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화
성전 연합군의 패배.
빅토르를 비롯한 수뇌부가 약간 살아서 돌아가기는 했지만 전력의 90% 이상이 죽어 버린 처참한 패배였다.
전 대륙의 힘을 하나로 모아서 맞서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패배했다.
이것은 이 세계의 패권이 세계정부에게로 넘어간다는 뜻이다.
각국의 왕족이나 귀족들 중에는 이제 세계정부에 맞서기보다는 어떻게든 협조를 하고 자신의 권력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시도하는 이가 나오기 시작했다.
세계정부는 그들 중에 어느 정도 쓸모가 있어 보이는 이들에 한해서 협상의 기회를 주었다. 어쨌든 싸워서 정복하는 것보다는 알아서 숙일 때 굴복시키는 것이 편하니 말이다.
그래봐야 쓸모가 없어지면 언제든 처리할 수 있는 일회용품 취급을 했지만 말이다.
세계정부는 빠르게 전 대륙을 점거해 가기 시작했다.
* * *
고르시파 왕국의 왕국.
그곳에서 한 남자가 한잔 술의 힘을 빌려서 피로를 몰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한 여인이 다가왔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상처투성이의 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는 이 남자는 바로 빅토르였다. 그리고 빅토르를 걱정하며 바라보는 것은 그의 딸이자 카일의 아내인 클레어였다.
세계정부가 전 대륙의 80%를 지배하기 시작하고 거의 모든 국가들이 고개를 숙였지만 그래도 저항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어서 활동하는 것은 던전 공략자이자 고르시파 왕국의 국왕인 빅토르였다.
빅토르는 남은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자국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직접 전선에 나서서 싸우며 세계정부의 침략에 맞서 싸웠고, 에이라는 후방에서 넝마에 가까운 전시 행정을 가까스로 유지하며 저항군을 유지하고 있었다.
클레어 역시 카일의 사후 빅토르의 곁으로 돌아와서 딸과 함께 보호를 받고 있었다.
그녀는 빅토르의 몸 여기저기에 늘어나 있는 상처를 보고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저도 같이 싸울게요.”
“안 된다.”
“저도 꽤 강해요. 보통 기사들보다는 도움이 될 거예요.”
원래도 재능이 있었고 거기다 카일에 의해서 능력까지 각성한 클레어는 제법 강자였다.
하지만 카일이 그녀를 전쟁터에 데리고 가지 않은 것과 같은 이유로 빅토르 역시 딸을 전쟁터로 데리고 가지 않았다.
“아이리스를 천애 고아로 만들 생각이냐?”
“…….”
클레어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카일이 죽어 버린 지금 아이리스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은 엄마인 자기뿐이었다.
혼자서 전선에서 고군분투하는 아버지를 보면 어떻게든 한 손이라도 거들고 싶었지만 딸을 혼자 방치해 둘 수도 없었다.
“걱정 마라. 나는 빅토르 폰 고르시파다. 그리 쉽게 지지는 않는다.”
“예. 아버지.”
결국 클레어는 그렇게 물러났다.
클레어가 물러나고 빅토르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쉽게 지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빅토르는 뒤의 말을 애써 삼켰다.
쉽게 지지는 않겠지만 도저히 지금 상황을 이겨낼 수 있는 승산이 보이지를 않았다.
‘사위가 그렇게 죽어 버려서는 안 되었는데, 하다 못 해 제국의 드리스 엔케모니아라도 살아 있었다면 좀 나았을 텐데…….’
아쉬움에 한숨만 계속 나오는 밤이었다.
* * *
빅토르와 고르시파 왕국의 분전은 실로 눈이 부실 정도로 처절했다.
이미 대부분의 국가가 세계정부에 맞서기를 포기한 상황에서도 오직 그만이 세계정부를 상대로 맞서 싸우고 있으며 또한 어느 정도 버텨내고 있기도 했다.
세상 사람들은 역시 빅토르 폰 고르시파, 던전 공략의 영웅이라고 하며 감탄했지만 사실 빅토르는 알았다.
지금 자신이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것은 세계정부에서 자신을 상대하는 것에 전력을 쏟지 않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 세계정부는 이 세계를 장악하고 각국에 저장되어 있는 던전의 코어를 끌어모으는 것을 최우선으로 행동하고 있다.
그렇게 해야 지구에서 더 많은 전력을 가져올 수 있고 또 최종적으로는 모든 인류를 이 세계로 이주시킬 수 있으니 말이다.
