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화
카일과 모두가 정신을 차렸을 때. 그들은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 있었다. 그 공간은 모든 것이 공백(空白)인 것처럼 하얀 공간이었고 지평선 너머까지 끝없이 하얀 하늘과 하얀 대지만이 펼쳐져 있는 장소였다.
“끄으응……. 예상은 했지만 꼭 정신과 시간의 X 같네.”
가장 먼저 입을 연 것은 드리스였다. 그리고 카일이 드리스에게 가서 물었다.
“여기가 어디요?”
“여기는……. 글쎄? 뭐라고 해야 할까? 내가 억지로 차원을 찢어서 중간에 만들어낸 일종의 가상 세계라고 해야 할까? 차원의 공백 지대라고 하는 게 옳겠지.”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시오.”
카일의 말에 드리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너도 알다시피 나는 원래 차원의 벽을 넘어서 내가 있던 세계로 넘어가는 게 목표다. 그걸 위해서 오랜 세월 동안 많은 연구를 했고, 이건 그 연구의 부산물이지.”
이 공간은 드리스가 오랫동안 연구한 차원 이동의 부산물인 것이다.
“그랬군.”
상황을 파악한 카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덕분에 살았소.”
“…….”
감사를 표하는 카일이었다. 솔직히 다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드리스 덕분에 살아남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안도하는 카일과 달리 정작 드리스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왜 그러는 거요? 뭔가 문제라도 있소?”
“이… 없어.”
“무슨 말이오?”
거듭되는 카일의 질문에 드리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이 공간에서 나갈 방법이 없어.”
그 말이 나온 순간 카일뿐만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인물들이 경악했다.
“잠깐, 지금… 지금 뭐라고 했소?”
“나갈 방법이 없다고? 농담이죠?”
“그게 말이 됩니까?”
난리가 난 주변의 반응에 드리스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쩌겠냐? 그 상황에서 도망칠 곳이 여기밖에 없었는데! 아니면 다 죽었어야 했냐?”
“…….”
“…….”
드리스의 말은 옳았다. 사방에서 그의 판단이 무모했음을 성토하던 이들 역시 그 말을 듣고 보니 뭐라고 따질 수가 없었다.
카일은 맨손으로 얼굴을 세수하며 생각을 정리했다.
‘침착하자. 침착해야 해.’
지금의 상황에서 분노는 패닉을 불러올 뿐이었다. 최대한 침착하고 냉정하게 생각해야 했다. 카일은 깊게 심호흡을 해서 마음을 가라앉힌 다음 말했다.
“드리스, 지금부터 내가 묻는 말에 최대한 자세하게 대답해 주시오.”
“아직 포기하지 않은 거냐?”
“그러긴 이르지. 일단 이 공간에 관해서 설명해 줘야겠소. 여기서 나갈 방법이 없다고 했는데, 그건 방법이 없는 거요? 아니면 방법을 모르는 거요?”
“두 번째다. 이 차원의 틈새를 열어서 만든 공간은 어찌 됐든 내가 만들고 들어온 거지. 그렇다면 나가는 방법도 존재는 할 터이다. 이론적으로는 말이야.”
“그렇군. 그렇다면 그걸 지금부터 연구하면 언제쯤 성과가 나올 것 같소?”
카일의 말에 드리스는 심각하게 고민하더니 말했다.
“짧아도 수백 년은 걸리겠지.”
“빌어먹을…….”
카일의 입에서 욕이 저절로 나왔다. 수백 년의 시간이라니? 그건 카일의 입장에서 불가능하다는 대답보다 더 입장이 나빴다.
“여기 있는 전원이 죽고 당신 혼자만 나갈 수 있다는 말로 들리는군.”
카일의 말에 드리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건 아니다.”
“…….”
드리스는 부연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차원 이동에 대한 마법 다음으로 진지하게 연구한 것이 불로불사에 관한 것이다. 인간의 생체 활동을 정지시켜서 노화를 막고 식사와 배설까지 모두 불필요하도록 만드는 것 정도는 나에게 별것 아니야.”
“그 말은 적어도 이 공간에서 아사하거나 할 일은 없다 이거요?”
“그렇지. 다만…….”
드리스는 잠시 말을 끊었다가 주변을 보고 말했다.
“내가 유지시켜 줄 수 있는 건 신체뿐이다. 정신적인 피로와 고통은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야.”
