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오늘부터 네가 호구 (3)
한동민이 짜증을 냈다.
원래 저런 놈이니 이젠 그러려니 했다.
“대리님, 저랑 계약하셨잖아요. 주먹이 운다.”
한동민이 움찔했다. 깜빡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냥 없던 일로 할까요?”
서유림이 슬쩍 자신 없는 표정을 했다.
그러자 한동민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게 무슨 소리야? 계약서까지 작성해놓고는. 자신 없으면 3천만 원 내놓던가.”
“자신이야 있죠. 체육관 1년만 다니면 그런 애들 다 한 주먹이라니까요. 근데 시간을 못 내잖습니까. 오늘만 해도 보세요. 강은영씨 업무 도와줘야 하잖아요. 대리님이 제 야근 막아주시지 못하면, 오히려 대리님이 저한테 3천만 원 주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냥 계약서 찢죠.”
“헛소리 하지 마.”
작전 성공.
네가 그렇게 쉽게 포기할 놈이 아니지.
어떻게든 나에게 빅엿 먹이고 싶겠지. 어렵게 만든 기회를 그리 쉽게 버리진 못하겠지.
덕분에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라벨지 수정하는 거는 오 주임이 좀 도와줘요.”
오영훈이 깜짝 놀라서 고개를 번쩍 들었다.
놀라긴 뭘 놀라고 그래? 정말로 이런 상황을 예상 못했던 거야? 너 같은 잔머리 대마왕이?
하긴, 서유림이 정말로 칼퇴근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겠지.
하지만 이젠 알겠지? 상황이 앞으로 어떻게 돌아가게 될지.
서유림의 칼퇴근은 오늘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한동민과의 내기가 끝날 때까지 매일 계속될 것이다.
누군가는 남아서 잔무를 처리해야 할 것이고.
잔무처리반 전담이었던 서유림은 퇴장하시고.
그럼 과연 서유림을 대신할 잔무처리반은 누가 될까?
한동민의 정부(情婦)인 강은영이?
한동민이 미래의 정부로 찍은 권진아가?
비록 나이는 적지만, 입사는 오영훈보다 더 빠른 나영미 주임이?
매일 창고 업무만 해서 컴퓨터 앞에서는 갑자기 독수리가 되어버리는 컴맹 강철중이?
오영훈 정도의 머리라면 벌써 답이 나왔겠지. 앞으로 시도 때도 없이 야근하게 될 거라는 답!
‘후훗, 당분간 고생 좀 해야겠구나.’
“서유림씨는 강성체육관으로 가봐. 오늘부터 훈련할 수 있도록 전화해놓을 테니까. 됐지?”
“진짜 하시게요? 농담 아니었어요?”
“내가 당신하고 농담 할 군번이야? 야근수당은 당연히 없는 것 알지?”
역시 단순한 놈이라니까. 조금만 자극해줘도 발라당 뒤집어진다.
“당연하죠. 제가 도둑놈입니까? 야근도 안 하고 야근수당 받게.”
서유림은 말끝에 ‘누구처럼’이라는 단어는 뺐다. 바로 눈앞에 있는 사람이 그런 식으로 돈을 불려 받고 있으니까.
누구냐고? 뻔하지. 한동민과 아삼륙인 놈들.
팀장, 오영훈, 강은영.
이 정도 말했으면 찔리는 게 있어서 움찔이라도 해야 하는데, 전혀 반응이 없네. 뻔뻔하기는.
한동민이 서유림을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약속이 있는지 서둘러 사무실을 나섰다.
“죄송합니다. 대리님과 내기 때문에······. 저도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다들 서유림을 바라보는 눈이 곱지 않다. 특히 오영훈.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잊었어? 난 이제 누구의 눈치도 안 본다니까.
서유림이 해맑게 웃으며 팀원들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파이팅!”
‘저런 미친!’
‘파이팅이래.’
‘머리가 어떻게 된 게 분명해.’
팀원들이 다들 멍한 표정을 했다. 하지만 서유림은 어느새 사무실 밖으로 사라진 뒤였다.
쩝.쩝. 게걸게걸.
벌써 세 접시 째다. 몸이 좋아진 후부터는 식사량이 엄청나게 늘었다. 게다가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파졌다.
서유림은 긍정적인 신호로 생각했다. 그만큼 몸이 빠르게 좋아지고 있는 것이리라.
정령 아리안이 있으니 소화불량 염려도 없고.
실제로 너무 많이 먹어서 속이 부대낀 적도 없다.
“아, 잘 먹었다!”
역시 뷔페를 먹어야 양껏 먹을 수 있다. 비록 9,900원밖에 안 하는 값싼 뷔페지만, 맛도 나쁘지 않다.
그럼 강성체육관으로 가볼까?
인터넷으로 위치는 파악해두었다. 명진식품에서 약 3km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천천히 걸어갔다. 강성체육관에 도착하고 나니 운동하기 딱 좋을 정도로 소화되어있다.
서유림이 체육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우렁찬 인사말과 함께.
“안녕하세요. 서유림이라고 합니다.”
“아, 명진식품! 반갑습니다. 이철민입니다. 여기 관장입니다.”
