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선녀계곡으로 M.T. (2)
영월군 선녀계곡 야영장.
주말도 못 쉬고 끌려와서 짜증은 좀 나지만, 그래도 울창한 숲속에 들어오니 기분은 상쾌하다.
구매팀과 생산1팀의 족구시합이 벌어졌다.
두당 5만 원씩 무려 20만 원이 걸려있다.
“리시브. 리시브. 좋았어!”
족구장에는 한동민의 목소리밖에 안 들린다. 짜증날 정도로 시끄럽다.
하지만 대표이사 아들에게 감히 누가 조용히 하라는 말을 하겠는가?
오영훈이 리시브한 공이 그라운드 안에서 안정적으로 바운드되었다. 방향은 정확히 서유림 앞.
“토스. 토스.”
‘조용히 좀 하라고. 네 목소리 때문에 시야가 다 흔들리잖아.’
서유림이 비록 약골이긴 하지만 운동신경은 제법 있는 편이다. 군대에서도 족구 좀 한다는 소리 많이 들었다.
스포츠는 리듬과 타이밍이 중요한 법이지.
리듬을 타며 정확한 타이밍에 공을 부드럽게 토스해주었다.
‘됐어. 적당히 잘 떴어.’
한동민도 만족스러운 모양이다. 자신에게 완벽한 공격기회가 오자 비로소 입이 다물어진다.
그런데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이까지 악물고 있다.
또 욕심 부리네.
아니나 다를까? 족구가 아니라 축구를 해버렸다.
뻥!
저렇게 날려먹은 점수만 벌써 몇 점째야? 그렇게 할 거면 뒤로 빠져서 리시브나 하던가.
그런데 한동민이 갑자기 서유림을 노려본다.
“네트에 바짝 붙이라고. 여기까지 바짝! 아, 진짜 못해먹겠네.”
아까는 너무 붙었다고 지랄하더니 이젠 또 너무 멀다네.
하지만 더는 기회도 없다. 이번에 실축한 점수가 생산1팀의 매치포인트였다.
“업무를 못하면 눈치라도 빠르던가. 눈치도 없으면 운동이라도 잘하던가. 아, 스트레스 받아. 씨발!”
저 대가리를 축구공 삼아서 바나나킥 한번 감아 차고 싶다.
오영훈이 재빨리 다가가서 한동민에게 딸랑딸랑 종을 울린다.
“원래 구멍 한 명 있으면 천재 스트라이커가 들어와도 못 이기는 게 족구잖습니까. 들어가서 저녁이나 드시죠.”
하여튼 아부의 천재라니까. 저러니 입사 3년차 만에 벌써 대리 승진을 목전에 두고 있는 거겠지.
‘나는 왜 저게 안 될까?’
서유림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식당으로 따라 들어갔다.
“팀장님, 제가 한잔 드리겠습니다.”
“대리님도 한잔 하시죠.”
“권진아씨도 한잔 해. 술은 대학교에서 많이 마셔봤을 것 아냐?”
“아뇨. 술 잘 못 마셔서······.”
“에이, 왜 빼고 그래? 괜찮다니까. 여기 다 직장 동료들이야. 이것도 업무의 하나라고.”
“그럼 조금만······.”
“거기 소주 좀 건네줘요.”
왁자지껄. 시끌벅적.
술잔이 오갈수록 식당은 더욱 시끄러워진다. 너무 시끄러워서 바로 옆에서 하는 이야기도 알아듣기 힘들다.
한동민은 아까부터 권진아를 옆에 착 붙여놓고 있다. 계속해서 술을 권하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권진아씨는······ 해요?”
“죄송해요. 잘 못 들었어요.”
권진아가 못 알아들어서 죄송하다는 표정으로 한동민에게 귀를 가까이 댄다.
한동민이 권진아의 어깨에 손을 살짝 얹고는 가까이 끌어당긴다. 자연스럽게.
한동민이 여자를 유혹하는 전형적인 방법이다. 이런 시끄러운 분위기에서 일부러 목소리를 작게 하고는 저렇게 얼굴과 얼굴을 밀착시키는 것이다.
순진무구한 권진아가 저런 늑대에게 당하는 꼴을 보니 속이 뒤집힐 것 같다.
하지만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아니, 일부러 시선을 피한다. 한동민의 작업에 방해되어 찍히기라도 하면 회사 생활 힘들어질 테니까.
서유림도 일부러 고개를 돌렸다. 서유림이 나선다고 달라질 상황도 아닌데 뭐.
사실 이런 경험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강은영도 고졸로 입사하자마자 저런 식으로 당했었다.
그때 나서지 말았어야 했는데. 능력도 없는 주제에 쓸데없이 오지랖만 넓어가지고.
게다가 눈치까지 없었다.
