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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미친 잠재력-13화 (13/196)

# 13

쟤 좀 이상해졌어. (1)

팔로 땅을 짚으며 살며시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힘이 없다. 팔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다.

그래도 움직일 수 있을 정도는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체력이 빠르게 회복되는 것도 느껴진다. 조금만 쉬면 산길을 무난히 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나저나.

‘아, 배고파!’

감각이 돌아오자마자 극심한 허기부터 느껴진다. 마치 며칠을 굶어서 뱃가죽이 등가죽에 달라붙은 느낌이다.

시간이 그렇게나 많이 지난 걸까?

아리아나는 그렇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 정령계에서 아무리 많은 시간을 보내도 인간계의 시간은 겨우 몇 분 지나있을 것이라고 했다.

아리아나가 서유림을 속이지는 않았을 터.

아리아나가 시간개념을 잘못 알고 있었던 걸까?

내려가 보면 알겠지.

그런데 몸 상태는 어떻게 변했을까?

아리아나의 말대로 정령이 최상의 몸 상태를 만들어줬을까?

제아무리 정령이라고 해도 그토록 엉망이었던 몸을 벌써 다 바꿔놓지는 못 했겠지?

그래도 기대가 되었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몸을 일으켜보았다.

서유림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비록 허기지고 힘은 없지만, 컨디션만큼은 최고였다.

‘너무 가벼워. 몸이 깃털 같아!’

전에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온몸 구석구석, 특히 관절 같은 곳에서 약간씩 자극이 느껴졌다. 쑤시거나 하는 것은 아니지만, 무리가 간다는 느낌이랄까?

그런데 지금은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 너무 개운하다. 마치 온몸이 탱탱볼로 변한 것 같다. 허기를 지우고 체력만 회복되면, 거짓말 조금 보태서 우사인볼트 뺨 때라고 달아나도 안 잡힐 것 같다.

정령의 힘이 이토록 대단하다니.

정말 내 안에 정령이 있는 거야? 혹시 정령과 대화도 나눌 수 있을까?

‘정령님. 계시나요?’

> 예, 주인님.

오! 있다! 게다가 목소리를 내지 않고 생각만 했는데도 그걸 읽고 대답도 한다.

이거 좋은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아무 때고 대화할 수 있겠다.

게다가 목소리가 너무 근사하다. 바람소리처럼 간질간질 귓가를 맴돈다.

정령은 귓속에 사나?

‘이름이 뭐에요? 제가 뭐라고 불러야 할지······?’

> 모릅니다.

목소리는 딱 취향저격인데 말투는 딱딱하다. 마치 단답형으로 입력된 자동응답기와 대화하는 느낌이다.

하긴, 최하급 정령이라서 능력이 많이 부족하다고 했다. 대화하는 능력도 그런 모양이다.

이름을 모른다는 건 이름이 없다는 뜻이겠지.

‘그럼 아리안이라고 불러도 될까요?’

아리아나의 정령이라는 뜻이다. 부르기도 편하고.

> 네, 주인님.

하나하나 풀어가는 재미도 쏠쏠할 것 같다.

‘그런데 제 몸은 아리안님이 치료해주신 건가요?’

> 네, 주인님.

자꾸 ‘주인님’이라고 호칭하니 어색하다. 괜히 정령을 노예 취급하는 것 같아서 죄 짓는 기분까지 들었다.

호칭도 정해줄 수 있겠지?

‘주인님 말고 다르게 불러주면 안 돼요?’

> 네, 주인님.

또 그러네. 빨리 호칭을 정해줘야겠다.

뭐가 좋을까?

사실 원하는 호칭은 있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같은 생각일 것이다.

[오빠!]

하지만 정령이라는 존재에게 ‘오빠’ 소리를 들을 생각을 하니 조금 어색했다.

평범한게 좋겠지.

‘유림씨라고 불러주세요.’

> 네, 유림씨.

‘그런데 모습을 볼 수 있나요?’

> 못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대답 하나는 시원시원해서 좋다.

그런데 아직 힘이 약해서 모습을 못 보이는 걸까? 힘이 강해지면 그런 것도 가능해질까?

꼭 그것뿐만이 아니라도 정령이 힘을 키우면 서유림에게도 훨씬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어떻게 해야 아리안님의 힘을 키울 수 있죠? 제가 도와드릴 게 있나요?’

> 모릅니다.

아는 게 거의 없군. 나중에 아리아나에게 물어봐야겠다.

아는 것이 없으니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급할 것 없다. 앞으로 함께 보낼 날이 구만리 아닌가?

그러는 사이 체력은 더욱 많이 회복되었다.

온몸에 가벼운 흥분이 느껴진다. 움직이고 싶다. 미친 듯이. 시험삼아 험한 산길을 마구 뛰어보고 싶을 정도다.

관절이 상할 염려도 필요 없을 것이다. 몸이 상하면 정령 아리안이 알아서 치료해준다고 했으니.

물론 그래도 조심해야 하겠지. 멀쩡한 몸을 일부러 상하게 할 필요는 없으니까.

‘아, 근데 배가 너무 고프다. 아리안님! 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죠? 제가 얼마나 오랫동안 누워있었어요?’

‘5분가량입니다.’

겨우 그것밖에 안 지났어? 그런데 왜 이렇게 허기진 거지?

일단 내려가서 뭐라도 좀 먹자.