세계정부 입장에서 빅토르의 저항은 차순위로 미뤄도 괜찮은 수준의 문제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슬슬 끝을 보려는 걸까?
“빅토르 전하, 전쟁터에서 초마수가 모습을 보였다고 합니다.”
“내가 상대한다. 바로 준비해!”
초마수 진호.
빅토르가 그동안 세계정부를 상대하면서 수도 없이 상대했던 인물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승부를 내지 못했다.
즉, 그를 상대하려면 빅토르가 나서서 전력을 다해서 싸워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전하…….”
“뭐냐?”
전령은 망설이다가 말을 이었다.
“초마수의 옆에 독나방 세이코 역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고르시파 왕국의 전선에 두 명의 SS급 능력자가 나타났다. 이게 뭘 뜻하는지 빅토르는 알고 있었다.
“작정을 했다, 이거군.”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
빅토르는 마음을 굳건하게 먹고 말했다.
“전군에 전달해라. 내가 죽으면 항복하라고 말이다.”
“크윽… 전하…….”
침통하게 눈물을 흘리며 부복하는 부하를 보고 빅토르는 말했다.
“걱정 마라. 결코 쉽게 당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빅토르는 자신의 아티팩트를 착용하고 전장으로 향했다.
빅토르가 서둘러 현장으로 향했다. 하지만 고르시파 왕국군의 상황은 이미 최악이었다.
요새는 파괴당하고 병력도 절반 이상이 괴멸당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버텨라! 곧 전하가 오신다!”
“우리는 고르시파 왕국의 기사다! 물러서지 마라!”
그들은 아직도 전의를 잃지 않고 싸우고 있었다.
빅토르와 함께 모험가 시절부터 생사고락을 함께한 베테랑들이 다른 신인들을 고무시키며 몸을 바쳐가며 싸우고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들의 숭고한 의지가 닿기에는 현실의 상대가 너무 강했다.
“오, 오지 마세요!”
그것은 가녀린 인상의 여인이었다.
무기는 고사하고 갑옷도 입지 않은 차림에 바람만 불어도 날아가 벌릴 것처럼 가녀린 인상의 여인.
하지만 그녀를 포위하고 있는 고르시파 왕국군의 병사와 기사들의 눈빛에는 지독한 분노와 경계심만이 가득했다.
“저 마녀가…….”
“처죽여 버릴 년…….”
그들의 눈에는 오히려 그녀의 저런 모습조차 가증스럽게 보일 뿐이었다.
“제길… 죽어라!”
기사 한 명이 분노를 참지 못하고 뛰쳐나갔다.
“안 돼! 필!”
그런 기사의 돌격을 동료가 말렸지만 소용없었다.
필이라는 기사는 용맹하게 앞으로 뛰쳐나가서 오러가 한껏 맺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싫어!”
여자는 머리를 감싸고 주저앉아서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몸에서는 짙은 보랏빛의 안개 같은 입자가 뿜어져 나왔다.
그 입자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여 공격하는 기사의 검격을 막아냈다.
“큭…….”
입자의 막에 가로막힌 필의 검은 그대로 단단하게 구속되었다. 그의 검뿐만이 아니라 전신이 통째로 말이다.
치이이이이익.
그리고 입자에 구속당한 기사는 전신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며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큭… 이 마녀가…….”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여자는 울먹이면서 사과했지만 그녀의 의지와는 달리 보랏빛의 그녀에게 위해를 끼치려고 한 존재를 한 줌의 먼지도 남기지 않고 깨끗하게 녹여 버렸다.
그 광경을 보고 주변 기사들이 외쳤다.
“접근하지 마라! 철저하게 원거리에서만 공격해라!”
“마법사들에게 빨리 신호를 보내! 여기에 마법을 집중시키라고!”
그런 기사들의 행동은 여자를 더 겁먹게 했다.
“안 돼. 이러지 마. 제발…….”
여자가 겁을 먹으면 먹을수록 보랏빛 입자는 점점 규모가 커지기 시작하더니 이윽고는…….
“제길, 온다!”
“모두 피해!”
보랏빛 입자가 사방으로 퍼지면서 폭발적으로 증폭했다. 그리고 그 입자는 여자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 모든 이들을 깔끔하게 감싸서 녹여 버리고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안 돼에에!”
