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선녀계곡으로 M.T. (1)
“서유림씨. 어제 내가 지시한 거는 다 해놨지?”
“안 했습니다.”
뭐야? 저 당당한 태도는?
게다가 못한 게 아니라 안한 거라고?
“서유림씨, 아침 잘못 먹었어? 모가지 잘리고 싶어? 집에서 푹 쉬게 해줄까?”
“네가 날 자르겠다고? 후훗! 차라리 내가 나가준다. 나 없이 회사가 얼마나 잘 돌아가는지 보자.”
말뿐이 아니었다. 서유림이 품안으로 사직서를 꺼내 던졌다.
한동민이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회사를 그만둔다고? 서유림이?
그럼 재고관리는 누가 하는데?
단가 산출은 누가 하는데?
비로소 서유림이 얼마나 중요하고 필요한 존재인지 느껴졌다.
“그건 안 돼!”
“안 되기는 개뿔. 그러게 있을 때 잘하라잖아.”
“제가 잘못했습니다, 형님!”
한동민이 울며불며 매달렸다.
서유림은 그 모습을 보니 십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속이 후련할 수가.
절로 흐뭇한 미소가 지어졌다.
* * *
“서유림씨, 내 말 안 들려?”
“······예?”
서유림이 멍한 눈을 크게 떴다.
“왜 아침부터 실실 쪼개고 그래? 재수 없게. 내가 어제 지시한 것 다 해놨냐고.”
“아, 그거요. 물론입니다. 여기 있습니다.”
제길, 또 헛생각을 했었군.
서유림이 얼른 서류철을 넘겨주었다. 자정 넘어서까지 야근하면서 간신히 마무리한 서류였다.
한동민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서류를 받았다.
아니나 다를까, 서류를 받자마자 인상부터 찌푸렸다.
“표지가 이게 뭐야? 촌스럽게. 서유림씨 능력이 이것밖에 안 돼? 이래서 지방대 출신은 기름밥이나 먹여야 한다니까. 돌아버리겠네.”
‘나야말로 돌아버리겠다.’
표지가 촌스러워? 보고서 대신 작성해준 것만으로도 고맙게 생각해야지.
“서유림씨는 착한 거는 좋은데 업무능력이 너무 떨어진다니까.”
착하다고?
‘참는 거다, 이놈아! 나라고 성깔 없겠냐? 진짜 한번 보여줘? 제대로 한판 엎어버리고 사표 던지고 나와?’
마음은 굴뚝같았다. 나에게도 마초 본능이 꿈틀거리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부모님이 직장을 잃은 지금은 서유림이 집안 경제를 혼자 책임져야 하니까. 일곱 살이나 어린 여동생 서미진의 학비도 대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자면 이 직장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있어야 한다.
“표현이 왜 이렇게 유치해? 이게 보고서야 소설이야? 일을 맡긴 내가 잘못이지. 서유림씨. 이거 파일로 보내줘요. 내가 처음부터 다시 작업하게.”
“알겠습니다.”
으득!
서유림이 어금니를 바짝 깨물었다.
‘참자. 참는 게 이기는 거다. 그러면 언젠가는 내 인생에도 해 뜰 날이 오겠지.’
하지만 오늘은 해 뜰 날이 아닌 모양이다. 서유림을 향한 한동민의 까칠함이 아침부터 오후까지 계속 이어졌다.
하긴,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뭐.
‘저 새끼는 날 갈구는 재미로 사나?’
그런 게 분명했다. 구매팀 직원이 여덟 명이나 되는데, 한동민 아래로도 여섯 명이나 있는데, 유독 서유림한테만 짖어댔다.
셰퍼드처럼.
“서유림씨. 회사 커피 마시러 왔어? 어떻게 자리에 앉아있는 꼴을 못 봐?”
화장실 다녀온 거 포함해서 겨우 7분 자리 비웠다.
그걸 가지고 개처럼 짖냐? 왈왈.
“서유림씨. 다른 사람 바쁘면 전화 좀 대신 받아주고 그래. 그렇게 배려심이 없어? 키만 멀대 같이 커가지고. 아휴, 속 터져.”
나도 바쁜 거 안 보이냐?
그냥 개가 짖는다고 생각했다. 왈왈.
오늘따라 한동민의 까칠함이 심하다. 퇴근시간이 다 되어서까지 속을 박박 긁는다.
“서유림씨. 내가 파일 보낸 거 열어봤어요?”
‘열어보기야 했지.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보낸 건데? 유럽 라벨지 문구 수정은 강은영씨 업무잖아.’
“오늘 강은영씨 늦게까지 야간출장 있어요. 서유림씨가 대신 수정 좀 해주세요.”
저 새끼는 꼭 저런 부탁 할 때만 존댓말 쓰더라. 재수 없게.
그리고 야간출장? 너랑 호텔에 그 짓 하러 가는 것도 출장이냐?
솔직히 부럽긴 하다.
