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
두 가지 약속 (2)
신체를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준다고?
말하자면 허약과 부실의 대명사인 서유림의 육체가 강인하게 변할 수 있다는 뜻 아닌가?
게다가 모든 병을 치료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막힌 기혈을 열어준다?
왠지 무협소설에서나 등장하는 용어 같았다.
“그게······ 정말 가능한 겁니까? 그럼 저도 튼튼한 몸을 가질 수 있는 건가요?”
서유림의 눈빛이 기대감에 초롱초롱 빛났다.
그래서인지 아리아나의 표정도 밝아졌다.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우리 이것도 정령신의 이름으로 약속해요.”
이거야말로 남는 장사였다. 얼핏 보면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치맛단을 붙들고 매달려야 할 거래였다.
하지만 서유림은 멈칫했다. 워낙 험한 세상에 살다 보니 거래의 조건이 너무 좋으면 일단 의심부터 들었다.
해주는 것도 없이 너무 큰 걸 얻지 않는가?
물론 아리아나에게 서유림의 도움이 꼭 필요한 것은 알겠지만, 그래도 거래의 무게추가 심하게 불균형하다.
“정말 그게 전부인가요? 옆에서 도와주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서유림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아리아나도 눈치가 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눈치가 빠꿈이었다. 서유림이 무엇을 의심하는지 단번에 알아차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정령과 계약한다고 해서 유림씨에게 피해가 갈 일은 없을 거예요. 정령신의 이름으로 약속까지 하는 일이잖아요. 그리고 정령이 성장하면 그 힘이 제게도 도움이 돼요. 어차피 정령의 계약자를 찾아야 해요.”
사실 다른 건 믿음이 안 간다.
하지만 정령신의 이름으로 약속하는 것에서는 믿음이 갔다.
물론 그것도 속임수일 수 있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괜찮겠지 뭐.
그래 괜찮을 거야.
서유림이 고민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까짓, 하죠 뭐.”
곧바로 두 번째 약속을 맺었다. 손등에 같은 모양의 문신 두 개가 나란히 자리 잡았다.
이왕 해주기로 했으니 화끈하게 해줘야겠지?
긍정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그럼 제가 뭐부터 도와드릴까요?”
“제 몸을 치료하려면 요정의 샘물이 필요해요. 요정의 샘물은 여기에 담아 오시면 돼요.”
아리아나가 허리춤에서 가죽주머니를 꺼내주었다. 2리터 쯤 담을 수 있는 크기였다.
“요정의 샘물은 어떻게 찾죠?”
“물 색깔이 파래요. 흐르는 물은 효과가 없으니 반드시 솟아오르는 물을 찾아서 담아 오셔야 해요. 그리고 이거······.”
아리아나가 등에 두르고 있던 망토를 풀어서 주었다.
“위험할 때 사용하세요. 정령신의 결계가 있어서 유림씨를 안전하게 지켜줄 거예요.”
망토에 그런 기능이 있었어?
“어떻게 사용하는 건데요?”
“간단해요. 이렇게.”
아리아나가 망토를 머리 위로 뒤집어썼다. 그러자 망토의 크기가 순식간에 서너 배 커졌다.
아리아나의 모습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대신 아리아나가 앉아있던 침대만 덩그러니 남아있다.
마치 투명인간이 된 느낌이다.
“절 만져보세요.”
허공에서 아리아나의 목소리만 들려왔다.
그런데 그래도 되나? 아무것도 안 보여서 잘못 더듬다가 이상한 곳을 만질 수도 있는데.
아리아나가 시킨 것이니 실수해도 용서해주겠지.
서유림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그런데 어라! 뭐야? 아리아나가 없네. 침대 위를 아무리 더듬어도 아리아나가 만져지지 않았다.
아리아나가 망토를 벗었다. 그러자 원래 자리에 아리아나가 나타났다.
“이만큼 안전해요. 하지만 망토를 쓴 상태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까 위험할 때만 사용하세요.”
고맙긴 한데.
“아리아나도 이거 필요하지 않나요? 제가 없을 때 마물이라도 찾아오면······.”
“망토가 정령신의 향기마저 막아주지는 못해요. 마물이나 마족을 상대로는 아무 소용이 없어요. 그러니 가져가세요.”
“그럼 얼른 다녀올게요.”
서유림이 동굴을 빠져나왔다.
이곳도 태양은 존재했고, 인간계처럼 동쪽에서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즉 해가 지면 밤이 찾아온다는 뜻이다.
그 전에 먹을 것과 요정의 샘물을 구해 와야 한다.
아직 오전이긴 하지만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쪽으로는 물줄기가 없었지? 이번에는 이쪽으로.’
