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내 미친 잠재력-3화 (3/196)

# 3

선녀계곡에 선녀는 없고 OO이 있네. (1)

부다다당.

오토바이소리도 아니고.

길에서 멀리 벗어나길 잘했다. 하마터면 이 흉측한 소리를 구매팀 직원들에게 노출할 뻔했다.

그래도 살 것 같다.

‘아, 이 해방감!’

온갖 근심이 한 번에 사라지는 느낌이다.

그래서 화장실을 해우소라고 부르는 모양이다.

뒷주머니에서 화장지를 꺼내 마무리했다. 과민성대장증후군 환자는 이런 일이 자주 있기 때문에 웬만하면 비상용 화장지를 휴대하고 다닌다.

볼일을 마치고 다시 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다들 어디 갔지? 발걸음소리도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시간을 너무 많이 지체한 모양이네.’

서둘러서 길을 따라 올라갔다.

이 정도 속도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겠지.

그런데 아무리 올라가도 구매팀의 종적을 찾을 수가 없다.

순간 느낌이 왔다.

‘또 나를 놀리려는 거로군.’

한두 번 당해봤어야지.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보나마나 뻔하다. 서유림 겁주겠다고 팀원들끼리 서둘러서 산을 올라간 것이다.

좀 무섭긴 하네. 뭐가 보여야 말이지.

그렇다고 먼저 산을 내려갈 수는 없는 일이다. 무슨 잔소리를 얼마나 들으려고?

서둘러서 올라가자. 그러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을 것이다. 저쪽에는 여자들도 세 명이나 있으니까.

서유림이 부지런히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놈의 저질체력 때문에.

‘하악. 하악.’

조금 서둘러 걸었다고 벌써 숨이 차다. 어떻게 여자들보다도 체력이 더 약한 것일까?

게다가 적당히 취하기까지 해서 숨이 더욱 가쁘다.

아무래도 따라잡는 건 무리다.

속도를 늦췄다. 대신 꾸준히 걸었다.

올라간 사람은 다시 내려오게 되어있는 법. 서유림을 골탕 먹이겠답시고 산길을 우회하는 수고는 하지는 않을 테니까 결국은 마주치게 될 것이다.

그런데 20분쯤 더 올라가다가 걸음을 멈춰야 했다.

“어, 뭐야? 길이 끝났네.”

길이 계속 이어지긴 했다. 하지만 포장길은 끝나고 험한 산길로 이어졌다. 랜턴이 있어도 위험할 길이다.

설마 이 산길을 따라 올라갔을까?

그건 아닐 것이다. 남자들끼리만 있다면 모를까. 여자들도 있는데.

‘아! 그럼 그때 위로 올라간 게 아니라 밑으로 내려간 거였구나!’

비로소 알 것 같다. 완전히 헛다리짚은 것이다.

“젠장, 기운 빠지네!”

서유림이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두렵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지만, 일단은 조금 쉬어야 할 것 같다.

앉아서 자신의 신세를 생각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휴우. 내가 어쩌다 이 꼴이 되었지?’

학교에만 왕따가 있는 게 아니다. 직장에도 왕따가 있다.

서유림이 딱 그 꼴이었다.

서유림에게 특별한 문제가 있어서는 아니다. 그래서였다면 학창시절에도 비슷한 경험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유림의 학창시절은 너무도 원만했다.

그러면 왜 갑자기 왕따가 되었느냐?

시작부터 한동민에게 딱 찍혀서다.

강은영 사건 때문에 찍힌 것은 아니다. 물론 그때도 좋지 않은 인상을 주긴 했지만, 결정적인 계기는 회식 사건이었다.

서유림은 2년간의 계약직원 생활 끝에 정규직원으로 채용되는 데 성공했다. 그게 작년 봄의 일이다.

“오늘 회식합시다. 서유림씨 축하해줘야지. 대신 팀장님과 대리님 빼고 우리끼리.”

고등학교 동창 오영훈이 분위기를 주도했고, 그렇게 아래 직원들끼리 오붓하게 술집으로 향했다.

