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
특별하지 않은, 하지만 특별한 (1)
“고블린 퀸?”
그게 뭐지?
혹시 뿔 달린 놈을 말하는 건가?
그건 아닌 것 같다. 뿔 달린 고블린을 사냥했다는 말은 이미 했잖아. 그런데 따로 묻는 것을 보면 전혀 다른 놈이겠지.
아! 생각난다. 뭔지 알 것 같다.
처음 요정의 샘물을 발견했을 때 그 자리에서 유독 생김이 다른 놈이 있었다.
“혹시 몸이 알록달록하게 생겼나요?”
서유림의 물음에 아리아나가 예쁜 입술을 살짝 벌리며 작은 소리를 흘렸다.
“······아!”
그놈이······ 아니, ‘퀸’이라고 했으니 그년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맞는 모양이군!
“앞으로는 그곳에 가지 않는 게 좋겠어요. 고블린 퀸을 사냥한 이상 놈들은 포기하지 않을 거예요.”
잘못 건들긴 한 모양이다.
벌집을 쑤신 꼴이 된 건가?
“고블린 퀸이 그렇게 대단한 존재인가요?”
“고블린 킹은 지독한 사랑꾼이에요. 자신의 짝이 죽으면 목숨을 바쳐서라도 복수하는 놈이죠. 앞으로 더 많은 놈들이 더 지독하게 몰려들 거예요. 위험하니 가지 마세요.”
“하지만 요정의 샘물을 구하려면······.”
“다른 곳을 찾아봐요. 만약 없으면 차라리 은신처를 옮겨요.”
아리아나가 저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걸 보니 고블린 킹이라는 존재가 무척 대단한 모양이다.
하지만 은신처를 옮기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도중에 강력한 마물과 마주칠 수도 있잖아요.”
“그럼 유림씨를 인간계로 보내드릴게요.”
“그럼 아리아나는요?”
아리아나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멈칫한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하는 대답이,
“저 때문에 유림씨를 위험에 빠뜨릴 순 없어요. 어차피 유림씨가 없으면 제가 위험해지는 건 마찬가지에요.”
이보세요. 아리아나양. 그건 나도 마찬가지거든요.
그리고 정령신의 이름으로 한 약속은 어쩌라고? 아리아나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정령신의 저주를 받을 수도 있다며.
자리를 옮긴다고 더 안전하다는 보장도 없고.
웬만하면 이곳에 남는 게 최선이다.
“제가 상대할 수 없는 놈들인가요? 얼마나 대단한 놈들이기에.”
“유림씨 능력치가 얼마나 되죠?”
눈의 초점을 움직여서 망막의 정보를 확인했다.
[레벨 11]
근력 : 188
순발력 : 200
체력 : 168
감각 : 246
그대로 불러주었다.
아리아나가 듯 ‘음······.’ 하는 소리를 내며 상황을 그려보듯 허공을 응시했다.
“아무래도 위험할 것 같아요. 매번 운이 좋을 수는 없잖아요. 안전한 곳으로 옮기는 게 좋겠어요.”
서유림이 아리아나의 말을 곱씹어보았다.
절대적으로 승산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혹시 모를 위험을 피하자는 차원이었다.
“혹시 뿔 고블린보다 더 센 놈들도 있나요?”
“고블린 킹 외에는 없어요. 하지만 고블린 킹이 뿔 고블린을 여러 마리 보낼 수도 있어요. 어쩌면 고블린 킹이 직접 나타날 수도 있고요.”
그래? 그럼 이야기가 달라지지.
“오히려 잘 됐군요.”
아리아나가 조금 불안한 표정을 했다.
“뭐가요?”
“이참에 레벨 좀 화끈하게 올려보죠. 은신처 옮길 필요 없어요.”
“굳이 목숨을 걸 이유가 없어요.”
무모하게 목숨을 건 게 아니란다. 통박 굴릴 거 다 굴려서 결정한 거린다.
서유림이 오늘 고전한 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였다.
첫째는 물론 놈들의 매복에 걸린 거다. 그것만 아니었다면 그렇게까지 위험한 상황에 처하지는 않았을 거다.
여차하면 그냥 달아나도 됐었다. 숲 고블린은 물론이고 뿔 고블린보다도 훨씬 빨리 뛸 수 있으니까.
둘째는 경험의 부족이다.
서유림이 정령계에서 보낸 시간은 오늘까지 포함해서 겨우 나흘. 마물을 사냥해본 경험이 아직은 턱도 없이 부족하다. 게다가 뿔 고블린은 오늘 처음 상대해본 놈이 아닌가?
레벨업으로 스텟도 제법 올랐으니 내일 다시 맞붙는다면 결과는 크게 달라질 것이다.
무엇보다도 고블린은 서유림이 상대할 수 있는 가장 만만한 마물이다. 어디에서 이토록 많은 사냥감을 구할 수 있겠는가?
자리를 옮기면 더 위험한 마물을 만날 수도 있다.
“매복에만 걸리지 않으면 돼요. 절 믿으세요.”
“하지만······.”
“걱정하지 말라니까요. 배고파요. 이거나 익혀줘요.”
서유림이 가일크랩을 내밀었다.
이곳은 주변에 고블린뿐만 아니라 가일크랩도 많아서 임시거처로 삼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아리아나가 붉고 예쁜 입술을 작게 오므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는 마법을 사용해서 가일크랩을 익혔다.
함께 허기진 배를 채웠다.
