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화
둘은 서로를 담담하게 마주하고 있었다. 남들이 보면 마치 이 자리가 전쟁터가 아니고 이 둘이 서로 죽여야 할 사이가 아닌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지난 2년 동안 빅토르와 진호는 열 번이 넘도록 서로 부딪히고 싸웠지만 승부를 보지 못했다.
그 전투 하나하나가 아슬아슬하게 사선을 넘는 사투였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서로의 목숨을 노리고 싸우는 과정에서 둘은 서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적이라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적수.
그런 사이가 된 것이다.
빅토르는 진호의 옆에 있는 여자를 슬쩍 보면서 말했다.
“그 여자가 너하고 동급의 전투력을 지니고 있다는 SS급 능력자인가? 그렇게는 보이지 않는군?”
빅토르의 눈에 비치는 세이코는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못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는 가냘픈 여성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방심은 금물이겠지. 다름 아닌 너하고 동급의 존재일 테니 말이야.”
빅토르는 방심하지 않았다.
처음에 진호하고 싸울 때도 상대적으로 젊어 보이는 진호의 모습에 방심하고 있다가 큰코다칠 뻔했기 때문이다.
‘그런 추태는 한 번이면 충분하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빅토르는 자신의 아티팩트인 네메아의 가호를 발동시켰다. 그러자 그의 전신을 감싸고 있는 황금빛 갑주가 빛을 발하며 가슴에 새겨져 있는 황금의 사자가 살아 있는 것처럼 눈을 번뜩였다.
그 상태로 자신의 애검을 들어 올린 빅토르가 자세를 잡으며 말했다.
“자, 와라. 오늘이야말로 끝장을 보자.”
“그래. 슬슬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할 타이밍이지.”
진호 역시 한 걸음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그가 능력을 발휘하자…….
뚜두둑. 뿌득…….
그의 전신의 골격이 뒤틀리며 모양을 바꾸기 시작했다.
팔다리는 두 배 이상으로 부풀어 오르고 손에는 단검보다 더 커다란 짐승의 발톱이 생기며 머리는 늑대의 것으로 변하고 등에는 독수리의 날개가 돋아났다.
그 외에도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시력은 매의 것, 청력은 박쥐의 것, 뱀의 후각 등등… 모든 짐승들의 형질을 자유자재로 취해서 최강의 전투 형태를 만들어 갔다.
그리고 이렇게 만든 짐승의 형질을 초능력으로 다시 한번 증폭시키면…….
“우워어어어어어어어!”
세계정부에서 보유 중인 최강의 육탄계 SS급 능력자 초마수 진호가 되는 것이다.
“후우우우…….”
빅토르는 이미 몇 번이고 본 진호의 전투 형태에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러고는…….
“와라.”
빅토르의 그 짧은 한 마디가 신호가 된 것일까? 둘의 모습이 사라졌고 서로의 중간 지점에서 격렬하게 충돌했다.
콰아아아앙!
두 명의 초인의 사투가 시작된 것이다.
진호의 손톱과 빅토르의 검이 부딪힐 때마다 천둥 같은 굉음과 함께 피부가 따가울 정도의 충격파가 퍼져 나갔다.
빅토르의 특징은 검은 모험가라는 출신과 철저한 정통파 검술이다.
어린 시절부터 기사 출신의 가신들에게 단련받았고, 그 기본을 꾸준하게 수련하며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빅토르의 검술은 그야말로 기사 검술의 견본으로 삼아도 좋을 정도로 나쁜 버릇이 없었다.
거기에 비해서 진호의 공격은 근본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원래 세계정부에서는 근접 전투를 펼치는 능력자를 위해서 격투기나 동서양의 검술을 수련시키기도 하지만 진호의 능력은 특출난다.
반인반수(伴人伴獸)로 신체 자체를 변환시켜서 싸우는 진호에게 인간의 무술은 맞지 않았다.
다만, 진호에게는 야생의 동물이 가지고 있는 야성이 있다.
사자가 배우지 않아도 사냥감을 잡는 방법을 아는 것처럼 거미가 배우지 않아도 거미줄을 치는 것처럼 진호의 신체 변화는 몸만 바꾸는 게 아니라 그 안에 있는 내면에서도 짐승의 야생성을 일깨운다.
그 야생성의 전투력은 인간의 무술에 비해서 절대 뒤처지지 않았다.
빅토르의 검이 완벽한 절도와 균형 잡힌 자세로 진호를 압박하려고 하지만 진호는 상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움직임을 보이며 빅토르의 공격을 무력화시켰다.
변칙도 반복되다 보면 나름의 법칙이라는 것이 생기게 마련이지만 진호는 예외였다.
때로는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때로는 늑대처럼 사납게, 때로는 곰처럼 묵직하게……. 다양한 동물의 야생성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그 패턴을 종잡을 수 없게 했다.
실제로 빅토르 정도의 달인이 수십 번이나 진호와 싸우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패턴에는 익숙해지지가 않았다.
