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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미친 잠재력-20화 (20/196)

# 20

오늘부터 네가 호구 (2)

“예압!”

서유림이 마치 군기 바짝 든 신병처럼 힘차게 대답했다. 마치 평소보다 열 배 이상 기분이 업 된 사람 같았다.

그럴수록 구매팀 직원들의 눈빛은 불안해졌다.

‘이상해. 진짜 이상해졌어.’

‘괜히 부딪치지 말자. 잘못하다 더러운 꼴 당할 수 있다.’

물론 서유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갑자기 눈치가 0으로 변한 사람 같았다.

정신이 반쯤 나간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남 신경 안 쓰고 자기만 신경 쓰기.

창피한 줄도 모르고.

분위기 파악은 더 못하고.

서유림의 작전이었다.

이제부터 쭈욱 그렇게 살 것이다.

남의 눈치를 왜 봐? 분위기가 개판이 되건 말건, 사람들이 눈치를 주건 말건, 나만 내 할 일 열심히 하고 떳떳하게 살면 되잖아?

누구는 처음부터 호구였고, 누구는 처음부터 마초였나?

나도 이제는 이런 사람으로 살아갈 테니까 알아서들 맞추셔. 내가 지금까지 많이 맞춰줬잖아.

서유림이 서둘러 단가 산출을 시작했다.

물론 이미 끝내놓은 모닝죽에 대한 단가는 아니었다. 이번 주 금요일까지가 기한인 즉석카레 신제품에 대한 적정단가였다.

서유림이 맡은 업무가 워낙 다양하다보니 언제 어떤 일이 생길지 모른다. 게다가 업무 외 잡일은 또 왜 그리 많은지.

그러니 이런 일은 미리미리 끝내놓아야 마음이 편하다.

‘가만있어보자. 일단 BOM부터 훑어볼까?’

서유림이 단가산출을 위한 기초자료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하다. 글자 하나하나가 지나칠 정도로 선명하다.

시력이 갑자기 좋아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서유림이 다른 것은 다 나빠도 시력과 청력은 원래부터 좋았으니까.

게다가 이건 눈이 좋은 것과는 느낌이 다르다. 단순히 잘 보이는 게 아니라 뇌리에 쏙쏙 박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집중이 너무도 잘 됐다. 머릿속이 너무 맑아서 웬만한 계산은 암산으로 끝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이것도 아리안 덕분이구나!’

정령 아리안은 서유림의 몸 상태를 최상으로 만들어준다고 했다.

그 ‘몸 상태’에는 뇌도 포함될 것이다. 그것 역시 신체의 일부분이니까.

그래서 머릿속이 이토록 맑고 정연한 것이겠지.

‘맞지 아리안? 아리안이 내 머릿속까지 깔끔하게 정리해준 거지?’

> 맞아요, 유림씨!

‘역시. 후훗!’

정령의 힘은 생각보다 훨씬 대단했다. 정령 아리안과 함께라면 정말이지 못할 게 없을 것 같았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서유림씨. 뭐 하고 있어? 아직도 못 끝냈어?”

한동민이 또 목소리를 높였다. 30분마다 저러고 있다.

서유림이 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진짜 빨리 끝내고 강은영씨 도와주려고 했는데요. 이게 서두르니까 더 안 되네요. 중간에 계산이 꼬여서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합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지? 네가 하도 독촉하고 지랄해서 업무가 꼬였다 이 말씀이다. 이 셰퍼드 같은 놈아.

“내가 오전까지 끝내라고 했잖아.”

백날 짖어봐라. 네 목이 아프지 내 목이 아프냐? 왈왈.

“제가 이거 끝내고 밤을 새서라도 완성하겠습니다. 강은영씨. 걱정하지 마. 나만 믿어. 일단 최대한 수정하고 있어봐. 내가 끝내고 도와줄게.”

“······예.”

강은영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서유림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조심스러움이 가득했다.

“아, 진짜 짜증나네.”

