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선녀계곡에 선녀는 없고 OO이 있네. (2)
목소리가 또 들려왔다. 이번 목소리는 아까보다 훨씬 또렷했다. 비록 희미하긴 하지만 확실히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다.
나이 어린 여자의 목소리가 분명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 무엇보다도 두려움이 앞섰다.
온갖 상상력이 총동원되었다.
귀신일까?
아니면 정말로 도움이 필요한 여자일까?
말도 안 돼. 이 밤에 무슨······.
“제발······ 도와주세요.”
목소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당장 사그라져도 이상할 게 없을 만큼 미약했다. 두려운 와중에도 연민이 느껴질 정도였다.
도저히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저러다가 정말로 죽기라도 하면······.
결국 서유림이 도와주지 않아서 죽은 게 아닌가? 그 죄책감을 어찌 감당하라고?
두려워 미칠 지경이었지만, 발걸음은 천천히 목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스스로를 격려하면서.
‘유림아. 그렇게 평생 두려움에 떨며 살래? 그러니까 네가 왕따를 당하는 거잖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용기를 내보자. 응? 유림아!’
그렇게 서유림은 악마의 주둥이 같은 숲속 어둠을 향해 천천히 몸을 집어넣었다.
“도와주세요. 여기에요.”
걸음을 옮길수록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거리가 가까워지는 게 분명했다.
그만큼 두려움도 커졌지만 이미 내친걸음이었다. 여기까지 와서 발걸음을 되돌릴 수는 없었다.
용기를 내서 목소리를 높여보았다.
“안 보여요. 어디세요?”
“여기요.”
목소리의 방향을 따라서 계속 걸음을 옮겼다.
‘앗! 저기다!’
보였다. 시커먼 어둠 사이로 희미하게 사람의 윤곽 같은 게 있었다. 나무에 기대어 앉아있는 듯했다.
용기를 내서 조금 더 다가가 보았다.
윤곽이 조금씩 또렷해졌다.
가녀린 몸매에 풍성한 머리카락이 먼저 확인되었다.
‘여자가 분명해.’
서유림의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온몸이 얼음처럼 굳어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사람 맞아?
사람이 저렇게 예쁠 수 있는 거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외모였다. 어둠 속에서도 그 아름다움이 빛날 정도였다.
청순, 요염, 발랄, 풋풋.
여자를 표현하는 그 어떤 단어를 가져다 붙여도 부족함이 없는 여자였다. 아니, 단어가 부족했다.
게다가 더욱 놀라운 것은······.
‘모델인가? 저 옷은 또 뭐야?’
꼭 커다란 나뭇잎으로 만든 옷 같다. 등에는 얇은 망토 같은 것도 걸치고 있다.
중요부위는 모두 가리고 있었지만, 어깨며 윗가슴이며 배며 허벅지며 드러난 부분이 워낙 많아서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다고 외면하듯 고개를 돌릴 수도 없고.
“부탁해요. 도와주세요.”
서유림이 마지막 두 걸음을 마저 다가갔다. 무릎을 살짝 굽히며 여자의 상태를 살폈다.
“어디 다치셨어요?”
“마력이 다해서 꼼짝할 수가 없어요.”
서유림이 멍한 표정을 했다.
‘마력이 다해? 그게 무슨 말이야?’
혹시 정신에 문제가 있는 여자일까? 하지만 그렇게 보기엔 눈빛도 너무 맑았고, 말투도 반듯했다.
“마력······ 이라니요?”
“전 인간계 사람이 아니에요. 정령계의 요정이에요.”
문득 의심이 들었다.
몰래카메라인가?
아니면 진짜 정신병자인가?
“믿기 어려우신 것 알아요. 하지만 달리 설명드릴 방법이 없어요. 부탁인데 제가 정령계로 돌아갈 수 있게 도와주세요.”
“어떻게······ 도와드려야 하는데요?”
속는 셈치고 물어보았다. 들어서 손해 볼 건 없을 테니까.
“마력을 조금만 나눠주세요. 그래야 귀환마법을 사용할 수가 있어요.”
“전 마력이 뭔지도 모르는데.”
“여긴 마력 대신 체력만 존재하는 것 같아요. 제게 체력을 나눠주세요.”
“어떻게 나눠드려야 하는데요?”
“절 도와주신다는 마음으로 키스해주세요.”
아, 나 미치겠네. 이거 장난 같은데.
어디까지 가나 싶어서 계속 물었는데 대화가 점점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괜히 놀림 당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다쳤다는 것도 거짓말 아냐?
