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아리안이 변했다. (1)
앳된 학생 목소리다. 그런데 내 차번호는 왜 부르고 그래?
“맞는데요.”
- 어떤 할머니께서 아저씨 차를 손수레로······.
이게 뭔 소리래? 내 차를 손수레로 박았다고?
비록 주행거리가 15만 킬로미터도 넘은 낡은 경차이긴 하지만, 여기저기 녹슬고 찌그러져서 ‘조만간 바꿔야지.’ 하며 벼르고 있던 차이긴 하지만, 그래도 정든 애마가 다쳤다고 하니 속이 쓰렸다.
옆에서 할머니 목소리도 들린다. 휴대폰을 자신에게 달라고 하는 듯하다.
이어서 할머니가 직접 통화했다.
- 아휴, 이거 죄송해서 큰일 났네. 제가 선생님 차를······.
고물을 주워 파는 할머니였다. 오늘따라 고물이 많이 모여서 손수레가 무거웠고, 그 때문에 언덕길에서 뒤로 밀리며 사고가 났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 범퍼도 아니고 차 옆구리를 박았다네.
‘아이고 머리야!’
“제가 15분 내로 가겠습니다.”
걸어서 15분 거리. 뛰면 10분 남짓이면 되겠지.
점보랍스타를 들고 뛰었다.
그런데 상황이 정말 암담하다.
고물을 주워 파는 할머니라니. 돈은커녕 먹고 살기도 빠듯하실 텐데.
게다가 차 옆구리라니. 아무리 중고차에 경차라고 해도 수리비가 최소 몇 십만 원은 나올 텐데.
수리비를 청구해야 하나?
청구한다고 낼 능력은 되시려나?
할머니도 불쌍했다. 없는 형편에 차 수리비를 감당할 생각을 하면 지금쯤 눈앞이 캄캄하시겠지.
서유림을 원망하고 있을 수도 있다.
하필 차를 거기에 세워서.
사실 서유림의 잘못도 있다. 차를 주차장이 아닌 길가에 세워두었으니까. 모두가 그렇게 한다고 하지만, 불법인 것만큼은 사실이다.
‘어쩌지?’
뛰는 내내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러는 사이 언덕길에 도착했다.
서유림의 집은 언덕길 중간 즈음의 빌라였다. 빌라 안에는 늘 차 댈 곳이 없어서 대부분 사람이 이곳 언덕길에 차를 댔다.
‘저분이신 모양이군.’
할머니 한 분이 길가에 쪼그린 채 앉아계신다.
사고의 원흉인 손수레도 보인다. 고물이 진짜 많이 실리긴 했네.
손수레 옆에는 서유림의 허리춤에도 못 미칠 정도의 꼬마도 있다.
할머니의 손자인 모양이다.
유치원생일까? 아니면 초등학생일까?
손자를 보니 더욱 안쓰럽다. 지금의 상황이 얼마나 슬프게 다가올까? 자신의 신세가 얼마나 비참하게 느껴질까?
차 옆구리가 찌그러진 것도 아프지만, 그보다는 할머니나 손자의 마음을 생각하니 그게 더 아프게 느껴졌다.
휴우, 난 왜 이렇게 감성적이지?
서유림이 다가가자 할머니가 얼른 일어섰다.
사람들이 지나칠 때마다 저러셨을 것 아닌가? 차주인가 싶어서 일어섰다가 앉고, 또 차주인가 싶어서 일어섰다가 다시 앉고.
안 봐도 눈에 훤하다.
차라리 그냥 도망가고 말 것이지. 어차피 블랙박스도 안 달려있는데.
“차주 분 되셔요?”
“예. 제 차입니다.”
“아휴, 이거 죄송합니다. 이 일을 어째?”
가뜩이나 허리가 굽은 할머니가 자꾸만 허리를 굽실거린다.
“으아앙.”
꼬마가 울음을 터뜨렸다. 겁나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겠지.