서유림이 지나온 반대방향으로 길을 잡고 움직였다. 손에는 동굴고블린을 해치웠던 나무창이 들려져 있었다.
서유림은 앞을 경계하면서도 빠르게 움직였다.
도중에 조금 더 긴 나뭇가지를 주웠다. 끝을 더 예리하게 갈고 나니 제법 무기다운 나무창이 되었다.
다시 뛰듯 움직였다.
흥분이 가셨는데도 몸이 무척 가벼웠다. 아까 동굴에서 섬광을 느낀 후로 계속 그렇다.
단순한 기분 문제는 아니었다. 다른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하다.
‘돌아가면 아리아나한테 물어봐야겠다. 앗!’
고블린이다. 동굴에서 보았던 놈과 모양이 비슷하다. 다만 조금 더 작고 유순하게 생겼다.
하지만 성격마저 유순하진 않았다. 서유림과 마주치자 톱니처럼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한다.
키애애!
‘이놈들도 떼로 다니는군.’
다섯 마리다.
크기가 작아서인지 동굴고블린을 사냥한 경험 때문인지 그다지 두렵지는 않다. 다만 사냥을 앞둔 긴장감만 가득하다.
고블린들이 서유림을 향해 달려든다. 동굴고블린과 다르게 공격도 떼로 한다.
그런데 움직임이 빠르지 않다. 마치 서너 살짜리 꼬마가 아장아장 걷는 느낌이다.
방심만 하지 않는다면 그리 위협적인 상대가 아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내가 죽이지 않으면 이놈들이 나를 죽인다.
서유림이 2m 가까운 나무창을 힘껏 찔렀다.
끼애애-
다섯 마리를 가볍게 사냥했다.
‘휴우, 또 해치웠군.’
뭔가 모를 쾌감이 느껴졌다. 크게 심호흡하며 쾌감을 만끽했다.
그러다가 문득 나무에 매달린 게 보였다.
‘어! 저거 열매잖아!’
붉은 색이다. 모양도 사과와 비슷하다.
먹을 수 있는 걸까?
사과 비슷한 생김인데 먹을 수 있는 걸까?
가져가보면 알겠지.
그런데 어떻게 가져가지? 손이 부족하다.
어렵지 않게 방법이 떠올랐다. 사람이라면 도구를 사용해야지.
웃옷을 벗어서 목구멍과 팔구멍을 묶었다. 엉성하게나마 열매를 담을 수 있는 자루가 되었다.
낮은 곳에 위치한 열매 다섯 개를 따서 담았다.
다시 방향을 잡고 움직였다.
워낙에 저주받은 육체라서 그런지 벌써 피곤함이 느껴진다. 숨이 차고 몸이 무거워진다.
게다가 나무창은 왜 이리 무거운지.
대나무 같은 것은 없나?
주변을 둘러보며 부지런히 걸었다.
이곳은 고블린 숲인 모양이다. 고블린 무리와 또 마주쳤다. 이번에는 여섯 마리다.
거치적거리게.
그래도 조심해야 한다. 아까 죽은 사체를 보니 이빨만 무서운 게 아니라 손톱도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뒤로 주춤주춤 물러서며 일정거리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나무창으로 찌르니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하게 사냥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물론 몸은 많이 지쳤지만. 이젠 나무창 휘두를 힘도 없다.
그런데 마지막 여섯 번째 고블린을 해치우는 순간 또다시 아까와 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번쩍!
눈앞에서 섬광이 폭발한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몸에 짜릿한 전율이 흐르면서 피로가 말끔하게 사라졌다. 마치 전신이 리셋되는 느낌이었다.
부작용은 없었다.
‘뭐지?’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혹시 레벨업?’
하지만 그런 거야 게임에서야 가능한 일 아닌가? 레벨이 올랐다는 소리를 듣지도 못했다.
‘에라 모르겠다. 혼자 궁리한다고 답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최대한 빨리 돌아가서 아리아나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어서 요정의 샘물을 찾아야 하는데.’
계속 걸었다. 그러다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뭔가 반가운 소리가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졸졸졸-
틀림없다. 물이 흐르는 소리다.
‘제발 파란색이기를.’
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아주 작은 물줄기가 보였다. 졸졸졸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흐르고 있었다.
서유림의 얼굴이 환해졌다.
‘파란색이다.’
파랗다기보다는 청아하다는 표현이 더욱 어울릴 것 같다. 푸른빛을 띠면서도 바닥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물이 너무 맑아 보인다.
가뜩이나 목이 말랐는데. 먹어도 되겠지?
안 되는 거였다면 아리아나가 미리 주의를 주었을 것이다.
서유림이 주변의 위험을 한번 살펴보고는 손으로 물을 담아 마셨다.