그래도 처음보다 많이 익숙해진 것도 여러 번 대전을 하며 쌓인 경험 때문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이 전투를 진호가 유리하게 끌어가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빌어먹을, 저 갑옷은 사기야.’
빅토르가 입고 있는 갑옷 때문이었다.
네메아의 가호라고 불리는 저 갑옷의 능력을 간단하지만 사기라고 할 만했다.
절대 방어.
갑옷에 서려 있는 황금빛 광채가 사라지지 않는 이상 저 갑옷은 모든 공격을 다 막아낸다.
다만 공격을 막을 때마다 점점 황금빛 광채가 약해진다. 즉, 공격을 막기 위해서 어느 정도의 에너지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공격을 계속 허용하다 보면 결국 황금빛 광채와 함께 가호도 사라진다.
그러니 빅토르도 상대의 공격을 완전히 무시하지 않고 공방을 모두 펼치면서 싸우는 것이다.
다만 결정적이거나 아슬아슬한 순간에 과감하게 밀고 나갈 수 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메리트였다.
특히 빅토르 정도의 고수라면 더욱더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길, 진짜 안 맞는군.’
빅토르 역시 답답할 수밖에 없었다.
진호의 변칙적인 움직임과 더불어서 자시의 공격을 귀신같이 파악하는 통찰력이 공격을 적중시키지 못 하게 하고 있었다.
박쥐의 초음파, 뱀의 피트 기관, 매의 시력 등등을 총동원하면 빅토르의 근육 움직임은 물론이고 힘이 들어가려는 부분의 체온 감지와 폐가 호흡하는 흐름까지 모두 읽을 수 있었다.
그런 진호에게 공격을 맞힌다는 것은 그랜드 마스터인 빅토르에게도 지극히 어려운 것이었다.
10분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에 1천 합이 넘는 공방을 주고받은 둘은 일단 한 차례 떨어져서 서로를 노려봤다.
“후우우우우…….”
“하아아아아…….”
둘은 호흡을 정돈하면서도 절대 상대에게 주의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아주 짧은 시간도 방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역시 강하군. 이대로는 어렵겠어.’
‘이대로는 승부가 나지 않아. 결국 도박을 해야 하는 건가?’
사실 둘은 서로에게 맞춰서 준비해 온 전략이 있었다.
서로 수십 번을 싸우면서 결판이 나지 않으면 전략을 바꿔서 준비해 오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과연 통할까?’
‘통한다고 해도… 어떻게 그 상황을 만들지?’
짧은 시간이지만 같은 고민을 하는 둘.
하지만 먼저 결정을 내린 것은 진호였다.
‘오늘은 반드시 끝을 본다.’
이번에 빅토르의 목을 가져가지 않으면 세계정부에서 페널티를 먹일 것이다.
진호 본인에게 가해지는 페널티라면 그게 무엇이든 간에 상관없다. 악으로 깡으로 버티면 그만이다. 하지만…….
진호의 눈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양손을 꼭 잡고 자신의 승리를 비는 듯한 세이코의 모습이 보였다.
다시 생각해 봐도 세계정부에게 세이코와의 관계를 들킨 것은 최악의 실수였다. 그 후로 자신이 반항기를 보일 때마다 세이코에게도 가혹한 제재가 가해졌기 때문이다.
그녀가 또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마음먹은 진호는 자신의 몸을 다시 변환시켰다.
우두두두두둑, 뿌득.
진호의 몸이 다시 한번 크게 부풀어 올랐다.
특히 하체가 중점적으로 두꺼워졌고 그의 머리에는 길이가 장검에 필적할 정도로 커다란 뿔이 돋아났다.
그 모습을 보고 빅토르가 물었다.
“그건 어떤 동물이지?”
“코뿔소다.”
“…….”
“이 세계에는 없는 동물인가 보군.”
“그렇지. 그럼 알려주겠나?”
“그래. 알려주지. 대신 대가는 비싸게 먹힐 거다.”
그 말을 하는 것과 동시에 진호의 몸이 앞으로 저돌적으로 돌격했다.
“음…….”
순간 빅토르는 고민했다. 돌진해 오는 박력이나 느껴지는 힘은 상당해 보였다.
하지만…….
‘설마 내가 못 피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너무 정직한 공격이 아닌가?
빅토르는 혹시나 무슨 함정이 아닌가 싶어서 일단 몸을 크게 던져서 그 공격을 피했다.
콰콰콰콰콰……. 콰아앙!
무시무시한 돌격이 빗나가고 마지막에 진호가 들어 밖은 커다란 바위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조각조각 났다.
그리고 빅토르는 상대방의 다음 수를 기다렸다. 그러자…….
“후우우우우…….”
진호는 호흡을 정돈하며 다시 돌격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조금 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완벽하게 똑같은 돌격 공격.
‘설마, 이걸 걸릴 때까지 계속하겠다고?’