한동민이 들고 있던 서류철을 내팽개치듯 책상위에 집어던졌다. 다들 찍소리도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류철 떨어지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사무실 분위기가 개판 5분전이었다.

아니, 이 정도면 완벽한 개판이지. 시베리아도 이곳보다는 따뜻할 거다. 다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한동민의 눈치만 보았다.

바짝 얼어붙었다.

예전이었다면 서유림도 그랬을 것이다. 아마 다른 팀원들보다 열 배는 더 가슴 졸였겠지.

그런데 지금은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오히려 한동민 뿔내는 모습 지켜보는 게 재미있었다. 통쾌하다고 해야 할까?

직원들 바짝 움츠리는 모습도 재미있고, 일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기대도 되었다.

자신감 때문인 듯했다.

제깟 놈이 제아무리 날뛰어도 날 쉽게 해고하지는 못한다는 자신감.

설령 해고당한다 해도 얼마든지 먹고 살 수 있다는, 아니 훨씬 더 잘 먹고 살 수 있다는 자신감.

그러니 한동민에게도 사무실 분위기에도 위축될 이유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서유림도 위축된 척해주었다. 지금은 한동민과 부딪쳐봤자 득 될 게 전혀 없으니까.

상황은 서유림의 예상대로 흘러갔다.

한동민이 다시 생산팀에 전화를 걸었다.

“내일 아침까지 끝내줄게. 곤란하긴 뭐가 곤란해? 아무튼 그런 줄 알아.”

그래. 네가 할 수 있는 게 그것밖에 더 있겠냐? 대표이사의 아들이라는 위치 이용해서 안 될 일도 되게 하는 것.

“한 대리님. 약속 늦겠어요. 이제 그만 가야죠.”

배기열 팀장이 조심조심 이야기한다. 그래도 명색이 팀장인데, 부하 직원에게 쩔쩔 매는 모습이라고는.

“에이, 짜증나. 가죠.”

배기열과 한동민이 사무실을 나섰다. 따로 점심약속이 있는 듯했다.

한동민이 사무실을 나가자 여기저기에서 막혔던 숨통이 열렸다.

“후우.”

“하아.”

오영훈은 서유림을 슬쩍 노려보기도 했다.

이게 다 너 때문이라는 듯.

하지만 서유림은 전혀 상관하지 않았다.

잊었나? 서유림은 이제부터 눈치 제로의 순수청년이라니까. 분위기 파악 같은 건 전혀 못 한다니까.

그래도 모르겠어?

그럼 좀 더 확실하게 보여주지.

한동민이 완전히 사라지자 서유림이 벌떡 일어섰다. 해맑은 표정으로.

“밥 먹으러 가죠. 아, 배고파 죽겠네.”

“넌 이 시점에 밥 생각이 나냐?”

오영훈이 쏘듯 말했다.

하지만 서유림은 전혀 쏘이지 않았다. 천진난만함과 순진무구함이 모든 공격을 튕겨내는 듯했다.

“오 주임님은 배 안 고파요? 아침 든든히 드셨나 보네. 나 주임님, 식사하러 가죠. 든든히 먹어야 오후에 또 열심히 일하죠.”

나영미 주임이 한숨을 내쉬며 일어섰다.

“그래요. 밥은 먹어야죠. 가요.”

그렇게 남은 팀원들끼리 구내식당으로 향했다.

서유림은 식판 가득 음식을 담았다. 밥도 듬뿍, 반찬도 듬뿍.

웬만한 사람 두 명이 충분히 먹고도 남을 양이었다.

권진아가 입을 떡 벌렸다.

“그걸 혼자 다 드시려고요?”

“당연하지. 왜? 이거 같이 먹고 싶어? 좀 줄까?”

“하하, 아니에요.”

권진아가 배시시 웃었다. 그런 농담 재미있다는 듯.

하지만 서유림은 농담이 아니었다. 아니, 아닌 척했다. 계란 장조림 하나를 권진아에게 통째로 넘겨주었다.

“이건 권진아씨 먹어.”