와, 이런 청량감이란!
TV에서 이온음료 광고를 본적이 있다. 마시는 순간 온몸이 파란색으로 물들었다.
지금 기분이 딱 그랬다. 계곡물이 청량감이 온몸의 피로를 순식간에 몰아내는 느낌이었다. 손끝 발끝까지 모두 시원해지는 것 같다.
몇 모금 더 마셨다.
하지만 이 물을 아리아나에게 떠다줄 수는 없다. 땅에서 방금 솟아오른 물이어야만 한다고 했다.
물줄기를 따라 올라가면 수원지가 있겠지.
제발 가까운 곳에 있어야 할 텐데.
떠나기 전에 나뭇가지로 왔던 방향을 표시했다.
아까부터 눈에 띄는 지형지물을 만날 때마다 이런 식으로 방향을 남겨두었다. 그러지 않으면 돌아가는 일이 피곤해질 테니까.
물줄기를 따라 계속 올라갔다.
‘어, 가만! 저거 뭐야?’
거미 같기도 하고 게 같기도 하고.
마물인가?
오, 집게가 있다. 엄청나게 큰 집게다. 게다가 거미라고 하기에는 움직임이 너무 느리다. 게다가 집게발로 커다란 과일을 파먹고 있다.
저거 TV에서 본 것 같다. 코코넛크랩인가? 똑같지는 않지만 비슷하다.
‘그런데 뭐가 저렇게 커?’
서유림 몸통만하다. 집게발에 잘못 물리면 손목도 쉽게 부러지겠다.
하지만 두려움보다는 입맛이 돌았다.
‘맛있겠다.’
게도, 그 위에 주렁주렁 매달려있는 커다란 과일도.
잡자!
재빨리 다가가서 게의 등을 밟았다.
와! 힘 좀 봐. 잘하면 서유림을 태우고 걸어갈 것 같다.
서유림을 공격하려고 만세 부르듯 집게발을 든다. 하지만 서유림의 발은 집게발의 완벽한 사각지대에 있다.
서유림이 나무창을 정확하게 겨냥해서 집게발 한쪽을 찍었다. 뚝! 소리가 나면서 집게발이 부러졌다.
다른 쪽도 똑같이 부러뜨렸다.
이러면 맛이 조금 없으려나?
상관없다. 안전이 먼저다.
나무의 열매 하나와 사냥한 게를 집게발과 함께 옷으로 만든 자루에 담았다.
‘아휴, 무거워!’
이걸 계속 들고 다니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수풀이 우거진 곳에 잘 숨겨두었다. 그리고는 다시 물줄기를 따라 뛰었다.
다시 고블린 한 무리를 만났다. 이번에는 일곱 마리나 되었다. 그중에는 색깔이 형형색색 알록달록한 놈도 한 마리 있었다.
하지만 특별함은 없었다. 워낙 움직임이 느려서 가볍게 사냥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자리가 서유림이 찾던 자리였다.
‘여기구나!’
아리아나의 말대로 땅에서 물이 퐁퐁 솟아오르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청량한 색깔이 훨씬 짙었다.
고블린도 이 물을 마시려고 여기에 모여 있었던 모양이다.
서둘러서 물주머니를 채웠다. 위치를 확인했으니 다음부터는 헤맬 필요 없이 한 번에 찾아올 수 있을 것이다.
‘돌아가자.’
자루는 수풀에 그대로 있었다. 물주머니에 자루까지 더해지니 무게가 장난이 아니었다. 계속 가다 쉬다를 반복해야 했다.
그런 와중에 고블린 떼를 몇 차례 만난 것은 큰 행운이었다. 합해서 열다섯 마리쯤 사냥하자 다시 섬광이 폭발하면서 피로가 가셨다.
그 덕분에 어두워지기 직전에 동굴로 돌아올 수 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군데군데 남겨둔 표식이 어둠 속으로 숨었을 것이다.
그럼 숲에서 미아가 되었겠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다.
서유림이 동굴 입구로 다가갔다.
그런데 그때였다. 갑자기 머리카락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뭔가 있다!’
동굴 입구였다. 뭔가가 슬쩍 움직인 것 같았다.
그런데 왜 지금은 보이지 않지? 잘못 본 건가?
서유림은 몸을 바짝 웅크린 채 동굴 주변을 살펴보았다. 분명 뭔가 움직인 느낌을 받았다.
그런데 아무리 노려봐도 더는 움직임이 없었다.
그제야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나무창을 잔뜩 움켜쥔 채.
동굴 입구에 서서 안을 향해 조심스럽게 인기척을 흘렸다. 제발 아리아나의 목소리가 대답해오길 바라며.
“아리아나, 저 왔어요. 안에 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