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4화
카일과 황제가 이끄는 군대는 파죽지세로 진격했고, 마침내 과거 아픈 기억이 남아 있는 그 땅에 도착했다.
“진짜 과거의 흔적은 없군.”
“완전히 부쉈다가 새로 지었을 테니 말이야.”
안타까워하는 황제의 옆에서 카일이 말했다.
그들의 눈앞에 있는 것은 과거 핵타비움이라고 불리던 루마니스 제국의 수도. 아니, 수도였던 곳이었다. 지금은 뉴 에덴이라고 불리고 있었다.
높은 외성 벽과 중세의 건축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들, 그 가운데에 우뚝 솟은 왕성을 자랑하고 있던 과거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지금의 뉴 에덴은 아스팔트 도로와 아파트 단지로 추정되는 주거 단지와 빌딩들이 가득한 도시가 되었다.
“개자식들……. 이번에는 내가 네놈들이 만든 것을 다 없애 주마.”
분개하는 황제를 보고 옆에서 카일은 생각했다.
‘나 같으면 저래도 그냥 쓰겠다.’
현대적인 상하수도 설비와 관개 시설이 추가된 도시를 굳이 부숴야 할 이유가 뭐란 말인가?
‘뭐, 내 알 바는 아니지.’
카일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이 전투에서 이기고 세계 정부를 이 세계에서 몰아내는 것뿐이었다.
“이게 마지막이기를…….”
카일이 그렇게 말했을 때, 옆에 검은 바람이 다가와서 말했다.
“주인님, 병력의 배치가 끝났습니다.”
그 말을 들은 카일은 황제 쪽을 흘깃 바라보더니 말했다.
“시작하라.”
“옛!”
카일의 명령과 동시에 대륙의 강자들이 일제히 뉴 에덴을 향해서 전진했다.
은장미 기사단을 태운 그리폰이 날아올랐고, 투란 전사단이 이끄는 기마 부대가 돌격했다. 그 뒤를 따라서 돌입한 특전사 부대에 이어 자신들의 나라를 되찾겠다고 돌격하는 구스타프 공작과 그의 기사들까지……. 이들은 하나하나가 이미 초인이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의 강자들이었다.
그런 강자들에게 맞서서 세계 정부 역시 총력을 기울인 듯했다.
“쏴라!”
“물러서지 마라! 반드시 저지해야 한다!”
세계 정부 소속의 지휘관들이 병사들을 독려하며 중화기를 퍼부었다. 기관총과 박격포, 탱크, 그리고 하늘에는 전투 헬기까지 떠올랐다.
거기다 세계 정부에 포함된 에스퍼 솔저들도 대거 동원되었다. 그들이 뿜어내는 막강한 화력은 마스터 이상의 경지에 도달한 초인에게도 위협이 되었다. 하지만…….
“다 끝이다, 이 X밥 새끼들아!”
화력 대 화력으로 전쟁을 끌고 간다면 이쪽에야말로 비장의 수단이 있었다.
하늘 위로 높게 날아오른 붉은 날개의 드래곤이 거칠게 포효했다. 드리스가 조종하는 크림슨 블레이드가 동원된 것이었다.
“제길, 정보로는 들었지만…….”
“쏴라. 저 괴물을 먼저 떨어트려야 한다!”
하늘로 날아오른 크림슨 블레이드를 보며 세계 정부의 지휘관들은 그 거대한 거체에 화력을 집중시켰다. 미사일이 날아오르고, 전투 헬기는 주변을 돌면서 크림슨 블레이드를 집중 사격 했다. 거대한 크림슨 블레이드의 동체에 무시무시한 화력이 집중되는 그 광경은 장관이었다.
“대단하군.”
카일이 그 광경을 보고 중얼거렸다. 그 옆에서 대기 중이던 아리시아와 레이나가 말했다.
“괜찮을까요?”
“저러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걱정하는 둘과 달리 카일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럴 리가 없지. 저건 괴물이거든.”
카일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하늘 위의 크림슨 블레이드가 날개를 활짝 펼쳤다. 그러자…….
“우웃…….”
“우아아아!”