밖은 이미 완벽한 어둠이었다. 작게 피워놓은 모닥불이 아니었다면 동굴 안은 암흑 그 자체였을 것이다.
아리아나는 여전히 몸이 안 좋은 듯 식사를 마치자마자 자리에 누웠고, 서유림은 옆에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고블린 퀸과 고블린 킹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떤 특성이 있는지, 어떤 약점이 있는지, 무엇을 조심해야 하는지 등이었다. 아리아나의 경험은 서유림에게는 큰 재산이었다.
하지만 서유림의 마음은 이미 한참 전부터 콩밭에 가있었다. 아리아나가 누워있는 모습을 보니 더욱 그랬다.
이제 밤도 깊었으니 슬슬 잘 준비를 해볼까?
“하암! 피곤하네!”
서유림이 나오지도 않는 하품을 억지로 짜냈다.
하지만 순진한 아리아나는 쉽게 걸려들었다.
“피곤하실 텐데 일찍 자요.”
“그럴까요? 그런데 어디에서 자나?”
아, 이번에는 좀 속보였다. 뻔한 걸 왜 묻고 그랬을까? 그냥 슬쩍 아리아나 곁에 누우면 될 걸.
“이쪽으로 오세요.”
“그럴까요? 허험!”
서유림이 침대를 바짝 붙이고 아리아나 옆에 누웠다. 당연히 몸을 옆으로 돌려 세워서 시선을 아리아나에게 향했다.
아리아나도 이쪽을 바라보며 누우면 좋겠는데.
그런데 모닥불에 살짝 드러난 아리아나의 표정이 조금 딱딱했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듯했다.
누워서 얘기하는 맛도 좋겠지.
“무슨 생각해요?”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이상해요.”
“뭐가요?”
“유림씨는 제 정령의 계약자에요. 오늘 그런 위험을 겪었다면, 제가 당연히 느꼈어야 해요. 그런데 전혀 느끼지 못했어요. 이건 정령이나 제 힘이 약한 것과는 조금 다른 문제 같아요.”
뭐지? 그냥 소소한 이야기나 나눌까 했는데, 분위기가 조금 사무적으로 변하는 느낌이네.
그렇다고 다른 얘기 하자는 것도 그렇고.
게다가 이건 그냥 흘려보낼 이야기도 아니었다. 정령과 아리아나 사이의 문제를 우회적으로 알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중간에 정령 아리안이 방해만 놓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럼 문제가 뭘까요?”
“아무래도 저와 정령 사이의 연결고리가 끊어진 느낌이에요.”
서유림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건 정령이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었다는 말 아닌가? 통제 불능의 상태가 되었다는 말 같기도 하고.
아마도 후자가 맞을 것이다.
통제 불능의 정령 아리안.
그럼 뭐야? 아리아나가 틀렸다는 얘기야? 정령은 절대적으로 순수한 존재라면서.
“그럼 큰일 아닌가요?”
“걱정하실 건 없어요. 아무리 그래도 정령의 순수함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단지 그 원인이 중요할 뿐이죠.”
뭐야? 사람 들었다 놨다 하는 것도 아니고. 아리아나는 안심하라고 하지만 여전히 가슴이 조마조마하다.
“그럼 원인이 뭘까요?”
“글쎄요. 이건 단순히 제 추측이지만······ 정령신께서 직접 개입하신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면 제가 개입할 여지가 없어지거든요.”
서유림은 순간 눈알이 튀어나오는 줄 알았다.
정령신이 직접 개입해?
겁주는 거야 뭐야?
> 아리안. 정말 그런 거야? 정령신이 직접 개입한 거야?
어! 뭐야? 그냥 말을 씹어버리네. 아리안이 전혀 대답이 없다. 왠지 모르게 무언의 긍정 같은 느낌도 들고.
자꾸 일이 커지는 것 같네.
“정령신이 왜 개입을 해요?”
“만약 제 추측이 맞는다면 정령신의 힘을 인간계에 감추시려는 거겠죠.”
힘을 감춰? 왜? 문답이 오갈수록 궁금증만 더 많아진다.
“어려워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요.”
“저 같은 정령신 후보가 여럿 태어났다는 것은 정령신께서 소멸할 때가 되었다는 뜻이에요. 저희 같은 후보가 각성해서 그 뒤를 잇게 되는 거죠. 그런데 그 과정이 무척 위험해요.”
정령계와 마계는 손바닥과 손등처럼 밀접하게 양립하고 있다. 마족과 마물이 수시로 정령계로 넘어올 수 있는 것도 그런 밀접한 관계 때문이다.
또 하나 특별한 점은 정령계와 마계의 마나 합은 불변이라는 것이다. 즉, 정령계의 마나가 풍성해지면 마계의 마나는 빈약해지고, 반대로 마계가 풍성해지면 정령계가 빈약해진다.
한마디로 제로섬의 관계라고 할까?
정령신과 마신도 마찬가지다.
“정령신이 약해지면 마신은 당연히 강해져요. 그러면 마신이 지금처럼 힘의 균형이 깨진 틈을 노려서 정령신을 직접 공격할 수도 있어요.”
이어질 스토리는 뻔하다.
마신은 정령신의 힘을 흡수하여 더욱 강해지고, 그 힘을 바탕으로 정령계를 지배하는 것이다.
역사 이래로 그런 사건이 많았다고 한다.
반대로 정령신이 마신의 힘을 흡수하여 마계를 지배한 적도 많았고.
“어쩌면······.”
아리아나가 서유림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 때문에 정령신께서 유림씨를 지켜보고 계신지도 모르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