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오늘부터 네가 호구 (1)
다음날 아침.
‘아, 개운해!’
어제 선녀계곡에서도 그렇고, 오늘 집에서도 그렇고, 컨디션이 이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어제 무리하게 운동한 후유증도 없었다.
안 하던 운동을 갑자기 하면 근육통으로 고생해야 정상인데 정령 아리안 덕분에 그런 통증이 전혀 없었다.
무엇보다도 만성피로가 말끔하게 가셨다.
전에는 거짓말 조금 보태서 하루 24시간 365일 늘 몸이 무겁고 찌뿌드드했는데, 지금은 온몸이 팽팽하게 당겨진 고무줄처럼 쌩쌩하다.
그뿐이랴? 지긋지긋했던 과민성대장증후군, 불면증, 코골이도 모두 사라졌다. 말 그대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벽하게 리셋된 것이다.
일시적인 현상이 아니다. 정령 아리안이 이렇게 만들어준 것이다. 앞으로 계속 이런 쌩쌩한 몸으로 살 수 있게 된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했다.
‘그런데 밖이 어둡네. 몇 시나 됐지?’
시계를 보았다.
맙소사. 새벽 다섯 시다. 겨우 네 시간 잤다.
그런데 이렇게 개운해?
원래는 두 시간 정도 더 자야 정상인데, 너무 개운해서 누워도 잠이 안 올 것 같다. 오히려 몸이 근질근질해서 가만히 앉아있을 수가 없다.
‘그렇다면······.’
살며시 밖으로 나갔다.
아직 아무도 일어나지 않았다. 소리 나지 않도록 조심조심 나가서 다시 마음껏 몸을 혹사시켰다. 겨우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어제보다 힘도 세지고 민첩성도 좋아진 느낌이다.
행복에 겨워서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까짓 못 지를 게 뭐가 있어? 남들은 주택가에서도 잘만 지르고 다니던데.
여긴 주택가도 아니잖아.
지금까지 너무 참기만 했다. 더는 참으면서 살고 싶지 않았다. 욕구가 생기면 마음껏 분출하며 살고 싶었다.
“이야~ 하하하!”
힘껏 소리 질렀다. 가슴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던 무엇인가가 그 고함소리와 웃음소리에 섞여서 시원하게 뿜어지는 듯했다.
명진식품, 구매팀.
한동민이 가장 늦게 출근했다. 그래도 오늘은 출근시간은 지켰다.
“안녕하십니까!”
“깜짝이야!”
한동민이 몸을 움찔하며 서유림을 바라보았다.
‘여기가 쌍팔년도 군대도 아닌데 아침인사를 왜 저렇게 박력 있게 하고 그래? 다른 사람도 아닌 서유림이. 하여튼 좀 이상해졌다니까.’
한동민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다른 팀원들을 바라보니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듯했다. 다들 서유림을 흘끔흘끔 곁눈질로 살펴보고 있다.
그런데도 서유림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이다. 출근하다 돈다발이라도 주웠나?
“서유림씨. 내가 지시한 건 해놨어?”
“넵! 금요일에 완전히 끝내놓고 갔습니다.”
서유림의 목소리가 사무실을 쩌렁쩌렁 울렸다. 마치 몸만 서유림이고 영혼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뀐 듯했다.
“그 파일, 강은영씨한테 메일로 보내.”
“예압!”
서유림이 힘차게 대답했다.
예상하고 있었던 지시다. 한동민이 출근하자마자 그것부터 지시할 줄 알았다.
그런데 어떻게 수고했다는 말 한 마디 안 하냐?
강은영이 너도 그래. 너라도 ‘감사합니다.’ 한 마디 정도는 해야지.
이런 연놈들을 대체 왜 도와줘야 하는데?
서유림이 속으로 투덜거리며 컴퓨터를 뒤적뒤적했다. 그러다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어! 이게 어디 갔지?”
한동민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강은영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서유림은 한동민이나 강은영에게는 관심도 두지 않았다. 계속 혼자 허둥대기만 했다.
“없어요. 없어. 누가 내 컴퓨터 만졌나요?”
“뭐가 없다는 거야?”
“라벨지 작업한 파일이요. 분명 작업 폴더에 저장해놨는데. 이게 어디 갔지? 파일명으로 검색해도 안 나오네.”
한동민이 벌떡 일어섰다.
“잘 찾아봐.”
찾아보긴 뭘 찾아봐? USB에 담아놓고 말끔하게 지웠는데.
너희 같은 연놈들에게는 그만큼 작업한 것도 아깝다.
“어, 이상하네. 어디 갔지?”
“아, 진짜 짜증나게. 은영씨가 앉아서 찾아봐.”
서유림이 자리를 양보해주었다. 강은영이 대신 앉아서 파일을 찾아보았다.
백날 찾아봐라. 그런다고 없는 게 나올 것 같으냐?
그래도 계속 찾는 시늉은 했다.
“여기 있어야 하는데. 분명 다 완성해서 여기에 저장했는데.”
“해놓지도 않고, 거짓말 하는 것 아냐?”
“금요일 근무기록 보세요. 제가 밤 열한 시까지 남아서 확실하게 끝내놓고 퇴근했어요.”
