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호구 한 마리 잡아드시고 갈게요 (1)
서유림 때문에 잠시 멍했던 한동민이 다시 정신을 차리고 분위기를 주도했다.
“방으로 들어가서 한잔 더 하지.”
아직 자정도 넘지 않은 시각이었다. 권진아를 비롯한 여자 팀원들도 반 강제로 끌려 들어왔다.
이런 곳에 오면 최소 새벽 세 시까지는 먹고 마시고 놀아야 한다는 게 한동민의 지론이었다.
한쪽에서는 TV가 혼자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역시 한동민의 취미였다. 회식자리는 시끄러워야한다며 들어오자마자 TV전원부터 켰다.
한동민이 격투기 마니아이기 때문에 프로그램은 무조건 격투기 관련이다. 우리의 영원한 딸랑이 오영훈이 알아서 채널을 찾아 고정시켜놓았다.
차~암, 사회생활 잘한다니까.
“위하여!”
잔이 돌고 돌았다.
한동민은 특히 서유림을 집중 공략했다. 마치 ‘네놈이 어디까지 버티나 보자.’ 하며 견줘보는 듯했다.
서유림은 단 한 잔도 빼지 않았다. 방에 들어와서만 벌써 열 잔을 훨씬 넘게 마신 듯하다.
혀가 잔뜩 꼬였다.
“대뤼님 머쮕이!”
물론 쇼다. 전에는 소주 반병만 마셔도 정신을 못 차리고 속이 울렁울렁했는데, 지금은 한 병을 마셔도 가뿐했다.
게다가 웬만큼 취한다 싶으면 정령 아리안에게 부탁했다.
‘술 좀 적당히 깨게 해줘요.’
> 예, 유림씨.
정령의 알코올 분해 능력은 대단했다. 정신이 어질어질해질 정도로 취했는데, 겨우 1분도 안돼서 한 잔도 안 마신 것 같은 맨 정신으로 되돌릴 수 있었다.
분해하는 양도 조절이 가능했다. 술기운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것도 가능했고, 적당히 취한 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가능했다.
서유림은 후자를 선택했다. 술 취한 사람 맨 정신으로 상대하는 것만큼 고역도 없으니까. 나도 적당히 취해줘야 재미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 한동민이 제아무리 작심하고 술을 권해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한동민을 안드로메다로 보낼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한동민이 정말 대단하긴 대단하다. 벌써 네 병은 넘게 마신 것 같은데.
격투기로 다져진 몸이라서 그런지 아직도 끄떡없이 버틴다.
그런데 한동민이 갑자기 TV를 향해 고개를 거칠게 돌린다.
“어, 주먹이 운다. 하네.”
일반인들 중에서 싸움 고수를 발굴하는 프로그램이다. 지금 TV에서 그 우승자에 대한 인터뷰가 진행되고 있었다.
그동안의 경기 하이라이트와 함께.
“봐, 딱 맞았지? 내가 저 사람이 우승할 거라고 했잖아.”
한동민이 그런 말을 했었나? 전혀 기억이 없다.
“저사람 감각이 죽인다니까. 타격이면 타격, 그라운드면 그라운드. 못하는 게 없어. 조만간 국내 패더급 랭킹이 저 친구 때문에 요동칠 거야. 두고 봐. 내 말이 맞는지 틀리는지.”
격투기 프로그램만 나오면 저렇게 아는 체한다.
뭐, 할 말은 없다. 한동민은 격투기도 제법 오래 수련했고, 이론도 무척 해박하니까.
물론 구매팀의 팀원들과 비교해서 말이다.
“이야, 저 원투스트레이트 타이밍 봐. 예술이다, 예술.”
“와, 저 자세에서 암바를 들어가네. 진짜 싸움의 신이다.”
한동민이 박수까지 쳐주었다.
전문 아부꾼 오영훈이 이런 타이밍을 놓칠 리가 있나?
“한 대리님도 평범한 실력은 아니시잖아요. 저런 데 한번 나가보시지 그러세요?”
“그럴까? 에이, 내가 저기 나가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아! 오 주임이 한번 나가보지 그래요? 저거 뱃살 빼는 데 최고라니까. 예선만 통과해도 내가 백만 원 줄게. 아니, 천만 원 줄게.”
순간 서유림의 눈빛이 반짝 빛났다.
‘천만 원? 예선만 통과해도?’
설마하니 정령의 힘을 얻은 서유림이 그깟 예선을 통과하지 못할까?
말 그대로 이건 공짜 돈이었다.
게다가 생각해보면 격투기를 배워야 할 이유는 차고 넘쳤다.
먼저 몸을 강하게 만드는데 격투기보다 좋은 운동도 없을 것이다. 정령 아리안이 있으니 다치는 것도 전혀 걱정할 필요 없을 테고.