어떤 놈은 돈 많은 부모 만나서 능력도 없는 주제에 군림하듯 살고, 어떤 놈은 가난한 부모 만나서 밤낮없이 몸을 굴려도 먹고 살 걱정에 머리가 쪼개지고.
나한테는 저런 행운 안 찾아오나?
“요즘 유럽의 식품 라벨규정 강화된 거 알죠? 월요일 아침까지만 해놓으면 되니까 서두르지 말고 꼼꼼하게 잘 확인해서 수정하세요.”
제길, 오늘 금요일인데.
남들 불금이라며 퍼마시고 흔들어댈 시간에 난 혼자 사무실 귀신 돼서 키보드나 두드리게 생겼구나!
차라리 잘됐지 뭐. 어차피 애인도 없는데.
“아, 그렇다고 너무 늦게까지 야근하진 말고. 내일 엠티 가려면 새벽같이 나와야 할 테니까.”
‘아, 맞다! 내일이 회사 전체 엠티 가는 날이었지?’
정신없이 살긴 했나보다 내일 M.T.마저 깜빡하고 있었다니.
‘그런데 가만! 그럼 라벨지 수정작업을 언제 하라는 거야?’
1박2일 M.T. 다녀오면 일요일 늦은 오후에나 서울에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일요일 저녁에 나와서 이 짓을 하라고?
이건 아니잖아.
서유림이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한동민의 눈빛이 조금 매서워졌다.
“왜? 불만 있어?”
“아, 아닙니다.”
젠장, 나는 대체 왜 이럴까?
왜 싫다는 말을 못 하는 걸까?
왜 저놈 눈빛만 보면 심장이 오그라드는 걸까?
뭐가 무서워서?
나도 성깔 있는데.
수틀리면 그냥 확 엎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있는데.
‘휴우, 참자. 참아. 성깔 부려봤자 나만 손해다.’
어차피 한동민은 금방 팀장으로 승진한다. 그러면 부서를 옮길 테고, 그때부터는 좀 편해질 거다.
“팀장님. 출장 때문에 먼저 나가보겠습니다. 강은영씨, 가지.”
한동민이 팀장에게 통보하듯 이야기했다.
팀장도 당연히 한동민 편이었다. 직급도 낮고 나이도 어리지만 무려 대표이사의 아들이 아닌가?
“그래요. 잘 다녀와요. 나도 그만 퇴근해야겠네. 내일 봅시다.”
“저도 이만 퇴근하겠습니다.”
“저도······.”
하나둘 퇴근 행렬에 참여했다.
고등학교 동창인 오영훈 주임도 마찬가지였다.
“서유림씨 수고. 내일 보자.”
서유림을 향해 손 한 번 살짝 들어보이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퇴근한다.
‘서유림씨? 배신자 새끼. 넌 동창도 아냐, 인마!’
그나마 권진아만이 서유림을 챙겨준다.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권진아는 대학교를 갓 졸업한 인턴사원. 아직 순수해서 그런지 서유림을 가장 많이 챙겨준다.
‘그래. 네가 동창보다 열 배는 낫다.’
“아냐,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작업해야 하는 거라서 내가 직접 해야 해.”
“그럼 먹을 거라도 좀 사다드릴까요?”
“괜찮아. 이따 잠깐 나가서 먹고 오지 뭐.”
하지만 권진아는 굳이 서유림을 위해서 햄버거를 사다주었다. 그것도 세트메뉴로.
“안 그래도 되는데. 자, 햄버거 값.”
“아니에요. 그냥 제가 사드릴게요.”
권진아가 손을 저었다. 그리고는 도망치듯이 퇴근했다.
그 모습이 예뻤다.
하긴, 원래 모습도 바라보기 부담스러울 정도로 예쁘다. 그러니 구매팀뿐만 아니라 명진식품의 모든 총각들이 권진아만 보면 침을 질질 흘리지.
게다가 성격도 착하고.
서유림도 그런 권진아의 매력에 이따금 가슴이 두근거린다.
하지만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강은영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단 말인가?
‘넘볼 걸 넘봐야지. 송충이는 솔잎을 먹고 살아야 한다.’
서유림이 작업에 열중했다.
시각은 어느새 밤 열한 시. 라벨지 작업을 끝내려면 아직도 두세 시간은 더 일해야 한다.
하지만 더는 무리다. 가뜩이나 허약체질인데다 요즘 야근을 너무 많이 했다. 이러다가 병난다.
‘휴우, 어쩔 수 없지. 나머지는 일요일에 하자.’
내일은 M.T. 때문에 평소보다 훨씬 일찍 출근해야 할 테니까.
그런데 무슨 M.T.를 그렇게 멀리까지 가?
강원도 영월군 선녀계곡.
말 그대로 깊은 산골짜기다.
그런데 선녀계곡이라.
이름은 마음에 드네.
이참에 진짜 선녀 한 명 만났으면 좋겠다. 이놈의 팔자 좀 고쳐보게.
서유림도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