알고 보니 강은영도 그런 상황을 바라고 있었다. 한마디로 자신의 몸으로 한동민을 유혹하던 중이었다. 한동민이 대표이사의 아들인 걸 알고 재빨리 방향을 잡은 거다.
그것도 모르고 바보같이.
그때 일을 생각하면 아직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어쩌면 권진아도 강은영과 같은 부류일지도 모른다. 봐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해야 한다.
식사 겸 술자리는 늦은 저녁까지 이어졌다. 깊은 산속이라서 그런지 밖은 어느새 칠흑처럼 어두웠다.
“아, 취한다. 팀장님. 술도 깰 겸, 구매팀 단합도 할 겸, 함께 산책이나 할까요?”
팀장이 한동민의 제안을 거절한 적이 있던가?
구매팀의 실질적인 팀장은 한동민이나 마찬가지다. 배기열은 무늬만 팀장일 뿐이지 실상은 한동민의 딸랑이 역할이다.
“좋지.”
함께 밖으로 나왔다.
“너무 어두운데. 누가 가서 랜턴 한두 개만 가져와봐.”
서유림이 얼른 나서려고 했다. 그런데 권진아가 한발 빨랐다.
“제가 가져올게요.”
그리고는 얼른 뛰어갔다.
한동민이 서유림을 못마땅하게 바라보았다.
“그런 일에 꼭 막내를 보내야 하겠어? 그것도 갓 입사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핏덩이를? 서유림씨는 도대체 하는 일이 뭐야?”
저놈이 말끝마다 계속 반말이네. 나이도 어린놈이.
그리고 원래는 내가 가려고 했거든.
“함께 다녀오겠습니다.”
서유림도 얼른 권진아를 뒤따라가려고 했다.
“됐어. 랜턴 하나 가져오는데 둘씩이나 가서 뭐하려고? 서유림씨도 가만 보면 음흉한 데가 있다니까.”
대체 무슨 상상을 하는 거야? 뭐 눈에는 뭐 밖에 안 보인다더니.
그러는 사이 권진아가 랜턴을 가져왔다. 오영훈이 랜턴을 받아들고 한동민, 배기열과 함께 나란히 선두에 섰다.
여자들은 여자들끼리 뭉쳤고, 서유림은 자연스럽게 강철중과 짝이 되어서 맨 뒤에서 걸었다.
고졸인 강철중은 서유림보다 두 살 어리지만, 입사는 3년이나 빠르다. 맡은 업무가 창고관리다보니 사무실에 있는 시간보다 창고에 있는 시간이 훨씬 많다.
게다가 워낙에 과묵한 성격이라서 말을 걸기도 껄끄럽다.
그러다 보니 뒤쪽은 그저 정적만 가득하다.
“공기 좋네. 이왕 걷기 시작한 것, 임도 끝나는 데까지 한번 가보죠.”
누가 운동 마니아 아니랄까봐 한동민이 의욕을 보인다.
오영훈이 딸랑딸랑 아부종을 흔든다.
“그거 괜찮겠네요. 길도 좋고.”
포장이 잘 되어 있어서 걷기 딱 좋은 길이긴 했다. 그렇게 예정에도 없던 야간산행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언제까지 올라가는 거야?
벌써 1시간을 넘게 걸었는데 길이 끝날 줄을 모른다.
서유림은 언제부턴가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생리현상 때문이었다.
‘이놈의 과민성대장증후군!’
도저히 안 되겠다. 의지만으로 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자칫 평생의 웃음거리가 될 수 있는 능욕을 당할 수도 있다.
서유림이 강철중에게 조용히 이야기했다.
“저 잠깐 화장실 좀······.”
강철중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그제야 서유림이 슬쩍 뒤로 빠지면서 숲속으로 들어갔다.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려고 했는데,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가 사정없이 들려온다.
투둑! 우두둑!
한동민이 고개를 돌렸다. 저만치 사라지고 있는 서유림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저사람 어디 가는 거야?”
“화장실이 급한 모양입니다.”
강철중의 대답에 한동민이 얼굴을 찌푸렸다.
“가지가지 하네, 정말.”
그러다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갑자기 눈빛을 초롱초롱 빛냈다. 목소리를 낮추고 아래쪽을 향해 손짓했다.
“다들 내려갑시다.”
“예? 서유림씨는······.”
“그 사람은 담력을 좀 키워야 해.”
“하지만······.”
“길도 안전하겠다. 뭐가 걱정이야? 서유림씨를 위한 거라니까. 굳이 남아야겠다는 사람은 남아. 따라올 사람은 따라오고.”
한동민이 시간이 없다는 듯 앞장섰다. 발걸음소리를 죽이기 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이 역력했다.
어쩔 수 없다. 서유림을 위해서 한동민 눈 밖에 날 수는 없는 일.
그렇게 구매팀 직원들은 순식간에 썰물처럼 사라졌다.
서유림 혼자만 숲속에 남겨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