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고블린도 밟으면 OO한다. (1)
“물론이죠. 정령은 마신의 힘으로도 오염시킬 수 없는 순수한 존재에요. 정령을 마음대로 컨트롤할 수 있는 존재는 오직 정령신 뿐이에요. 그러니 믿으셔도 돼요.”
“확실해요?”
“그럼요.”
아리아나가 0.1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만큼 정령이 절대적인 존재라는 뜻이겠지.
그렇다면 안심이다. 정령 아리안이 왜 그런 제안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거야 뭐 내가 선택하기 나름이니까.
그리고 이건 내가 개입할 일이 아닌 것 같다. 내가 개입한다고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난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만 열심히 하면 되는 거다.
그래. 그냥 나를 알고 싶다는 거잖아.
보여주지 뭐. 난 여자가 반항할 힘이 없다고 해서 강제로 취할 놈이 아니라는 것.
그럼 문제될 게 전혀 없잖아.
서유림이 화제를 바꾸었다.
“그런데 제가 이곳을 떠나고 며칠이나 지난 거죠?”
“사흘 지났어요.”
“시간개념을 종잡을 수 없군요. 상식에 맞지 않게 뒤죽박죽인 것 같아요.”
“당연하죠. 차원의 시간에 상식은 존재하지 않아요. 꿈을 꾸면 꿈속 시간과 현실의 시간이 별개로 흐르는 것처럼.”
꿈꾸는 걸 예로 들으니 조금은 이해가 간다. 깜빡 조는 사이에도 제법 긴 꿈을 꾸곤 하니까.
그래도 어렵기는 마찬가지다.
뭐, 굳이 이해할 필요는 없다. 이해한다고 해서 시간을 계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보다 중요한 것은 매일 밤 정령계로 들어오고 싶다는 점이다.
아리아나를 만나기 위해서.
잠재력을 키우기 위해서.
“아리아나. 저를 매일 정령계로 불러줄 수는 없어요?”
서유림의 말에 아리아나가 눈을 크게 뜨며 반색한다.
“그래도 돼요?”
당연하지. 내가 지금 부탁하고 있잖아.
“사실 고민 많이 했어요. 유림씨가 귀찮아 할까봐.”
별 걱정을 다 하네. 이래서 대화가 필요한 거라니까.
어쨌건 나를 밀어낼 다른 놈팽이를 구하지 않아서 다행이다.
“전혀 귀찮지 않아요. 오고 싶었다니까요. 그러니까 내가 느껴지건 느껴지지 않건 매일 밤 무조건 불러주세요.”
“알겠어요. 그럼 그렇게 할게요.”
이제야 대화가 통하네.
그럼 지금부터 움직여볼까? 낮에 열심히 일해 줘야 밤에 아리아나한테 생색낼 수 있겠지.
잠재력도 팍팍 끌어올리고.
“요정의 샘물은 얼마나 남아있죠? 더 떠와야 하죠?”
“네. 여기.”
아리아나가 빈 물주머니 두 개를 내놓았다.
“하나만 챙겨갈게요. 내일 또 떠오면 되니까.”
“그렇게 하세요. 그리고 이거 가져가세요.”
와! 이게 뭐야?
서유림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지난번에 서유림이 만들었던 대나무창이었다. 그런데 그 끝에 금속으로 된 창날이 달려있었다.
창날의 길이도 한 뼘이 훨씬 넘었다.
“정령들을 시켜서 만들어봤어요. 사흘을 꼬박 투자했는데도 이 정도밖에는 못 만들겠어요. 힘이 회복되면 좀 더 좋은 걸로 만들어드릴게요.”
조금 조잡스럽긴 했다. 창날이 매끈하지 못하고 거칠기까지 하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위력적일 것 같다. 매끈한 창날보다는 저런 거친 창날이 상처를 더욱 크게 만들 테니까.
게다가 창끝만큼은 무시무시할 정도로 예리하다.
“훌륭해요. 최고인데요. 아주 마음에 들어요.”
“이것도 입어보세요.”
이건 또 뭐야?
“정크의 가죽으로 만들어봤어요. 정크는 가죽이 가벼우면서도 질겨서 방어구의 재료로 좋아요.”
“그건 아리아나 침대에 깔아야 하는 건데.”
“제 잠자리 편한 것보다는 유림씨 안전이 훨씬 더 중요해요.”
감동이다. 말도 어쩜 저렇게 예쁘게 해?
게다가 몸도 좋지 않을 텐데, 나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많은 걸 준비하다니.
감사하는 마음으로 입어보았다.
“딱 맞아요. 편하고. 이렇게 움직이는 데도 전혀 거치적거리지가 않아요.”