“부탁이에요. 이곳은 마나가 존재하지 않아서······ 더는 버틸 수가 없어요. 제발 도와주세요.”
“그냥 키스만 해드리면 되는 건가요?”
“예. 절 도와주신다는 마음으로······.”
그래 결정했다. 도와달라는데 까짓 도와주지 뭐.
밑져야 본전 아닌가? 여자에게 키스 한번 한다고 어떻게 될 것도 아니고.
게다가 눈앞의 여자를 봐라. 세상에 이런 미녀가 어디 있나? 이 여자와 비교한다면 TV에서 보았던 걸그룹이며 여배우 모두 찌그러진 오징어가 될 것이다.
이건 일생일대의 기회다.
몰래카메라면 어때? 한번 속아주고 평생의 추억으로 간직하는 거다.
“그쪽이 부탁하셔서 들어주는 겁니다. 나중에 다른 소리 하시면 안 돼요.”
“감사해요.”
‘감사하긴. 오히려 내가 감사하지.’
여자가 서유림의 입술을 기다렸다. 간절한 표정으로.
서유림이 천천히 다가갔다.
눈이라도 좀 감지. 너무 예쁘니 부담스러워서 못 하겠다.
‘차라리 내가 감는 게 낫겠다.’
서유림이 눈을 감고 여기쯤 있겠다 싶을 여자의 입술에 입맞춤을 해주었다.
와! 달콤하다. 부드럽기도 하고 향긋하기도 하고.
이것이 진정한 키스로구나. 살아오면서 두 명의 여자와 사귀어보았지만, 이런 짜릿한 키스는 경험해보지 못했다.
입술뿐만 아니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몸에 전율이 느껴졌다. 마치 세포 하나하나가 짜릿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더 하고 싶었다. 계속 더. 계속해서 갈증이 일었다.
그런데 가만.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나약함이랄까? 공허함이랄까?
키스의 짜릿함 때문에 외면되었던 몸 상태가 비로소 느껴진 것이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키스를 계속하고 싶었지만, 서있을 힘도, 앉아있을 힘도 없었다.
‘내가 왜 이러지?’
문득 여자의 말이 생각났다.
[제게 체력을 나눠주세요.]
‘설마 키스로 내 체력을 빼앗아간 건가?’
믿기지는 않지만, 그런 것 같다. 더는 버틸 힘이 없다.
서유림이 그대로 풀썩 쓰러졌다.
여자가 그런 서유림을 받아서 자신의 무릎 위에 눕게 해주었다.
“감사해요. 덕분에 정령계로 돌아갈 마력을 되찾았어요.”
‘다, 다행이군요. 그런데 나는 왜······?’
서유림이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체력이 너무 고갈되었다.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많은 체력을 가져간 것 같아요. 어쩌죠? 인간계에서는 그 체력을 되찾을 방법이 없는데.”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럼 평생 이렇게 식물인간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이야?
말도 안 되는 소리 같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꼴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 난 어쩌라고? 이 요물아.’
생각하는 것조차 힘들다.
“방법이 하나 있어요. 저와 함께 정령계로 가요. 그럼 제가 체력을 회복시켜드릴 수 있어요. 저도 도움이 조금 더 필요하고요. 그렇게 하시겠어요?”
이곳을 떠나라고?
그건 안 돼. 부모님은 어쩌라고? 내 동생들은 어쩌라고? 우리 가족은 내가 없으면 안 돼.
“걱정하지 마세요. 육체는 여기 남아있고 정신만 옮겨가는 거니까. 원하시면 언제든지 인간계로 돌아오실 수 있어요.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아요. 잠깐 꿈을 꾼다 생각하시면 돼요.”
왠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거절할 수가 없다. 지금 이 꼴로는 이곳에 남아도 가족을 돌볼 수 없을 것이다. 보나마나 병원 신세가 뻔한데.
게다가 말할 힘도 없고, 고개를 흔들 힘도 없다.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죄송해요. 이번 한 번만 제 뜻대로 할게요.”
여자가 서유림의 이마에 자신의 손을 댔다. 눈을 감고는 혼잣말하듯 입술만으로 뭔가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갑자기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마치 깊은 잠에 빠져드는 느낌이었다.
경험이 없어서 정확한 표현인지는 모르겠지만, 꼭 강력한 수면제를 먹거나 마취를 당한 기분이었다.
의식이 자꾸만 나락으로 떨어졌다.
‘젠장, 내게 왜 이런 시련이······.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