빅토르는 순간 어이가 없었다.
공격의 위력은 빅토르도 긴장할 정도로 대단해 보였다. 저 정도 공격을 세 번, 아니, 두 번만 막아내도 네메아의 가호가 다 날아가 버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정직한 돌진 공격을 맞아줄 빅토르가 아니었다.
그건 진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도 계속 같은 공격을 우직하게 반복하는 진호와 그 공격을 피하는 빅토르.
그러면서 빅토르는 생각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군. 하지만…….’
노림수가 있는 것은 빅토르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후우우우…….”
결심을 굳힌 빅토르는 검을 마주 세우고 다리를 넓게 벌려서 중심을 무겁게 잡았다.
‘받을 생각인가?’
피하지 않고 공격을 받아낼 마음을 먹은 빅토르를 보며 진호는 생각했다.
그냥 ‘피하기 지겨워서 한번 받아 볼까?’라는 안일한 생각은 아닐 것이다. 저쪽에서도 무언가 이유가 있어서 공격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거냐?’
일단 접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상대가 무슨 꿍꿍이가 있든 간에 진호는 빅토르를 상대로 반드시 끝장을 내겠다고 마음먹은 상태였다.
“우워어어어어어!”
진호는 혼신의 힘을 다 끌어모아서 앞으로 돌진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지면에서 폭탄이 터지는 것 같은 파괴가 벌어지며 마침내 진호와 빅토르가 부딪혔다.
콰아아앙!
진호의 뿔과 빅토르의 검이 부딪힌 순간 우위를 점한 것은 진호였다. 약간이긴 하지만 빅토르가 뒤로 밀려난 것이다.
하지만 그건 빅토르가 스스로 물러난 것이기도 했다. 1차 격돌의 충격을 상쇄하기 위해서 부딪히는 즉시 뒤로 중심을 빼면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이제 돌진으로 인한 파괴력을 상실한 상대에게 가해지는 두 번째 공격.
“흐읍!”
상대는 이미 한 번 전력을 다 쏟아부은 공격을 퍼부은 직후다. 그러니 이 타이밍에 나오는 공격에 대응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판단하며 나온 공격에 진호는…….
“걸렸다!”
기다리고 있던 회심의 한 수를 펼쳤다.
진호의 몸이 급격하게 변하면서 얇고 긴 몸뚱어리의 뱀으로 변했다. 그러고는…….
쉬리리릭.
거대한 뱀으로 변한 진호의 몸이 빅토르의 몸을 꽁꽁 감싸고 무시무시한 압박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걸로 끝이다. 빅토르.”
“으윽…….”
빅토르는 이를 악물었다.
몸속의 내장이 전부 입 밖으로 튀어나와 버릴 것 같은 강렬한 압박이 전신에 가해지고 있었다.
모든 공격을 절대 방어로 막아 주는 네메아의 가호도 지금 이 순간은 소용없었다.
‘역시 이건 통하는군. 신화하고 같아.’
진호는 빅토르와 여러 번 싸우면서 그의 갑옷이 가지는 효과가 네메아의 가호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왜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름이 이 세계에 나오는지는 모르겠지만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저 가호의 약점도 신화와 같을지 모른다.
모든 화살도 창도 막아내는 무적의 가죽을 걸친 네메아의 사자. 그리스의 영웅 헤라클레스가 그 사자를 토벌한 방식은 무기를 사용한 게 아니라 자신의 육체를 이용한 조르기였다.
그렇다면 그것과 같은 공격은 먹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으로 준비한 것이 이 한 수였다.
아나콘다의 형질로 몸을 변화시켜서 그대로 적을 감싸 졸라서 죽이는 것이다.
실전의 작전을 신화의 기록을 통해서 준비한다는 것에 관해서 얼토당토않다는 거부감은 조금 있었지만…….
“다행히 잘 먹히는 것 같군. 이대로 끝장내 주마. 빅토르.”
진호는 빅토르의 전신을 천천히 옥죄었다.
그 엄청난 압박감에 빅토르는 온 힘을 다해서 버티고 있었지만 그를 압박하는 구속은 점점 더 강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 절체절명의 순간 빅토르는…….
“잘됐군.”
오히려 웃었다.
힘겨움에 비지땀을 흘리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띠는 빅토르를 보고 진호는 순간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떨어지지 마라. 진호!”
그리고 빅토르가 입고 있는 갑옷의 사자가 우렁차게 포효했다.
동시에 그 포효와 함께 하늘에서 한 줄기의 낙뢰가 떨어졌다.
파지지지직!
“끄아아악!”
그렇게 떨어진 낙뢰는 정확하게 빅토르의 머리 위로 떨어졌고, 당연히 빅토르를 옥죄고 있는 진호에게도 막대한 대미지를 주었다.
“빅토르, 네놈…….”
이를 갈며 노려보는 진호에게 빅토르가 웃으면서 말했다.
“접근전을 노린 건 나 역시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