또한 사나이라면 자신의 몸은 물론이고 가족의 안전 정도는 책임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앞으로 큰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더욱 그렇겠지.
한동민만 잘 이용한다면 ‘주먹이 운다.’는 말 그대로 완벽한 기회였다.
‘잘하면 공짜로 운동 배우고 돈도 벌 수 있겠는걸.’
서유림이 한동민을 슬쩍 자극하고 나섰다.
“그래요. 저거 보기만 저렇지 별것 아니에요. 오 주임님도 한 1년 만 빡세게 운동하면 쉽게 우승할 수 있다니까요. 이참에 돈 좀 벌어요, 오 주임님.”
순간 한동민이 서유림을 날카롭게 노려보았다. 쥐뿔도 모르는 놈이 격투기 무시한다 그거겠지.
하지만 서유림은 한동민을 못 본 체했다. TV에만 시선을 두고 입을 가볍게 놀렸다.
“에이, 쟤네들은 뭐야?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1년만 제대로 운동해도 저런 애들은 가볍게 이겨주겠다. 하하하.”
“놀고 있네. 서유림씨 취했어? 서유림씨가 100년을 운동해도 저 사람 머리카락 하나 못 건드려. 한 주먹거리도 안 되는 주제에 까불고 있어.”
한동민이 면박을 주듯 나무랐다.
하지만 서유림은 오히려 호기롭게 웃었다.
“하하하! 저 정도는 개나 소나 다 할 수 있죠. 내가 시간 없고 돈이 없어서 운동 못한 거지, 운동만 했으면 쟤네들 다 죽었다니까요.”
“그 말 책임질 수 있어?”
순간 한동민의 목소리에서 차가운 한기가 느껴졌다.
방안의 분위기도 덩달아 싸늘해졌다. 팀원들 모두 긴장한 얼굴을 했고, 오영훈은 서유림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기까지 했다.
물론 서유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당연하죠. 진짜 마음먹고 1년만 하면 쟤네들 정도는 뭐 우습죠. 1년이 뭐야? 6개월이면 충분하겠네.”
“나와 내기할까?”
드디어 걸려들었구나.
근데 얼마내기 하려고? 이왕이면 금액이 클수록 좋은데.
하지만 서유림은 깜짝 놀란 척했다.
“내기요?”
“하핫, 표정이 갑자기 왜 그렇게 변해? 막상 내기하자니까 겁나지? 하여튼 입만 살아가지고. 차라리 거시기를 떼던가.”
“아니, 그게 아니고. 운동할 여건이 돼야 내기를 하죠. 시간도 없고 체육관 다닐 돈도 없는데. 막말로 대리님이 체육관비 대줄 겁니까?”
“얀마, 너 갑자기 왜 그래? 약 처먹었어?”
오영훈이 깜짝 놀라서 서유림의 옆구리를 바삐 찔렀다. 서유림의 말투가 마치 한동민에게 시비를 거는 듯했기 때문이다.
“옆구리 좀 그만 찔러. 아프잖아. 내가 뭐 못할 말 했어? 내가 거시기를 왜 떼? 진짜 여건이 안 돼서 못하는 건데.”
그럴수록 오영훈의 손은 서유림을 만류하느라 더욱 바빠졌다.
“그만 좀 하라니까.”
“오 주임 그만하세요. 그리고 서유림씨.”
한동민의 목소리가 아까보다 더욱 차가워졌다. 눈빛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마치 먹잇감을 찾은 맹금류 같았다.
“내가 체육관비 대주면 내기 할래?”
물론 내기 해야지.
하지만 체육관비만 가지고는 부족하지. 이왕 인심 쓸 거면 좀 더 써야하지 않겠어?
화끈하게.
“체육관비만 있으면 뭐해요? 시간이 없잖아요, 시간이. 만날 야근하는데, 언제 운동해?”
“만약 야근 안 시키면? 백만 원 내기 할래? 대신 실패하면 체육관비 도로 토해내기.”
한동민이 말을 멈추고 서유림을 노려보았다.
무조건 이 자리에서 끝을 보겠다는 표정이었다. 서유림이 자신의 입으로 ‘무서워서 못 하겠어요.’ 라며 고개 숙일 때까지
그런데 서유림이 갑자기 폭소를 터뜨렸다.
“푸하핫! 꼴랑 백만 원? 하하, 대리님 배포가 그게 뭐예요? 애들 소꿉장난도 아니고. 1억 원은 좀 그렇다고 해도 최소한 1천만 원 내기 정도는 돼야죠. 안 그래 권진아씨?”
취했네, 취했어. 쯧쯧.
다들 서유림을 한심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하지만 한동민은 달랐다.
“좋아. 우리 통 크게 3천만 원 내기 하지. 서유림씨 연봉이 그쯤 되지 아마? 어때? 자신 있으면, 계약서 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