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7화 (7/196)

# 7

두 가지 약속 (1)

서유림이 동굴 밖으로 나왔다.

개선장군처럼 위풍당당하게······ 나오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입구가 너무 좁았다. 죄인처럼 납작 엎드려서 엉금엉금 기어 나와야 했다.

마물을 세 마리씩이나 해치웠는데, 이거 너무 모양 빠지네.

그래도 아리아나는 알아주겠지.

조금은 기대했다. 아리아나의 칭찬을.

“수고하셨어요.”

뭐가 이렇게 무덤덤해? 박수나 환호성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와, 멋져요!’ 같은 말 한 마디 정도는 해줘야 하는 것 아냐?

“수고는요. 그런데 입구가 너무 좁아서 제가 도와드릴 수가 없네요. 혼자 들어갈 수 있겠어요?”

아리아나가 입술을 깨물며 힘을 써보았다. 하지만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겉보기에는 멀쩡한데 속으로 부상이 무척 심한 모양이다.

“꼼짝을 못 하겠어요. 어쩌죠?”

어쩌긴. 사람이 동물과 다른 게 뭔데?

“잠깐 기다려보세요.”

서유림이 동굴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떨어진 적당한 크기의 나뭇가지들을 주워 모았다.

넝쿨도 적당히 가져왔다. 그리고는 마치 뗏목 만들 듯이 나뭇가지들을 넝쿨로 엮었다.

아리아나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래 사용할 것도 아니니 대충대충 만들었다. 대신 빠르게.

순식간에 탈것 하나가 완성되었다.

아리아나가 방긋 웃어주었다.

“손재주가 좋으세요.”

서유림도 뿌듯한 표정으로 아리아나를 바라보았다.

‘당연하지. 나도 남자거든!’

하지만 겨우 이런 것 가지고 생색낼 수는 없지. 그러면 괜히 밑천 내보이는 느낌이잖아.

“크기가 맞으려나 모르겠네. 누워보세요.”

서유림이 아리아나를 안아서 탈것 위에 눕혀주었다. 다행히 크기가 딱 맞았다.

서유림이 먼저 안으로 기어들어가서 넝쿨을 잡아당기는 식으로 탈것을 끌었다. 이렇게 하고 보니 탈것을 침대로도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조금만 더 푹신하면 좋겠군.

밖에서 커다란 풀잎이나 나뭇잎을 잔뜩 가져와서 탈것 위에 깔아주었다.

서유림이 봐도 완벽한 침대가 되었다.

“감사해요.”

뭘, 이정도 가지고.

그나저나 이제 뭐 하지?

빛의 축복이 사라져서 깜깜해진 동굴. 예쁜 아리아나와 단둘이 있으니 뭔가 굉장히 어색하다. 침 삼키는 소리가 음흉하게 들릴까봐 조심스럽다.

아리아나도 어색한지 고개를 숙인 채 앉아있다.

그런데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인다.

괜히 불쌍하네.

이게 남자의 보호본능인가?

그런데 가만. 요정이라고 해서 이슬만 먹고 살진 않을 테고.

“제가 먹을 것 좀 구해올까요?”

“그래주시겠어요? 사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 너무 죄송해서······.”

이왕 도와주기로 한 거라면 끝까지 확실하게 도와줘야 한다. 중간에 멈추면 얻는 것도 없이 고생만 한 꼴이 될 테니까.

“먹을 것 말고 또 필요한 게 있어요?”

“제 몸이 자연치료 되려면 최소한 한두 달은 걸릴 것 같아요. 그때까지만 절 좀 도와주실 수 있겠어요?”

서유림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한두 달?

이건 얘기가 다르잖아.

“그건 너무 긴데요. 제가 원하면 아무 때고 돌아갈 수 있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서유림의 목소리가 동굴을 격하게 울렸다.

“물론이죠. 원하시면 지금이라도 돌아가실 수 있어요. 제가 회복될 때까지 계속 머물러달라는 게 아니에요. 인간계로 돌아가셨다가 제가 부르면 와주시면 돼요.”

그럼 진작 그렇게 얘기를 하던가. 깜짝 놀랐네.

겨우 그런 정도라면 어렵지 않다.