크림슨 블레이드가 날개를 펼치며 발생하는 풍압만으로도 폭연이 모두 날아가고 앞에 있는 세계 정부의 군인들이 강풍에 균형을 잃었다.
폭연이 걷히고 드러난 크림슨 블레이드의 몸은 아무런 이상도 없이 멀쩡했다
“그럼 그렇지…….”
한 번 크림슨 블레이드와 적으로 맞서 싸워본 카일은 알고 있었다. 크림슨 블레이드에게 대미지를 주기 위해서는 광범위한 화력 투사가 아니라 일 점에 에너지를 집중시킨 강력한 공격을 가해야 했다. 일반 중화기로는 크림슨 블레이드의 강철보다 단단한 비늘을 뚫을 수 없었다.
그 순간 크림슨 블레이드가 입을 크게 벌리고 주변의 공기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크윽……. 막아라!”
“쏴라. 계속 쏴라!”
“입을 노려! 자폭시키는 거다!”
크림슨 블레이드가 브레스를 쏘려는 것임을 알고 있는 세계 정부의 군사들은 더욱더 화력을 집중시켰다. 그래 봤자 소용없었지만 말이다.
“다 뒤져라!”
드리스의 외침과 동시에 크림슨 블레이드의 입에서 어마어마한 화염이 뿜어져 나왔다. 지옥의 업화를 연상하게 하는 그 막대한 브레스는 눈앞에 있는 세계 정부의 군대를 모두 태워…….
퍼어어엉!
버리지 못했다. 어디선가 뻗어 나온 무시무시한 광선이 크림슨 블레이드의 브레스를 받아친 것이었다. 그 푸른빛의 광선은 오히려 크림슨 블레이드의 브레스를 밀어내더니 그대로 크림슨 블레이드의 머리에 작렬해 버렸다.
크림슨 블레이드의 머리에 광선이 작렬한 순간 강철과도 같은 크림슨 블레이드의 비늘 상당 부분이 녹아 버렸다. 안면이 황산이라도 뒤집어쓴 것처럼 반쯤 녹아 버린 크림슨 블레이드의 모습에 드리스는 이를 갈았다.
“제길, 어떤 놈이야?”
그런 드리스의 물음에 대답한 것은 그의 정면에 나타난 중년의 남자였다.
“나다.”
그는 드리스의 앞에 무심하게 나타나서 말했다.
“네가 이 괴물의 조종자인가?”
“너……. 웃.”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방에서 드리스를 노리고 레이저가 쏟아졌다. 드리스는 황급하게 블링크로 몸을 피했다. 한 번 몸을 피했음에도 계속 이어지는 광선 공격에 드리스는 연속으로 몸을 피해 완전히 거리를 벌리고 물러나 버렸다.
드리스가 물러나자 크림슨 블레이드의 거체가 지면으로 떨어져 내렸다.
쿠우우우웅!
“우오오오오!”
“이겼다!”
그 모습을 보고 세계 정부의 군인들은 열렬하게 환호했다.
수만의 군대가 화력을 집중시켜도 거뜬하게 버티던 저 괴물을 한 방에 추락시켜 버린 남자. 이 남자가 바로 세계 정부의 마지막 무기라고 할 수 있는 무한의 상우였다.
무한의 상우. 그는 SS급 능력자이긴 하지만 그 전투력 자체는 사실 SS급을 넘어선다는 평가도 있었다. 플라스마를 생성해서 그 에너지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의 능력은 너무나 강력한 파괴력을 자랑했다.
가장 특징적인 것은 그가 능력을 쓸 때 힘의 소비가 거의 없다는 것이었다. 플라스마를 생성한 후 그 에너지를 증폭시키는 과정에서 힘을 거의 소모하지 않기 때문에 하루 종일 힘을 쓴다고 해도 거의 지치지를 않았다.
그래서 붙은 이명이 무한의 상우였다. 에너지의 총량에 끝이 없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는데, 그는 세계 정부가 가지고 있는 진정한 최강의 카드였다.
“바꿔 말하면 너만 처리하면 된다는 말이지.”