여기저기서 수많은 이들이 녹아내렸다.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여자는 자신이 만들어 내는 그 끔찍한 광경을 보면서 울먹거렸다.
그녀가 바로 독나방 세이코.
세계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SS급 능력자 중 한 명이다.
보면 알겠지만 사실 그녀는 전투에 적합한 능력자가 아니다. 정신이 너무 나약하고 겁이 많아서 원래는 전투와 상관없는 하급 능력자였다.
하지만 세계정부의 인간이 그녀를 강제로 겁탈하려고 했을 때 이 능력에 눈을 떴는데 그 순간 그녀를 중심으로 해서 사방 1킬로미터 안에 모든 인간들이 흔적도 없이 녹아내려 버렸다.
실로 무시무시한 대량 살상 능력이었다.
원래 본인의 의사가 어떻든 간에 능력으로 상위 계층의 인간을 죽인 능력자는 폐기 처분 되어야 하는 게 규칙이다.
하지만 그녀의 능력이 너무나 강력했기에 오히려 세계정부의 이목을 끌었고 세계정부는 그녀를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다.
적들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폐도시나 밀림에 그녀를 떨어트려 버리는 것이다.
그 후에는 그냥 알아서 내버려 두면 된다.
세이코의 능력이 발동하는 조건은 공포.
겁을 잔뜩 집어먹은 그녀가 능력을 전개하는 순간 그 일대를 통째로 섬멸할 수 있었다. 초능력 전사로서의 능력이 아니라 대규모 살상 병기로서 그 존재를 활용당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세계정부의 초능력자들 중에서 가장 많은 인간을 죽인 게 바로 그녀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SS급 능력자가 되었고 독나방 세이코라는 이름을 받았다.
세계정부에서 특히 유용하게 여기는 그녀의 성격이었다.
겁이 많고 나약해 빠진 세이코는 세계정부에 반항할 의지조차 없었다.
무시무시한 독을 품고 있지만 잔뜩 움츠려 있는 새끼 고양이 같은 존재인 것이다.
사용법만 주의하면 듀란 다음으로 다루기 쉬웠다.
“흑… 흑……. 싸우기 싫다고 했는데…….”
주변의 위험 요소를 전부 없애 버린 세이코는 주저앉아서 울었다.
그녀는 누구보다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정작 자신의 의지로 살인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는 아이러니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 세이코의 옆에 근육질의 남자 한 명이 다가왔다.
“이쯤 했으면 됐어. 세이코, 넌 그만 물러나.”
“진호 씨, 하지만 나 혼자 돌아가면…….”
전신에 빈틈없는 근육질의 갑옷을 장착한 이 남자가 바로 초마수 진호다.
SS급 능력자인 동시에 육체를 활용한 전투가 특기인 남자이며, 던전 공략의 보상인 네메아의 가호를 착용한 빅토르와 맨몸으로 싸워도 호각을 겨루는 강자다.
그가 세이코에게 말했다
“요새를 무너트리고 병사들도 다 정리했어. 이쯤 되면 네 역할을 다한 거다.”
“하지만…….”
세이코는 망설였다.
사실 둘은 여기 오면서 세계정부의 명령을 받았다. 이번에는 반드시 빅토르의 목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말이다.
아무리 SS급 능력자라고 해도 결국 능력자는 세계정부에게 있어서 유용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명령을 어기면 꽤 가혹한 페널티가 주어진다는 말이다.
하지만 진호는 세이코에게 말했다.
“어차피 네 능력은 합공에 맞지 않아. 세계정부 새끼들이 지랄하면 내가 우겨서 그렇게 했다고 해.”
“…….”
세이코와 달리 진호는 세계정부에 협조적이지 않았다. SS급 능력자 중에 세계정부에 가장 비협조적인 인물이 바로 진호였다.
그래서일까?
세계정부에서 진호를 다루는 방식의 대부분은 협박을 곁들인 회유였다.
본인에게 협박이 통하지 않기 때문에 보통 진호에게 소중한 존재를 걸고 하는 협박을 사용했는데, 세이코 역시 그렇게 진호에게 소중한 존재 중 하나였다.
진호는 세이코의 앞에 서며 말했다.
“빨리 가라. 빡센 놈이 오고 있으니까.”
그리고 진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앞에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뿜으면서 한 명의 강자가 다가왔다.
빅토프 폰 고르시파였다.
“오랜만이군, 진호.”
“그러게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