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핵타비움에서 수십 킬로미터 이상 떨어진 어느 장소.
그곳에서 이진영은 케이와 제트, 그리고 혜정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을 대동하고 멀리서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을 보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되고 말았군.”
아쉬워하는 이진영의 옆에 선 혜정이 말했다.
“제 충언이 통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녀의 말은 공손했지만 말의 내용은 자기 덕분에 최악의 상황을 피했음을 알아 달라는 자기 공치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결론을 말하면 이렇다.
게이트를 크게 열고 SS급 능력자를 두 명이나 소환한 이진영은 이미 필승을 확신하고 있었다.
SS급 능력자가 두 명이나 있는데 설마 마차나 타고 다니는 미개한 문명의 이계인들에게 당하겠는가? 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런 이진영에게 혜정이 말했다.
“이 세계의 수준을 너무 우습게 보면 곤란합니다. 문명 수준이 미개한 것은 사실이지만 가끔씩 SS급 능력자에 준하는 강자들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네가 SS급 능력자에 관해서 뭘 안다고 떠드는 거냐? 고작해야 다리 벌리는 것밖에 할 줄 모르는 창녀가.”
이진영의 노골적인 무시와 경멸에도 혜정은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저는 그동안 황제의 곁에 있으면서 제국의 기사라는 자들과 마법사라는 자들을 꽤 봐 왔습니다. 실제로 이번에 7서클 마법사 한 명을 상대로 세계정부의 정예 병력이 손해를 보기도 했지 않습니까? 피에르가 없었으면…….”
“그만 닥쳐라.”
“죄송합니다. 저는 그저… 아니, 아무것도 아닙니다.”
혜정은 그렇게 말하면서 비굴할 정도로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혜정의 모습에 이진영은 눈살을 찌푸리다가 말했다.
“그동안 네 공적을 생각해서 말은 들어 주겠다. 어디 해 봐라.”
“대위님의 넓은 아량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혜정은 다시 이어갔다.
“이 세계에도 만만치 않은 강자들이 제법 있습니다. 그들이 만약 피에르와 듀란을 이겨 버린다면 그때는 사태를 감당하지 못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냐? SS급 능력자를 한 명 더 소환하기라도 하라는 거냐?”
“그것도 방법의 하나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저효율로 사태를 해결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혜정은 이진영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핵폭탄을 사용하시면 어떻겠습니까?”
“뭐? 네가 미쳤구나.”
“지금 제국의 수도에 진군하고 있는 것은 적의 주력, 아니, 이 세계의 주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들을 전멸시킬 수만 있다면 핵을 사용할 가치는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핵은 세계정부의 평화 조약으로 어디서도 사용이 금지된 물건이다.”
“정확히 말하면 지구 어디서도 핵무기를 다시 사용하는 국가와 단체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겠다, 라고 되어 있죠.”
“…….”
“여기는 지구가 아닙니다.”
“으음…….”
이진영이 신음을 삼켰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긴 했던 것이다.
말장난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법의 맹점을 찌르는 핵심인 것도 사실이다.
망설이는 이진영을 보고 혜정이 말했다.
“지구에서 핵무기의 사용이 금지된 것은 지구에 노출된 방사능과 그로 인한 기후 변화와 돌연변이의 피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세계는 아직 방사능에 노출되지 않은 깨끗한 세계입니다. 그러니…….”
혜정이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한두 발 정도는 터트려도 큰 문제가 없지 않을까요?”
“…….”
이진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혜정의 말 자체는 맞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록 사용은 금지되어 있지만 세계정부에서는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걸 가져와서 사용하는 것 자체는 이진영의 독단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했다.
‘하지만 괜찮을까? 이러니저러니 해도 핵무기의 사용을 하는 순간 정치적으로 공격 받을 빌미를 제공하게 되는데.’
이진영은 이미 거의 혜정에게 넘어왔다.
정치적인 리스크만 없으면 혜정이 말하는 대로 핵을 사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런 이진영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혜정이 말했다.
“만약 정 사용이 꺼려지신다면 조건부로 사용하는 게 어떨까요?”
“어떤 조건을 말하는 거냐?”
“핵타비움에 SS급 능력자 두 명과 방어 병력을 남겨두고 저희는 자리를 피하는 거죠. 그리고 만약 피에르와 듀란이 적들을 무사히 막아낸다면 핵을 굳이 사용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둘이 적에게 진다면…….”