한동민은 그런 면에서는 철두철미한 사람이었다. 정말로 서유림의 금요일 퇴근시간을 확인했다.
감사과로 부서를 옮기면 저승사자로 불리고도 남을 사람이다.
서유림의 말대로 밤 11시에 퇴근시간이 찍혀있었다. 사원카드로 출퇴근시간을 찍기 때문에 속일 수가 없는 일이다.
서유림이 강은영을 바라보며 미안한 표정을 했다.
“은영씨, 정말 미안해요. 은영씨 업무라서 내가 꼭 도와주고 싶었는데. 이거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강은영이 책임져야지. 업무책임자니까.
강은영도 그걸 모르지 않았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한 채 발만 동동 굴렀다.
“어쩌지? 오늘 오전까지 보내주기로 했는데. 아잉, 난 몰라.”
그러게 왜 그렇게 무책임했어? 네 일이면 꼼꼼하게 챙겼어야지. 그런 걸 두고 인과응보라고 하는 거란다.
그런데 한동민이 서유림의 생각을 지우듯 명령조로 이야기했다.
“서유림씨가 책임져. 서유림씨가 도와준다고 해서 그것만 믿고 손을 안 댔던 거잖아.”
저런 황당한 사고방식을 보았나?
하지만 서유림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당연히 그렇게 나올 줄 알았으니까.
“당연히 그래야죠. 근데 어떻게 책임져야 하죠?”
한동민도 그 부분에서는 말문이 막혔다. 업무분장이 명확히 나뉘어있고, 이 일은 사실 서유림과는 무관한 업무다.
그런데 어떻게 책임을 지운단 말인가?
방법은 하나뿐이다.
“내가 기한을 오늘 퇴근 전까지 연기해놓을 테니까 빨리 작성해.”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대리님!”
서유림이 기쁜 표정으로 힘차게 대답했다.
하지만 한동민은 서유림의 그런 말투조차도 귀에 거슬리는 모양이다.
“나 귀 안 먹었어. 거 조용조용히 좀 삽시다.”
“아, 알겠습니다, 대리님.”
그리고는 얼른 자리에 앉아서 작업을 시작했다.
서유림의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사무실을 요란하게 울렸다.
한동민도 생산팀에 전화를 걸어서 양해를 구했다.
“오늘 퇴근 전까지 보내줄게. 그러면 되지?”
사건은 그렇게 쉽게 마무리 되었다. 대표이사의 아들 한동민이 말하는데 생산팀이 무슨 배짱으로 어깃장을 놓겠는가?
그런데 잠시 후.
강은영이 화장실을 다녀오다가 움찔했다. 서유림의 모니터를 확인했기 때문이다.
“어, 라벨지 수정작업 하는 것 아니었어요?”
미쳤냐? 내가 네 업무를 도와주게?
“이거 오늘 오후까지 단가산출 끝내야 해. 강은영씨가 먼저 작업하고 있어. 최대한 빨리 끝내고 도와줄게.”
그러자 한동민이 얼른 참견했다.
“강은영씨 작업부터 도와주라니까 그러네.”
네가 팀장이냐? 책임도 안 져줄 주제에 왜 남의 일을 두고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거야?
서유림은 한동민을 상대하지 않았다. 대신 공을 진짜 팀장인 배기열에게 넘겼다.
“팀장님, 그래도 되겠습니까?”
“뭐가요?”
못들은 척하기는. 어떻게든 휘말려들고 싶지 않은 거겠지.
하지만 누구 마음대로?
“이번 모닝죽 신제품 단가산출 말입니다. 강은영씨 작업부터 도와주고 내일 점심때까지 마무리해도 될까요?”
“모닝죽 신제품? 그거 아직도 단가산출이 안 끝났어요?”
물론 끝내놨지.
하지만 분위기를 봐. 끝냈다고 얘기하면 재미없지 않겠어?
“한 대리님 보고서 작성하느라 아직 못 끝냈습니다. 어쩌죠?”
서유림의 말에 배기열 팀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영업팀에서 그거 오늘까지 꼭 끝내달라고 했는데······.”
그래서 어쩌라고? 왜 결론을 못 내리고 한동민 눈치를 보는데?
한동민도 배기열의 시선을 받고는 짜증 섞인 표정을 했다.
“에이 씨팔. 이놈의 구매팀은 내가 없으면 일이 안 돌아가나?”
그리고는 영업팀에 전화를 걸었다.
“그래, 그거. 단가 내일까지 뽑아도 되지? 안 돼? 왜 안 되는데?”
한동민이 상대방을 꾸짖듯 목소리를 높였다. 상대방이 얼마나 발발 기고 있을지 안 봐도 비디오였다.
하지만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죽었다 깨어나도 안 된다는데 한동민이라고 별 수 있겠는가?
전화기를 부술 듯 내려놓았다.
“서유림씨. 그거 오전 내로 끝내서 보내고 오후에는 강은영씨 일 도와줘. 그럼 해결됐지?”
해결은 개뿔이. 안 끝내면 네가 어쩔 건데? 안 도와주면 어쩔 건데? 죽일래? 모가지 자를래?
어디 한번 해봐. 배 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