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18화 (18/196)

# 18

아리안이 변했다. (2)

아리안은 마치 단답형 자동응답기 같은 존재였다. 스스로 의견을 내는 일은 없었고, 서유림이 묻는 말에도 단답형으로만 대답했다.

그런데 지금은 너무도 달랐다. 마치 지성을 갖춘 교양인처럼 자연스럽게 이야기하고 있지 않은가?

게다가 서유림씨라니.

물론 ‘유림씨’나 ‘서유림씨’나 한끝 차이이긴 하지만, 아리안이 그렇게 부르니 조금 이상했다.

‘아리안! 원래 말투가 그런 거야? 지금까지 연기했었던 거야?’

> 아니요. 단지 낯선 인간계에 적응하는데 시간이 조금 필요했던 것뿐입니다.

‘그랬었군. 그럼 이제 완전히 적응한 거야?’

> 어느 정도는요. 서유림씨 덕분입니다. 서유림씨의 따뜻한 마음이 제게 큰 힘이 되었어요.

이것 봐. 좋은 일을 하면 반드시 보상이 온다니까.

벌써 왔잖아.

‘다행이네. 그럼 이제 힘이 생긴 건가? 내 앞에 모습을 보일 수도 있어?’

> 그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제가 힘을 얻기 위해서는 서유림씨가 정령계에서 힘을 키워야 해요. 그게 곧 제 힘입니다.

대충 이해가 간다.

정령계에서 레벨을 올리면 그게 곧 서유림의 잠재력이자 정령 아리안의 힘도 된다는 뜻이군.

역시 정령계가 힘의 근원이었어. 다시 돌아가면 더욱 열심히 레벨을 올려야겠다.

아리안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집 앞에 도착했다.

아리안과의 대화를 마무리했다. 간단한 당부와 함께.

‘그냥 성 빼고 유림씨라고 불러주기로 했잖아. 그렇게 불러줘.“

> 알겠습니다, 유림씨.

서유림이 현관문을 열고 빌라 안으로 들어갔다.

“저 왔습니다.”

“늦었네. 피곤하지.”

“전혀요. 식사하셔야죠.”

서유림이 포장을 내밀었다. 내용물은 보이지 않지만 냄새는 솔솔 새어나왔다. 심상찮은 냄새였다.

“이게 뭐야?”

어머니가 얼른 포장을 열어보았다.

빨갛게 익은 점보랍스타가 ‘나 맛있겠지?’ 하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어서 어머니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짜악-

어머니의 등짝 스매싱이 오늘따라 시원하다.

“얘가 미쳤나봐. 이게 얼마짜린데. 그렇게 고생해서 번 돈을 이렇게 쉽게 쓰면 어떻게 해?”

“할인행사해서 비싸지도 않아요. 그리고 맨날 먹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런 거 한 번씩 사먹는다고 집안 무너질 일 없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아휴, 내가 못 살아.”

“이왕 사왔는데 맛있게 먹자고.”

아버지께서 서유림을 편들어주신다.

아버지는 직장을 잃으신 후로 급격하게 변하신 듯했다. 전에는 ‘스파르타’, ‘파쇼’ 같은 단어가 어울릴 정도로 괄괄하셨는데, 요즘은 만사 OK로 통하신다.

마치 한순간에 인생을 달관한 사람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런 모습이 한편으로는 좋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늙어가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안쓰럽기도 하다.

“근데 미연이가 안 보이네요.”

“언니 요즘 연애하느라 바쁘잖아. 아마 밖에서 더 맛있는 것 먹고 있을 거야.”

하긴, 요즘 새 남자친구 사귀면서 주말마다 바쁘다. 오늘도 자정은 넘어야 기어들어오겠지.

그러고 보면 우리 부모님은 연애문제에 너무 개방적이시다. 가끔은 통금시간도 정해주고, ‘여자는 정숙해야 해.’ 하며 몸단속도 시키고 해야 하는데.

물론 그런다고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어떤 놈팡이인지는 모르겠다만 조금 불쌍하다. 서미연 고것이 얼굴만 예쁘장하지 성격은 불여우에 살쾡이인데.

“먹자. 어디 얼마나 맛있나 보자.”

함께 둘러앉아서 점보랍스타를 먹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생전 처음 먹어보는 거였다. 어떻게 먹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막내여동생 서미진은 능숙하다.

“이렇게 까서 여기에 찍어먹는 거야.”

“너 이거 먹어봤냐?”

“예전 남자친구한테 몇 번 얻어먹어봤어.”

하여튼 저것도 뼛속까지 불여우라니까. 왜 나만 이 모양이야? 배다른 남매도 아닐 텐데.

아무튼 서미연이건 서미진이건 직장만 잘 잡으면 시집가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야, 맛있네!”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요. 이 정도 맛도 없으면 누가 사먹어요? 너도 보고만 있지 말고 얼른 먹어.”

역시 돈이 좋긴 좋다. 비싼 값을 한다.

맛도 좋고, 기분도 좋고.

부모는 자식 입에 음식 들어가는 모습만 봐도 배부르다고 했던가?

자식도 그런 것 같다. 부모님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보니 내가 맛있게 먹는 것보다 몇 배는 행복하다.

이런 즐거움을 지금까지 왜 외면하고 살았을까?

돈 좀 아끼겠다고 지지리 궁상이었지.

앞으로는 다를 것이다. 돈 몇 푼 아낀다고 생활이 더 나아지는 것도 아니고.

사실 이런 행복 느끼려고 돈 버는 것 아닌가?

그래. 다른 것은 다 포기해도 가족의 행복만큼은 포기하지 말자.

이런 행복, 자주 느끼게 해드리자.

“얘, 오빠 것 좀 남기고 먹어. 넌 왜 그렇게 식탐이 많니?”

“엄마느~은! 내가 먹으면 얼마나 먹는다고. 만날 오빠만 챙겨.”

“얘. 너도 그러고만 있지 말고 어서 먹어.”

“하하, 엄마도 드세요. 다음에 세일하면 또 사올게요.”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다.

다시 아까의 그 중학교로 향했다. 인근에 제법 큰 공원도 있지만, 제대로 운동하기에는 중학교가 훨씬 낫다.

서유림은 미친 듯이 움직였다. 온갖 운동도구를 모두 사용하면서 쉬지 않고 계속 몸을 혹사시켰다.

힘이 들었다. 허벅지, 장딴지, 옆구리, 어깨.

온몸에서 타들어가는 통증이 느껴졌다.

하지만 기분 좋은 통증이었다.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느낌이랄까?

문득 ‘러너스하이(Runner’s High)’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마라톤을 뛰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달릴수록 쾌감이 느껴지는 현상이라고 했다.

당연히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었다. 믿어지지도 않았다. 듣는 순간 미친 소리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해할 것 같았다.

이건 통증이 아니라 쾌감이었다. 고통스러운데도 멈출 수 없는 쾌감.

어느새 자정이 넘을 정도로 밤이 깊었는데도, 체력이 방전돼서 더는 움직일 힘이 없는데도 운동을 멈추고 싶지가 않았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나는 게 있었다.

‘아, 맞다! 유럽 라벨지 수정해야 하지?’

월요일 아침까지라고 했다.

하지만 이내 관심을 접었다. 어차피 내 일도 아닌데 뭐. 될 대로 되라지.

오히려 한동민이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다.

‘지금까지 날 호구로 취급했었지? 내일도 그럴 수 있는지 보자.’

서유림은 자정이 한참 넘어서야 운동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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