하지만 아리아나의 말을 온전히 믿을 수가 없다. 예쁜 여자일수록 워낙에 요물들이 많아서.

집을 한 번 다녀와 봐야 믿음이 갈 것 같다.

“그럼 일단 인간계에 다녀올게요. 곧바로 다시 돌아오면 되잖아요.”

“지금 돌아가면 위험해요. 제가 유림씨 육체를 원상태로 회복시켜드린 후에 가셔야 해요.”

아, 그렇지!

기억난다. 서유림의 육체는 인간계에 남아있고 정신만 옮겨온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인간계의 육체는 식물인간처럼 힘을 쓰지 못했다.

“그럼 빨리 회복시켜주세요.”

“아직은 마력이 부족해요. 조금만 시간을 주세요.”

자꾸 불안해진다. 아리아나의 사기행각에 말려드는 기분이랄까?

‘나 괜찮은 거야?’

아리아나가 서유림의 걱정을 읽은 모양이다.

“절 믿어주세요. 마력이 채워지는 대로 반드시 육체를 회복시켜드릴게요. 원하시면 정령신의 이름으로 약속드릴 수도 있어요.”

정령신의 이름으로 약속?

아리아나를 믿지 못하는 것 같아서 조금 미안하긴 하지만, 뭐든 확실한 게 좋지 않겠는가?

그래, 체면 따질 때가 아니다.

“그럼 해주세요.”

“모든 약속은 정령신 앞에서 평등해요. 서로 같은 무게의 약속을 걸어야만 이루어져요.”

그런 것을 따질 계제가 아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하죠?”

“제가 마력을 회복할 수 있도록 유림씨가 도와주신다면, 저도 인간계에 있는 유림씨의 육체를 회복시켜드리겠어요. 정령신의 이름으로 약속합니다.”

아리아나가 서유림의 손등에 키스했다. 그리고는 서유림을 향해 자신의 손등을 내밀었다.

“유림씨도 약속하세요.”

똑같이 하면 되는 거겠지.

“약속합니다.”

아리아나의 손등에 키스했다.

그 순간 아리아나의 손등에 붉은색의 기하학적 무늬가 문신처럼 새겨졌다.

서유림의 손등에도 마찬가지였다.

“정령신께서 약속을 맺어주셨어요. 약속을 어기면 정령신의 저주를 받게 될 거예요.”

‘저주’라는 단어를 들으니 왠지 살벌하다.

하지만 그만큼 안심도 된다. 서유림만 약속을 지키면 아리아나도 약속을 반드시 지켜야 할 테니까.

“그런데 제가 완전히 치료될 때까지 도와주실 수는 없으세요? 대신 유림씨가 정령과 계약을 맺을 수 있도록 도와드릴게요.”

사실 큰 문제는 아니다. 아무 때나 자유롭게 집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이따금 찾아와서 도와주는 게 뭐가 어렵겠는가?

그런데 뒷말은 뭐지?

“정령과 계약을 맺는다고요?”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정령신의 후보입니다. 제 능력만으로도 정령과의 계약을 주선할 수 있어요. 염치없지만 부탁드려요. 그만큼 유림씨 도움이 꼭 필요해요.”

하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싸움은커녕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처지가 아닌가? 서유림이 도와주지 않는다면 마족에게 당하기 전에 굶어죽을 수도 있으리라.

한마디로 서유림이 생명줄이라는 얘기지.

그래서 정령과의 계약이라는 카드까지 꺼낸 것이리라.

문득 기대되었다.

“정령과 계약을 맺으면 좋은 점이 뭔가요?”

“정령과 계약을 맺으면 이곳 정령계에서뿐만 아니라 인간계에서도 정령의 도움을 받을 수 있어요. 장담하건데 유림씨의 성장에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자꾸 더 기대되게 만드네.

“어떤 식으로 도움이 되죠?”

“예를 들어서 물의 정령과 계약을 맺게 되면 대상자의 신체를 최상의 상태로 만들어줄 거예요. 막힌 기혈도 열어주고, 모든 병도 말끔하게 치료해줄 수 있어요.”

서유림의 눈이 활짝 떠졌다.

‘이게 무슨 기연 폭탄 맞는 소리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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