그런 상우의 앞에 카일이 나타났다. 카일의 등장에 상우는 놀랍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일 화이트인가?”
“그래. 날 아나?”
“…AP, 아니, 아폴론에게서 말을 들었다.”
그 말에 카일의 눈썹이 움찔했다.
“아폴론의 신상에 무슨 일이 있나?”
“글쎄, 어떻게 됐을까?”
상우는 자세를 바로잡으며 말했다.
“나에게 이긴다면 말해 주지.”
“그 약속 어기지 마라.”
카일 역시 그런 상우를 바라보며 검을 뽑았다.
그리고 대치하면서 상우가 말했다.
“다른 사람을 흡수해서 그 능력을 사용한다고 들었다. 안 하는 건가? 아니면 이미 한 건가?”
“글쎄, 나한테 이긴다면 가르쳐 주지.”
“…….”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상우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카일은 이제 누군가와 통째로 융합을 할 필요가 없다. 오랫동안 초능력을 진화시키면서 그냥 타인의 코어만 뽑아 자신의 능력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해졌기 때문이었다.
카일은 이 능력을 ‘대여’라고 불렀는데, 대여는 효과는 융합과 같으면서도 정신력의 소모는 훨씬 적었다. 그래서 지금 카일의 안에는 아리시아와 시드를 비롯해서 열 명의 능력자의 코어가 잠들어 있었다.
“그럼 시작하지.”
“좋다.”
그리고 동시에 무수한 플라스마 광선이 카일을 덮쳤다. 복잡한 궤도로 사방에서 조여 오는 광선 공격은 한 발이라도 맞으면 치명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나…….
카일은 그런 공격을 너무나 쉽게 피했다. 딱히 능력을 사용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순수하게 신체 능력만 가지고 피하고 있는 것이었다.
“괴물이군.”
공격하는 자신도 읽기 버거울 정도로 어지러운 궤적의 공격을 다 피하면서 다가오는 카일을 보고 상우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거리를 좁힌 카일이 그대로 오러 블레이드를 뿌린 순간…….
후우웅!
상우는 지상에서 하늘로 솟구쳤다. 로켓마냥 솟구친 상우를 자세히 보니 그의 몸 자체가 플라스마 형태의 에너지로 변환되어 있었다.
“흠, 제법이군.”
카일은 그 광경을 보고 살짝 놀랐다.
수백 년에 걸쳐서 초능력을 강화하고 연습한 카일은 알았다. 원래 신체 변화 계열의 능력자도 아닌 인물이 저렇게 능력을 응용해서 신체를 변화시켰다는 것은 상우라는 능력자 역시 초능력의 본질을 상당 부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카일은 시험 삼아서 손을 뻗어 염동파를 날렸다.
투우웅!
순간 공기가 굴절될 정도로 무시무시한 파괴력의 염동파가 상우를 덮쳤다. 하지만 상우는 그 공격을 피하지도 않았고, 카일의 염동파는 상우에게 별 대미지를 주지 못하고 지나가 버렸다. 염동파를 맞았을 때 상우의 몸이 조금 흔들리긴 했지만 그게 다였다.
“육체 자체를 에너지화시켜 버린 건가? 물리적인 공격은 기본적으로 안 통한다고 봐야겠군.”
그 점을 깨달은 카일은 그 자리에서 검을 버렸다.
‘기껏 마스터가 됐는데 실전에 투입되자마자 만난 게 검을 못 써먹는 상대라니…….’
그런 카일을 노리고 상우가 하늘에서 양손을 뻗었다.
“어디 이것도 피해 봐라.”
상우의 몸에서 무수한 플라스마의 실선이 뿜어져 나왔다. 이전과 같은 광선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얇았다. 그리고…….
“흡!”
상우가 손을 휘두르자 그 손의 궤적에 따라 플라스마 실선이 휘면서 카일을 덮쳐 왔다.
“플라스마 강선(鋼線)이라는 건가?”
카일은 그 공격을 가볍게 피했지만 계속해서 공격이 덮쳐 오자 결국 능력을 사용했다.