서유림이 정크의 가죽옷을 입고는 온몸을 사방으로 움직여보았다.
“다행이에요.”
아리아나도 활짝 웃었다.
지금까지 보았던 웃음 중에서 이번이 가장 밝은 것 같다. 그래서인지 그 웃음이 너무도 사랑스럽다.
미친 척하고 고마움의 표시로 키스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로.
“이것도 가져가세요.”
아리아나가 단검과 요정의 망토를 내어준다. 헛생각 말고 빨리 나가서 물이나 떠오라는 것 같다. 물론 서유림 혼자 생각이다.
서유림이 단검과 망토를 받아들고 일어섰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히 다녀오세요.”
저렇게 인사해주니 아리아나가 서방님 배웅하는 새색시처럼 느껴진다.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동굴 밖으로 나왔다.
아직 해도 뜨지 않은 새벽이다. 하지만 사위는 이미 밝아있다.
그래서인지 청량감이 최고치다. 절로 깊은 심호흡을 하게 만든다.
후우웁! 하아~.
숲의 청량감이 가슴을 터뜨릴 듯 부풀렸다가 온몸의 노폐물을 쓸어 담아 터져 나오는 듯하다. 단지 숨 쉬는 것만으로도 몸이 정화되는 느낌이다.
가보자!
서유림이 요정의 샘물을 향해 뛰었다. 한층 업그레이드된 대나무창을 들고 있으니 천하무적이 된 느낌이다.
빨리 고블린 같은 마물을 사냥해보고 싶다.
‘차라리 고블린을 찾아 나설까? 주변 지형도 익혀둘 겸.’
그게 좋겠다.
그런데 혹시 정령 아리안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아리안! 내가 지나온 길을 기억할 수 있어?’
> 네, 기억할 수 있습니다.
혹시나 해서 물어본 건데 뜻밖에 큰 수확이다.
그렇다고 아리안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진 않을 것이다. 서유림도 주변 지형을 머릿속에 담아가며 움직였다.
‘앗! 저기 있다.’
고블린의 무리다. 다섯 마리다.
설레는 마음으로 달려들었다.
사냥은 싱거울 정도로 순식간이었다. 역시 무기가 업그레이드된 게 컸다.
욕심이 났다. 좀 더 많은 고블린과 마주쳤으면 좋겠다.
다시 달렸다.
주변에 고블린 무리가 제법 있었다. 요정의 샘물 인근에 도착할 때까지 여섯 무리를 만나서 사냥했다.
한 무리 당 평균 대여섯 마리였다.
덕분에 짧은 시간에 2레벨이나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좀 더 강하고 많은 무리를 상대하고 싶었다. 그래야 레벨을 쭉쭉 올릴 수 있을 테니까.
띄엄띄엄 말고 한꺼번에 좀 나와라. 화끈하게!
그 말을 들은 것일까? 요정의 샘물 인근에 제법 많은 수의 고블린 무리가 보였다. 대충 눈에 보이는 수만 10마리가 훨씬 넘었다.
숲이 제법 우거진 곳이라서 더 많은 고블린이 숨어있을 수도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제 고블린 따위는 전혀 위협이 되지 않는다. 움직임이 워낙 느려서 뒤로 물러서면서 각개격파하면 백 마리가 모여 있어도 가볍게 상대할 자산이 있다.
서유림은 다짜고짜 고블린의 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고블린도 포악한 성깔을 드러냈다. 조그마한 놈이 겁도 없이 마구 달려든다. 그래봤자 아장아장 움직이는 게 전부지만.
‘그래, 좋아! 어서 와라. 내 잠재력 먹이들아!’
대나무창을 거침없이 뻗었다.
한 번 내지를 때마다 고블린이 한 마리씩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무기가 워낙 좋으니 원 샷 원 킬이다.
역시 숲에도 여러 마리가 있었다. 고블린 무리가 생각보다 훨씬 컸다. 30마리는 되는 듯했다.
덩치가 무척 큰 놈도 있었다. 고블린 대장쯤 되는 놈인 듯했다.
오히려 고마운 일이다. 이놈들을 다 해치우고 나면 레벨이 또 오를 테니까. 대나무창을 신들린 듯 찔러대며 미친 듯이 사냥했다.
그런데 그때였다. 등 뒤에서 갑자기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다. 마치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는 듯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내내 잠잠했던 정령 아리안이 다급히 경고했다.
말할 틈도 없는지 소름끼치는 전율로 의사를 전달했다.
그래도 뜻은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뒤를 조심하세요. 위험해요!]
그와 동시에 뒤쪽에서 바람이 거칠게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슈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