“그때는 핵 말고는 대안이 없겠군.”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 세계를 점령하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과제니까요. 대위님이야 물론 핵무기를 사용하고 싶지 않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얘기가 다르지 않을까요.”
“그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온다면 말이지.”
그렇게 해서 이진영은 황궁의 별궁에 핵무기를 설치해 두었다.
그리고 핵타비움의 수비를 피에르와 듀란에게 맡기고 약간의 병력만을 남긴 채로 자신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로 피난을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멀리서 피어오르고 있는 버섯 형태의 구름을 보며 이진영은 속으로 생각했다.
‘다행이군. 이로써 적들은 다 죽었을 거야.’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다.
뭐, 비록 천하디천한 혜정의 말을 들어서 생긴 결과라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하지만 말이다.
‘상관없지. 저런 도구 하나 정도는 거슬리면 없애 버리면 그만이니까.’
이진영의 위치라면 혜정을 죽이는 건 언제라도 가능하다. 오히려 저 정도로 영리한 도구라면 살려두는 편이 이득일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을 정리한 이진영이 말했다.
“제트, 코어의 에너지 질량은 충분히 챙겼나?”
“예. 대위님.”
“그렇다면 됐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세계의 정벌을 시작하도록 하자.”
루마니스 제국의 수도 핵타비움이 증발해 버린 그날, 세계정부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 * *
2년 후, 많은 것이 변했다.
재앙의 시작으로 불리는 그날.
루마니스 제국의 수도는 없어져 버렸고 이계에서 온 침략자들은 자신들의 존재를 드러내고 본격적인 침략을 시작했다.
처음에 세상은 몰랐다. 세계정부가 어떤 곳이며 그들이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는지 말이다.
오히려 루마니스 제국의 패망으로 인해서 공백이 생긴 대륙의 패권 구도에 더 관심이 많았다.
특히 이제까지 눈치만 보고 있던 싱카라 연합 제국의 나머지 국가들은 본격적으로 루마니스 제국의 영토를 점령하기 위해서 군을 움직였다.
카일과 빅토르가 아무리 말해도 꿈쩍도 하지 않던 그들이었지만 루마니스 제국이 이빨이 빠졌다는 것을 확신하자 앞다퉈서 움직인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맞이하여 상대한 것이 세계정부의 군대였다.
당시 움직인 군의 숫자는 5,000.
싱카라 연합 제국에서 동원한 50만 대군에 비하면 100분의 1밖에 되지 않는 전력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세계정부의 완승이었다.
전투형 초능력자들이 대거 포함되었고 현대식 중화기를 대거 동원한 세계정부의 군대는 어마어마한 파괴력을 보여주며 싱카라 연합 제국의 50만 대군을 전멸시켜 버렸다.
그 과정에서 대륙을 경악하게 한 것은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100배가 넘는 적을 단기간에 물리치는 세계정부의 파괴력과 또 하나는 투항 자체를 받아주지 않고 완전히 전멸시켜 버리는 잔혹함이었다.
세계정부에서 항복을 받아준 것은 오러를 다루는 기사나 마법사들 일부뿐이었고 나머지 일반인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무도 죽여 버렸다.
얼마 후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기사와 마법사들을 살려준 것들도 그들이 전력으로 받아들인 건 아니었다.
그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의 시스템을 해석하기 위한 인체 실험 샘플로 확보한 것뿐이었다.
세계정부는 말 그대로 이 세계의 사람들을 같은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 사실을 전 대륙에 호소한 것은 고르시파 왕국의 국왕인 빅토르였다.
그는 세계정부의 위험성을 전 대륙의 모든 국가에 알리고 연합이 필요함을 호소했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세계정부의 전력이 더 강해진다는 것을 알리면서 모두가 힘을 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나라에서는 빅토르의 주장을 터무니없다고 생각해서 협조하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싱카라 연합 제국의 50만 대군이 전멸하기 전에는 빅토르의 말에 동의하기 시작했다.
싱카라 연합 제국의 남은 전력이 가장 먼저 빅토르에게 협력했고 율리우스 왕국, 베르나도 왕국, 세비아 왕국, 그리고 레드 로즈 공국. 거기다 남방 대륙의 조나라와 연나라에서도 군사를 파병했다.