공간 이동 능력을 사용한 카일은 그대로 상우의 머리 위로 나타났다. 그리고 머리 위에서…….
“이거도 버텨 봐라!”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무시무시한 전격 에너지가 상우를 덮쳤다.
우르르릉!
하늘을 가득 메우는 어마어마한 뇌전이 방전되었고, 카일과 상우는 그 에너지의 중심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리고 그 막대한 에너지에 직격된 상우는…….
“이제 끝인가?”
멀쩡했다. 그는 카일의 뇌전 공격을 버텨냈다. 아니, 버텨 냈다기보다는 처음부터 안 통한 느낌이었다.
어쨌든 그대로 상우의 반격이 이어졌고, 카일은 그 반격을 유유히 피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쯧, 안 통하는군.”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는 카일을 보고 상우가 말했다.
“소용없다. 몸 자체를 에너지원으로 바꾼 나에게는 물리적인 공격뿐만 아니라 그 어떠한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
“그래. 그렇더라. 불, 얼음, 진동, 중력, 뇌전까지……. 이쯤 되면 지금 가지고 있는 카드 중에 쓸 만한 건 다 썼는데 말이야.”
“…….”
카일의 말에 상우는 멈칫했다. 그냥 허풍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카일의 말이 너무 진지해 보였다.
“너… 설마?”
“뭐가 통하는지 말해 주지는 않겠지? 그래. 몇 번을 물어도 안 해주더라.”
상우의 얼굴에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이 스쳤다. 지금 카일이 하는 말로 유추하자면 카일에게는 말도 안 되는 능력이 있을지도 몰랐다.
“네놈 설마 시간을…….”
“지금 있는 능력으로 안 된다면 다른 애들 능력을 가져올까? 처음부터 다시 하기는 좀 그런데 말이야.”
그 순간 상우는 어떠한 전조도 없이 기습 공격을 가했다. 얇게 뻗어 나간 날카로운 플라스마 광선이 카일의 심장을 노렸지만…….
핏!
카일은 그 공격을 보지도 않고 피했다. 아니, 공격이 날아오기도 전에 이미 피하고 있었다. 마치 공격이 날아올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틀림없군. 진짜야.’
상우는 카일에게 시간을 조작하는 능력이 있다고 확신했다.
“하하……. 나보다 더한 치트 캐릭터는 처음 보는군.”
“뭘, 원래 내 능력도 아닌데 말이야.”
“다중 능력자라는 것만 생각해도 충분히 치트지.”
카일은 그 말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어찌 되었든 카일은 명백하게 세계 최강의 초능력자였다.
“어떻게 하면 그런 힘을 손에 넣을 수 있지?”
“개고생했지.”
“…….”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인데, 농담 아니다. 내가 방금 말한 개고생이라는 단어에는 수백 년에 걸친 고뇌와 노력이 포함되어 있어.”
“됐다. 어찌 되었든, 네게 무슨 능력이 있든 간에 나에게 대미지를 줄 수 없는 이상 넌 날 이길 수 없어.”
“과연 그럴까?”
“……?”
“아직 한 가지 시도해 보지 않은 게 있거든.”
카일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자세를 잡았다.
“어지간하면 이 능력은 사용하고 싶지 않았지만, 네가 자초한 거다.”
그렇게 말하는 카일의 모습에 상우는 순간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저놈…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다음 순간 카일이 다시 공간 이동 능력을 이용해서 상우의 곁으로 파고들어 오기 시작했다.
“꺼져라!”
상우는 맞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사방으로 플라스마 강선의 와이어를 휘두르며 카일을 공격했다.
카일은 그 공격의 궤도와 변화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너무나 태연하게 간격 안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상우와 거리를 좁힌 카일은 그대로 상우의 이마 앞에 손바닥을 펼쳐 보였다.
‘뭐지? 시야를 가리는 건가?’
상우는 왜 카일이 이렇게 의미 없는 짓을 하는지 몰라서 당황했다. 그런 상우의 귀에 카일이 말했다.
“아플 거다.”
“무슨……. 으… 으아아아아아악!”
상우는 전신에 퍼지는 어마어마한 통증에 전율하며 몸부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