잠시 말을 멈춘 드리스는 모두를 훑어본 후 다시금 말을 이었다.
“보다시피 여기에는 아무것도 없다.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에서 앞으로 수백 년, 길면 천 년이 넘게 버텨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쩌면 미치는 자가 나올지도 모르지.”
그 말에 주변 이들은 모두 숙연해졌다. 어디를 둘러봐도 그저 백색의 대지와 백색의 하늘밖에 없는 이 공간에서 수백 년의 시간을 버텨낸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도 할 수밖에 없다.”
가장 먼저 결의를 다진 건 카일이었다. 카일은 자신의 부하들을 보고 말했다.
“수백 년의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설령 수천 년의 시간이 흐른다고 해도 버텨야 한다. 우리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카일의 말에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 아리시아, 레이나, 시드, 그리고 그 밑의 부하들까지 모두 표정이 변했다. 그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으며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옛!”
“좋아.”
카일은 자신의 부하들을 보고 은은하게 미소를 지었다.
위기 상황의 사람이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는 그 중심이 되어줄 리더가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카일의 부하들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카일에 대한 그들의 흔들림 없는 충성심이 이런 위기 상황에서 그들의 마음을 잡아줄 중요한 중심축이 될 테니 말이다.
그런 카일과 부하들을 보며 황제 역시 자신의 부하들을 다독였다.
“구스타프 공작, 앞으로 긴 시간이 되겠지만 부디 잘 부탁하네.”
“물론입니다. 폐하를 위한 저희 근위 기사들의 충성심은 천 년이 지나도 쇠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스타프 공작을 필두로 해서 황실의 근위 기사들도 모두 무릎을 꿇으며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고맙군.”
그렇게 해서 일행은 이 허무의 공간에서 앞으로 긴 시간을 보내게 되었다.
일단 드리스의 마법 덕분에 죽을 일은 없어졌다. 남은 것은 드리스의 연구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최대한 협조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다행히도 할 일은 있었다.
“전원 정렬! 지금부터 일대일로 로테이션 대련을 한다.”
바로 훈련이었다.
드리스가 이 공간에서 나가는 방법을 찾아 밖으로 나갔을 때 밖의 상황이 어떻게 되어 있을지는 아무도 몰랐다. 드리스가 말하기를 어쩌면 시간이 1초도 흐르지 않았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수천 년의 시간이 흐른 뒤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어쨌든, 나갔을 때 세계 정부와 다시 싸워야 하는 것은 틀림이 없었다. 그렇다면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낼 수는 없었다. 카일과 그 부하들은 남은 시간을 훈련으로 보내기로 했다.
* * *
1년의 시간이 흘렀다. 카일과 그 부하들은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훈련에 매진했다.
카일은 검은 바람에게 명령해서 부하들에게도 최대한 빡센 훈련 프로그램을 돌리라고 명령했다. 아무것도 없는 이 허무의 공간에서 정신적인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할 필요가 있었다. 하여 최선을 다해서 굴림으로써 딴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리고 카일 본인 역시 그 훈련을 받으면서 오랫동안 손을 놓고 있던 검술 훈련을 재개했다.
그런 훈련을 옆에서 보고 있던 구스타프 공작이 황제에게 무언가를 말했다. 그다음부터 황제 역시 근위 기사단과 함께 가벼운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 * *
10년 후…….
서서히 훈련의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가 마스터 중급의 경지를 넘어서 상급에 도달했으며 아리시아 역시 순수한 검술만으로도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를 밟았다.
그리고 은장미 기사단과 투란 전사단 중에서도 서서히 마스터의 조짐이 보이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훈련의 성과가 나오고 사기가 고무되자 오히려 분위기는 더 좋아졌다.
* * *
20년 후…….
아리시아가 익스퍼트 최상급의 경지에 올랐다. 또한 은장미 기사단과 투란 전사단 사이에서도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내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지고의 경지에 이른 자신들의 성과에 기뻐서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고 특히 아리시아는 자신의 힘이 카일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크게 기뻐했다.
단, 루마니스 제국의 기사들은 그런 화이트 공국의 성과에 풀이 죽을 수밖에 없었다. 화이트 공국에서 마스터를 열 명 이상 만들어 낸 것에 비해서 그들은 아직 구스타프 공작만이 유일한 마스터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가장 경지가 는 것은 곁다리로 훈련에 참가했던 황제였다. 본격적으로 검술을 수련해 본 적이 없는 황제였지만 그는 꽤 재능이 있었는지 익스퍼트 상급의 경지에 도달했다.
