 마음이 사라졌다. 괜히 마족과 똑같은 놈으로 취급당할 것 같았다.
서유림이 바로 누웠다. 그리고는 아리아나가 수면마법을 사용해주기를 기다렸다.
마법 저항력?
그런 것은 애초에 사용할 마음도 없었다. 서유림이 갖고 싶은 것은 아리아나의 몸뚱이가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함께한 온전한 아리아나 그 자체였으니까.
살며시 졸음이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