세계정부의 위험성을 실감한 이들이 힘을 합쳐서 자신들의 세계를 지키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들을 성전 연합군이라고 지칭하며 그들은 세계정부에서 과거 루마니스 제국의 영토에 건설한 신도시 뉴 에덴으로 쳐들어갔다.
그 규모는 무려 120만.
30만 병력을 사방으로 나눠서 동서남북에서 모두 포위하며 적의 수도로 진격한 것이다.
그때 성전 연합군은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었다. 하지만… 연합군의 결성이 너무 늦었던 걸까? 세계정부는 이미 충분할 정도의 군사를 모은 상태였다.
총 5만에 달하는 군사와 각종 무장 병기.
1만의 초능력 전사.
그리고 SS급 능력자 세 명을 모두 소환했다.
이전에 카일과의 전투에서 전사한 피에르와 듀란을 제외한 나머지 세 명이 모두 이세계에 도착한 것이다.
독나방 세이코.
초마수 진호.
무한의 상우.
한 명 한 명이 괴물이었으며 그들이 성전 연합군의 앞을 가로막았다.
세계정부의 수도인 뉴 에덴을 공격하기 위해서 무려 한 달에 걸친 처절한 전투가 벌어졌다.
“전군 돌격하라!”
“침략자를 용서하지 마라! 우리의 세계를 지켜라!”
“오오오오오!”
성전 연합군은 최선을 다해서 싸웠다.
이권도 명예도 세계 각국의 정치적 관계도 지금은 뒷일이었다.
세계의 존망이 걸려 있는 전투에 몸을 바친 이들은 민족, 국적, 신분을 다 떠나서 한 명, 한 명이 이 세계를 위해서 몸을 던질 각오가 되어 있는 영웅들이었다.
그들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용맹하게 싸웠고 단 한 명도 뒤로 물러나는 이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승패가 정해졌다.
* * *
“빅토르 전하, 피해야 해요.”
“제길, 여기서 도망가란 말이냐? 내가 물러서면 진짜 끝장이야!”
소리치는 빅토르의 몸에는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사자 모양의 갑옷이 걸쳐져 있었다. 이것은 빅토르가 가지고 있는 비장의 수단으로, 던전에서 얻은 그의 전용 아티팩트였다.
이것이 있었기에 그는 SS급 능력자인 초마수 진호를 상대로도 물러서지 않고 맞서 싸울 수 있었다.
초마수 진호.
그는 육체 강화 능력자였고 한 번이라도 본 동물의 특성을 모두 육체로 구현할 수 있었다.
거기다 파워는 거대화한 검은 바람에 필적하고, 속도는 가속 능력을 가진 아리시아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원래라면 그랜드 마스터인 빅토르에게도 버거울 상대였지만 그의 전용 아티팩트인 네메아의 갑주 덕분에 대등하게 상대할 수 있었다.
덕분에 빅토르가 있는 남부 쪽 전선은 다른 곳에 비하면 피해가 가장 적었다.
그러나 그것도 이제 한계였다.
빅토르와 초마수가 대등하다고 해도 다른 두 명이 합류한다면 얘기는 달라진다.
“독나방 세이코와 무한의 상우가 이미 다른 전선을 다 정리하고 오고 있어요. 여기서 망설이면 후퇴도 어렵다고요!”
에이라의 외침은 평소 침착한 그녀답지 않게 굉장히 절박했다.
“오빠가 없고 드리스도 없는 지금, 당신마저 없으면 우리 세계는 진짜 끝이라고요. 최소한의 희망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살아야 해요.”
에이라의 말에 빅토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빅토르의 곁에 두 명의 충복이 다가와서 말했다.
“에이라 여왕의 말이 맞습니다.”
“주군, 피하십시오. 뒤는 우리가 맞겠습니다.”
펜닐의 권속으로서의 능력을 지닌 챈들러. 오러를 에너지로 전환해서 방출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는 파울로.
이 둘 역시 빅토르의 측근으로서 전쟁에서 종횡무진 활약한 강자들이었다.
“너희들…….”
빅토르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등을 돌리며 둘에게 말했다.
“파울로, 챈들러. 죽지 마라.”
“예.”
“주군의 명령이시라면…….”
명령하는 쪽이나 대답하는 쪽이나 알고 있었다.
그 말을 지키기 어렵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