드리스가 그걸 보고…….
“피는 못 속이는군.”
그렇게 말하며 지나갔다.
* * *
30년 후.
마스터가 몇 명 더 늘어났다. 하지만 더 큰 성과는 시드가 7서클 마스터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이었다.
언제부터인가 시드와 그 직속 부하들은 드리스의 마법 연구를 돕는 조수로 협력하고 있었는데, 그 과정이 시드에게 큰 도움이 되었던 걸까? 시드는 좀처럼 넘지 못하고 있던 7서클의 벽을 허물게 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계기로 화이트 공국과 루마니스 제국의 병력은 함께 훈련을 하게 되었다. 비공식적이긴 하지만 시드가 드리스의 제자와 비슷한 위치에 들어가게 되었으니 루마니스 제국의 기사들이 화이트 공국의 강자인 검은 바람이나 발레리아에게 가르침을 받아도 서로 빚지는 건 없다, 는 심리적 위안 덕분이었다.
* * *
50년 후.
마스터가 더 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놀랍게도 루마니스 제국의 황제가 오러 블레이드를 피워 올렸다.
사실 현 황제는 군주로서는 2류 정도의 평범한 인물에 지나지 않았다. 반면 비록 50년이라는 시간을 필요로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검의 수련에 매진한 결과 오러 블레이드를 피워낸 것은 그가 검에 상당한 재능이 있다는 뜻이었다.
사실 이 시점에서 카일의 경지가 아직도 익스퍼트 최상급이었다는 것 때문에 묘한 분위기가 생성되기도 했다.
* * *
70년 후.
끝없는 훈련은 모두를 강하게 만들었고 카일 역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게 되었다. 사실 이제는 일행 중에 마스터의 비율이 반 이상을 넘어서고 있을 정도였다.
이렇게 수련 말고는 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 공간에서 한 인간의 일생분에 달하는 시간을 갈아 넣었다. 어지간히 재능이 없는 인간이 아닌 이상 마스터의 경지에 발을 들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부터 슬슬 정신적인 밸런스가 무너지는 인간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반복되는 훈련과 오랜 시간 동안의 고행으로 점점 정신적으로 지쳐가는 이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다.
* * *
100년 후.
사람이 줄었다. 화이트 공국에서 열다섯 명. 루마니스 제국에서 스물네 명. 합쳐서 서른아홉의 생명이 죽어 버렸다.
외부의 위협이 없는 이 공간에서 이렇게 사망자가 나온 것은 당연히 내부의 분쟁 때문이었다.
정신적 피로와 마모를 버텨내지 못한 루마니스 제국의 기사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버렸다. 최초의 탈락자가 나왔다는 사실이 다른 이들의 정신을 자극한 것일까? 불과 일주일 사이 두 번째 자살자가 나왔다. 그리고 그 후에도 점점 사람이 줄더니 양쪽 모두가 합쳐서 여러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것이었다.
카일과 황제는 양측의 리더로서 자신의 사람들의 마음을 다잡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 * *
150년 후.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거의 백 명에 가까운 이들이 죽었는데, 전과 달라진 것은 자살자 외에도 타살로 죽은 이들이 나타났다는 것이었다.
가혹한 고문과도 같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정신적 피로가 극에 달한 인물이 그 분노를 폭발시켰다. 마스터 상급의 경지에 이르러 있던 루마니스 제국의 기사 한 명이 분노에 폭주했고, 그는 닥치는 대로 주변 인물들을 공격했다.
그의 돌발 행동은 비슷한 상태의 다른 인물들도 폭발하게 했다. 마치 전쟁과도 같은 초인들의 전투가 벌어졌고, 순식간에 다수의 사망자가 나왔다. 카일의 명령을 받은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가 서둘러서 사태를 진압했지만 그 과정에서 아직 상대적으로 힘이 약했던 이들 여럿이 죽어 버렸다.
이때 이후로 카일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수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다행히 일행 중에는 레이나가 있었다. 텔레파스인 그녀는 마음을 먹으면 상대방의 정신 상태를 검진하는 것도 가능했다.
카일은 레이나에게 앞으로 다른 이들의 마음을 정기적으로 살피고 보살펴 주라고 말했다. 다행히 신앙심이라는 정신적인 지주가 있어서인지 레이나의 정신세계는 몹시 건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