서유림이 선녀계곡의 산길을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제가 혼자라도 올라가볼게요.”

권진아가 랜턴을 들고 나섰다.

굳이 말이 필요할까? 웬만한 대화는 눈빛만으로도 가능한 법이다. 한동민이 권진아를 조금은 매섭게 노려보았다.

예쁘다고 오냐오냐했더니 주제 파악도 못 하고.

권진아는 눈치가 빠른 편이다. 한동민의 뜻을 얼른 알아채고는 어깨를 살짝 움츠린다.

한동민이 다시 표정을 부드럽게 했다.

강은영 이후로 오랜만에 입사한 연예인급 퀸카가 아니던가?

강은영이 섹시미로 퀸카라면, 권진아는 청순미로 퀸카. 한마디로 명진식품을 대표하는 퀸카 두 명이 구매팀에 함께 있는 것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아니지. 그럴 수밖에 없는 거지. 면접 때부터 한동민이 개입해서 눈에 띠는 미인이 보이면 앞뒤 안 보고 무조건 입사시키고, 인사발령 때 자신이 있는 구매팀으로 끌어온 거니까.

목적이야 굳이 말할 필요도 없는 거고.

그럼 남은 일은 뭐?

내 여자로 만드는 거다.

그러자면 그만한 인내와 정성이 필요하겠지.

“권진아씨. 우린 팀이야. 단체행동을 해야지. 내가 서유림씨 버리고 내려온 것 같아? 오히려 위한 거야. 그 사람은 담력이 필요하다니까.”

“대리님 말씀이 옳아.”

오영훈이 얼른 나서서 한동민을 거들었다. 그리고는 권진아를 위해주는 척 한동민의 이해를 구했다.

“권진아씨가 아직 사회경험이 적어 그렇습니다. 착해서 그런 거니까 대리님께서 이해해주세요.”

“알아요. 그래서 내가 권진아씨를 좋아한다니까. 어서 들어와요. 한잔 하고 있으면 서유림씨도 올 거예요.”

권진아가 마지못해 끌려갔다. 그래도 걱정을 지우지 못해서 연신 선녀계곡 산길을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곳에서 사람의 그림자가 보였다.

이 시간에 저곳에서 내려올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권진아의 표정이 밝아졌다.

“어머, 저기 서유림씨 내려오시네요.”

“그래? 어디?”

한동민과 오영훈도 팀원들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권진아의 말대로 한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모습이 또렷해졌다.

큰 키에 빼빼 마른 몸매.

서유림이 분명했다.

한동민의 얼굴에 실망감이 살짝 떠올랐다.

‘고생 좀 할 줄 알았는데, 재미없네.’

그러는 사이 서유림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웬 똥을 그렇게 오래 싸고 그래요?”

한동민이 창피라도 줄 요량으로 적나라하게 물었다. 그런데 서유림의 반응이 조금은 뜻밖이다.

“하하, 죄송합니다. 오래 기다리셨어요?”

표정이 왜 저렇게 밝아?

게다가 목소리의 느낌도 조금 어색하다. 전에는 잔뜩 움츠린 사람처럼 목소리가 안으로만 기어들어갔는데, 지금은 거침없이 툭툭 내뱉는다.

내려오다가 산삼이라도 캐먹었나? 힘도 넘치는 것 같고.

“기다리긴. 서유림씨 담력 좀 키워줄까 해서 우리끼리 먼저 내려왔지. 효과가 있었는지 모르겠네.”

“그러셨구나. 그것도 모르고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 왔네. 하하하.”

진짜 이상하네. 왜 저렇게 신나게 웃어? 놀림 당한 게 그리도 즐거운가?

그냥 속없는 사람으로 치부하기에는 표정이 지나칠 정도로 밝고 자신감도 넘친다.

“뭐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요?”

좋은 일?

당연히 있지. 아마 들어보면 깜짝 놀랄걸.

서유림이 활짝 웃으며 조금의 거짓도 없이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요정을 만났습니다.”

“요정?”

한동민이 갑자기 멍한 표정을 했다. 그리고는 조금 화난 표정으로 서유림을 노려보았다.

눈빛이 서유림을 나무라고 있었다.

지금 나랑 장난해? 내가 네 친구냐?

하지만 서유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맑고 순수한 눈빛으로 한동민의 시선을 받아냈다. 너무 순수해서 거짓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한동민은 순간 팔뚝에서 소름을 느꼈다.

서유림의 표정이 너무도 진지했기 때문이다.

‘뭐야? 농담이 아니야?’

하긴, 서유림이 자신에게 언제 농담 한 마디 건넨 적이 있던가?

오히려 자신의 농담을 감당하지 못해서 발발 기던 사람인데.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은 이상에는 그런 농담을 할 사람이 아니다.

그런데 요정을 만났다니.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이 친구 충격을 크게 받아서 정신이 어떻게 된 것 아냐?’

“저한테 행운의 축복을 걸어주더라고요. 이젠 뭘 해도 다 잘될 것 같아요.”

한동민이 깜짝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큰일이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

이걸 어쩌지?

한동민은 물론이고 구매팀 전원이 멍한 표정을 했다. 다들 서유림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너무 황당한 얘기라서 뭐라 대꾸할 말도 못 찾겠다.

“그나저나 배고파 죽겠네요. 들어가서 뭣 좀 먹죠?”

“그,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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