그때 기분 최고였다. 비로소 사람이 되었구나 싶을 정도로.

술도 그날따라 입에 착착 달라붙었다. 게다가 옆에서 자꾸 권하니 마시고 또 마셨다. 혀가 꼬일 정도로.

“난 솔직히 한동민 대리님 마음에 안 들어.”

역시 회식의 안주로는 윗사람이 최고 아니겠는가? 씹을수록 술맛 돋아주는 신비의 안주.

게다가 서유림은 쌓인 것도 많았다.

특히 한동민에게. 대놓고 면박을 주는 일은 부지기수였고, 사적인 심부름도 서슴지 않고 시켰다.

운전기사 역할도 많이 했다. 새벽에 자다가 불려나간 적도 있고, 심지어 일요일 늦은 밤에 불려나간 적도 있다.

그때마다 한동민은 미모의 아가씨와 함께 있었다. 한번은 강은영과 함께 있었던 적도 있다.

‘개새끼. 대리운전을 부르던가.’

여자 앞에서 폼 좀 잡고 싶었던 거겠지. 내가 이런 놈이라고. 내 전화 한 통화면 당장 달려올 똘마니가 이렇게 많다고.

대리운전을 부르면 그런 걸 못 보여주니까.

이게 무슨 직장동료인가? 부하직원이지.

사실 부하직원에게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는다. 이건 완전히 21세기 판 신 노예다.

술도 취했겠다. 한동민도 없겠다. 다들 마음 통하는 동료들이겠다.

서유림은 마음껏 씹어댔다.

“내가 진짜 기분 더러워서······.”

한 10분 정도는 혼자서 떠들어댄 것 같다. 오로지 한동민에 대한 비난으로만 말이다.

그런데 젠장, 거기에서 갑자기 그놈 목소리가 들렸다.

“서유림씨. 나한테 그렇게 불만이 많았어?”

한동민이었다. 바로 옆방에서 구매팀장과 따로 자리를 마련하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옆에서 감시하는 것처럼.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실제로 그랬다. 한마디로 덫을 놓고 서유림의 반응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첩자가 누구인지도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오영훈이 꾸민 일이었다. 서유림이 팀장과 한동민을 안주 삼아 씹도록 분위기를 유도한 것도 모두 고의적이었다.

물론 한동민이 시킨 일이겠지만.

‘개새끼. 한동민 똥구멍 핥는 것으로도 부족해서 동창마저 희생양으로 삼아? 그러고도 네가 동창이냐?’

물론 서유림 잘못도 있다. 아무도 믿지 말았어야 했는데.

게다가 평소에 너무 쉽게 보인 점도 있었다. 좋은 건 좋다. 싫은 건 싫다. 의사표현을 확실하게 해서 ‘내가 쉬운 놈이 아니다.’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줬어야 했는데.

한마디로 호구 잡힌 거지.

“하아, 난 왜 이렇게 자신감이 부족하지?”

병신. 병신.

어쨌건 그걸로 끝이었다.

구매팀은 한동민 세상이다. 팀장과 오영훈은 한동민과 아삼륙으로 통했고, 강은영은 한동민의 정부나 마찬가지였으며, 그나마 사람이 괜찮아 보이는 나영미 주임이나 강철중도 한동민 눈 밖에 날 짓은 하지 않았다.

‘에휴, 누구를 탓하랴? 내가 병신이지.’

신세한탄을 너무 오래했다.

이제 슬슬 내려가 볼까? 먼저 내려가서 낄낄대고 있을 구매팀 동료들(?)을 만나야지.

서유림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도와주세······.”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다. 두려움에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무슨······ 소리지?’

바람소리인가 싶을 정도로 희미했다. 하지만 바람소리는 분명히 아니었다. 여자 목소리 같았다.

언제든지 달아날 준비를 한 채 고개만 돌려서 숲속을 바라보았다. 숲속에 자리 잡은 시커먼 어둠이 서유림의 눈빛을 빨아들이는 듯했다.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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