“정말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제가 차를 잘못 대서 그런 겁니다. 오히려 제가 죄송합니다.”
서유림도 할머니를 향해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할머니가 조금은 당황하는 표정을 했다.
“······예?”
그래. 당황하실 만도 하지. 나도 쉽게 나온 결정은 아니니까.
사실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어차피 수리비도 못 받을 상황이다. 물론 독하게 군다면 받아낼 수는 있겠지만, 그러면 내내 마음이 편치 못할 것 같다.
그래서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 알아. 호구 짓이라는 것. 이럴 땐 면도칼처럼 매정해야 한다는 것 나도 안다니까.
하지만 그게 싫은 걸 어쩌라고. 나 몇 십만 원 손해 보기 싫어서 저 불쌍한 할머니 땅을 치며 통곡하게 할 짓은 차마 못 하겠는 걸 어쩌라고.
나도 속은 쓰리다니까.
생돈 몇 십만 원 날리게 생겼는데 속이 편할 사람이 누가 있겠어?
그렇다고 할머니한테 쓴 소리도 못 하겠다. 그런다고 답답한 속이 뚫리는 것도 아니잖아.
그래서 이왕 인심 쓰는 것 좀 더 쓰기로 했다. 돈 나가는 거야 어쩔 수 없으니 할머니 기분이라도 좋으시라고.
그건 돈 드는 것 아니잖아.
그런데 이상하더라. 그렇게 마음먹고 나니까 내 기분도 괜히 좋아지는 것 있지?
생각해봐. 이런 상황에서 누가 이런 식으로 대응하겠는가?
괜히 착한 일 한 것도 같고, 공덕을 쌓은 것 같기도 하고. 또 언젠가 더 좋은 일로 보상받을 것도 같아.
아니지. 보상은 이미 받은 셈이지.
정령과 계약했잖아. 내 몸이 이렇게 좋아졌잖아.
이렇게 좋은 날 인심 써야지 언제 쓰겠어?
그래서 이왕 인심 쓰는 것 더 확실하게 쓰기로 했지.
“혹시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
“아휴, 다칠 데가 어디 있겠어요?”
“다행이네요. 제가 저 아래까지만 도와드릴게요.”
서유림이 손수레를 잡았다.
“아휴, 괜찮은데······.”
전 안 괜찮거든요. 그러다가 다른 차를 또 박으면 어쩌려고요?
제가 호구라서 그냥 넘어간 겁니다. 다른 사람은 그냥 안 넘어간다니까요.
할머니 진짜 오늘 운 좋으신 겁니다.
“어서 가요.”
“아휴, 이거 죄송해서 어쩌나?”
할머니는 그러면서도 손수레 손잡이를 잡았다. 그리고는 서유림의 도움으로 언덕길 아래까지 무사히 내려갔다.
손수레가 정말 무겁긴 했다. 할머니 혼자서는 감당하기 힘든 무게였다.
그래서인지 마음이 더 흐뭇했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저는 바빠서 가보겠습니다.”
“아휴,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가 연신 고개를 숙였다. 옆에 있는 손자의 머리도 짓눌러가며 함께 감사를 표했다.
그 모습을 보니 더욱 마음이 흐뭇했다.
서유림도 할머니께 연신 고개를 숙이며 집으로 향했다.
그러자 정령 아리안이 불쑥 튀어나왔다.
> 서유림씨는 마음이 참 따뜻하시군요.
‘꼭 그렇지만도 않아. 내가 지금 속이 얼마나 쓰린데.’
거짓말이 아니다. 기분 좋게 마무리하긴 했지만, 찌그러진 차만 생각하면 입맛이 무척 쓰다.
> 아니요. 서유림씨는 마음이 따뜻하신 분이에요. 틀림없어요.
‘그렇게 생각해주면 고맙고.’
서유림이 피식 웃었다.
그러다가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뭐지? 아리안의 말투가 갑자기 왜 저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