곰돌이 푸우처럼 푸근하게 생긴 중년인이다. 체육관 관장으로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
“그런데 이런 운동 해보신 적 있습니까?”
“아뇨. 처음입니다.”
운동은커녕 이런 곳에 들어와본 것 자체가 처음이다.
그런데 참 마음에 든다. 사람들이 하나같이 열심히들 운동한다.
맹모삼천지교라지 않던가? 뭐든 주변 분위기가 중요한 법. 저런 사람들과 함께 운동하면 실력도 쑥쑥 오를 것 같다.
“그럼 다른 운동은······.”
“전혀 없습니다.”
문답이 오갈수록 관장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주먹이 운다에 나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것도 바로 한 달 후의 예선부터.”
“맞습니다. 어차피 목표는 내년도 예선이니까 시간은 충분합니다.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되겠죠, 뭐.”
서유림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관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시간이 충분하다는 말을 들을 때는 작게나마 헛숨까지 내쉬었다.
하긴 무슨 상관이랴. 운동도 본인의 의지로 하는 것이고, 시합도 본인의 의지로 뛰는 건다. 주먹이 운다. 예선 통과 못 한다고 체육관비 물어내라는 것도 아니고.
관장은 그저 가르쳐주기만 하면 되는 일이다.
하지만 서유림이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하자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아까보다 훨씬 더.
서유림의 저주받은 체력과 근력을 직접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저게 할아버지 몸이냐, 할머니 몸이냐 싶겠지.
그렇다고 보는 앞에서 한숨 내쉬는 건 좀 아니잖아? 어제는 이것보다 훨씬 더 엉망이었다고. 이건 엄청나게 발전한 거라니까.
물론 이해는 간다. 정령 아리안 덕분에 서유림의 몸이 빠르게 좋아지고는 있지만, 워낙에 엉망이었던 몸이라서 아직은 한심스러운 수준을 못 벗어난 상태이니까.
하지만 딱 한 달만 두고 보자고. 아니, 한 달도 필요 없다. 보름 안에 여기 있는 사람들 체력으로 따라잡아 보이겠다.
서유림이 이를 악물었다.
하악. 하악.
체육관에서 집까지는 대략 7km. 그 먼 거리를 계속해서 뛰었다.
체력은 아까부터 바닥이었다.
하지만 몸은 아직 만족하지 못했다. 여전히 운동에 대한 갈증을 느꼈다. 뛰고 또 뛰었다.
비로소 집 앞에 도착했다. 당장에라도 쓰러질 것처럼 다리가 후들거린다.
휴대폰을 열어서 시각을 확인했다.
자정을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와! 그렇게 열심히 뛰었는데, 한 시간이 넘게 걸렸네.’
신호등 때문에 시간이 지체되었다고 하지만, 자신의 체력이 얼마나 한심한 수준인지를 알 것 같다.
하지만 내일은 다를 것이다. 그리고 모레는 또 다를 것이고, 일주일 후는 또 다를 것이다.
서유림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한 달 안에 30분으로 끊는다.
집에 들어가서 씻자마자 잠을 청했다.
잠자리에 눕자 문득 아리아나가 생각났다.
옆으로 몸을 돌렸을 때 아리아나의 예쁜 얼굴이 보이면 얼마나 좋을까?
서유림을 꼭 안아주던 아리아나의 품이 그립다.
아, 이런! 내가 이런 생각을 하면 아리아나가 적나라하게 느낄 텐데. 쪽팔리게.
하지만 숨길 게 뭐야? 당연한 본능인데.
그런데 아리아나는 내 생각을 조금도 안 하나? 왜 전혀 안 느껴지지?
역시 혼자 헛물켜고 있었던 건가?
아쉽다. 아리아나는 언제쯤 날 불러줄까?
아리아나 생각이 간절했다.
그런데 갑자기 정령 아리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리아나를 원하세요? 제가 유림씨에게 기회를 드릴까요?
서유림이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아리안의 말이 너무 의미심장해서 잠이 확 달아나는 느낌이다.
‘기회라니? 무슨 기회?’
> 아리아나의 순결을 가질 수 있는 기회!
서유림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했는데 정말 그걸 의미하는 거였다니.
그 자체도 놀라운 소식이지만 더욱 놀라운 것은 아리안이다.
아리안은 아리아나의 정령 아닌가? 그런데 아리아나의 순결을 가질 기회를 준다니?
이거 배신 아냐?
배신이 문제가 아니다. 가치관이 문제다.
아리아나의 순결은 아리아나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설령 아리아나가 반항할 힘이 없다고 해도 말이다.
그런데 가질 기회를 주다니.
갑자기 기분이 팍 상하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그럼 나보고 아리아나를 강간이라도 하라는 거야?’
> 순결을 빼앗으라고 한 적은 없습니다. 기회를 주는 것은 제 능력이고,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하느냐 하는 것은 유림씨의 선택이죠.
말을 살짝 돌리는 느낌이네.
일단 한 번 들어나 보자.
‘어떻게 기회를 주겠다는 거지?’
> 하루 동안 모든 마법으로부터의 저항력을 드릴 수 있어요. 수면마법을 포함한 아리아나의 모든 마법도 포함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