“아, 아니요.”

권진아가 깜짝 놀라서 사양했다.

하지만 서유림이 이겼다. 막무가내 똘끼 대장을 누가 이겨?

“권진아씨니까 주는 거야. 괜찮아. 먹어.”

권진아가 더는 사양하지 못하고 두려운 눈빛으로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맙소사! 농담이 아니었어!’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른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저게 진담이었다니. 대체 어디까지가 농담이고, 어디까지가 진담인 거야?

도저히 구분이 되지 않았다.

‘괜히 엮이지 말자.’

우걱우걱. 게걸게걸.

수십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식사하는데, 유독 서유림의 식사모습만 눈에 들어온다. 걸신이 들린 것도 아니고.

똑같은 밥이고 똑같은 반찬인데.

그렇게 맛있나? 에이, 평범한데.

다들 식사하는 내내 서유림을 흘끔흘끔 바라본다.

“근데 은영씨.”

서유림이 식사를 거의 마칠 무렵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강은영이 깜짝 놀라서 어깨를 움찔했다.

“네?”

“라벨지 수정작업 그거 잘해야 해. 유럽 규정이 까다롭게 변해서 자칫 잘못하면 통관에서 문제되고, 벌금이라도 맞으면 반품이 문제가 아니야. 손해배상청구 당할 수도 있어.”

강은영도 잘 아는 문제다. 라벨지와 관련된 것은 모두가 강은영의 고유 업무이니까.

“그러니까 든든하게 먹어. 그래야 힘내서 일도 잘하지.”

강은영이 멍한 표정을 했다.

그게 왜 갑자기 먹는 것으로 연결되는데?

“오 주임님도 많이 드세요. 잘 먹어야 열심히 일하죠.”

“남 걱정은 말고, 서유림씨나 많이 드셔.”

오영훈이 다시 쏘듯 이야기했다.

후훗, 오영훈은 아직도 상황파악이 잘 안 되는 모양이다. 오늘부터 다가올 자신의 미래를 전혀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하다.

뭐, 닥쳐보면 알겠지.

‘먹어둘 수 있을 때 잘 먹어라. 오늘부터 야근하려면 체력이 필요할 테니까. 후훗.’

오후.

구매팀 사무실에는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한동민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으니 다들 숨소리도 제대로 내지 못했다.

특히 강은영이 그랬다.

누구나 그렇지만 맡은 업무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강은영도 라벨지 수정작업이 업무의 전부가 아니다. 그건 오히려 주 업무를 처리하고 남는 시간에 작업하는 곁가지 업무일 뿐이다.

게다가 아직 업무능력이 떨어져서 일이 매끄럽지 못하다. 시시때때로 들어오는 업무에 정신없이 휘둘릴 수밖에 없다.

그러니 마음은 굴뚝이어도 라벨지 수정작업 할 시간을 전혀 낼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시간은 매정할 정도로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퇴근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후아, 드디어 끝냈다!”

서유림이 물속에서 방금 빠져나온 사람처럼 거친 숨을 토해냈다. 얼른 배기열 팀장에게 적정단가 보고서를 보여주었다.

한동민도 반가운 표정을 했다.

“그럼 그건 팀장님께서 결재 진행해주시면 되겠네요.”

“그러지. 다녀올게.”

배기열 팀장이 빠릿빠릿하게 움직였다. 자칫 시간을 지체했다가는 한동민의 서릿발이 자신의 머리에도 내려앉을 테니까.

“서유림씨는 어서 라벨지 수정 도와줘! 밤을 새서라도 책임지고 끝내! 알겠어?”

대체 누가 팀장이고, 누가 대리인지.

게다가 그놈의 라벨지. 라벨지. 꿈에서도 환청으로 들리겠다.

그런다고 내가 도와줄 것 같으냐?

“알겠습니다.”

서유림이 자리에 앉아서 새롭게 파일을 열었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벌떡 일어섰다.

“아 맞다! 깜빡 잊고 있었네!”

“또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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