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6화
드리스는 발레리아에게 친절하게 설명했다.
“처음 보니까 신기해 보이지? 하지만 본질 그 자체는 5서클 수준의 마법과 별반 다르지 않다. 봐라.”
그리고 그가 직접 영창을 시작하자 허공에서 무수한 화염구가 생성되었다. 그러고는…….
“더 큰 화력으로 짓밟아 버리면 그만이지.”
콰콰콰콰콰쾅!
바리케이드고 뭐고 아무 상관 없었다.
9서클 마스터의 막강한 화력은 그대로 중화기로 중무장한 병력을 날려 버렸다.
“이대로 내성까지 진입해라. 목표는 적의 지휘관과 차원 이동 장치다.”
드리스의 명령을 받은 이들 중에 근위 기사단이 가장 먼저 앞서서 달려갔다.
“돌격! 앞으로!”
“뒤처지지 마라. 제국은 우리의 나라다.”
“오오오오!”
근위 기사들이 앞장서서 돌진했다.
그들이 가는 길에는 적을 막기 위한 바리케이드와 중화기 부대로 구성된 방어 라인이 두 번이나 더 있었지만…….
“돌격!”
“쓸어 버려라!”
중화기의 위력은 강력하지만 그 강력함이 드러나 버리면 효과가 반감되게 마련이다.
루마니스 제국의 근위 기사쯤 되면 그들은 모두 초인이라고 봐야 한다. 집중하면 날아오는 총알 정도는 볼 수 있었고 검이나 방패로 쳐낼 수도 있었다.
총알을 막으면서 빠르게 돌진해서 간격을 좁힌 후 근거리에서 검을 휘두르면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다.
그렇게 연거푸 적의 방어진을 돌파한 기사들은 자신감이 차올랐다.
그래서일까? 생전 처음 보는 거대한 쇠 마차가 눈앞에 나타나도 쫄지 않고 돌격했다.
“적을 물리쳐라!”
“우오오오!”
“바보들아. 멈춰!”
당연히 그 광경을 보고 드리스는 기겁을 해서 말렸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것과 동시에 왕성의 입구에 배치되어 있는 탱크는 일제히 불을 뿜었다.
퍼어엉! 펑펑펑!
탱크가 주포를 발사하는 것과 동시에 지면에 미리 매설해 둔 클레이모어도 같이 터졌다.
이 정도 화력이라면 아무리 초인의 능력을 지니고 있는 기사라고 해도 위험했다.
“후우우… 다 뒤질 뻔했네.”
누가 막아 주지 않았다면 말이다.
드리스는 순간적으로 실드를 쳐서 근위 기사들을 보호했다.
“제길, 옛날이나 지금이나 기사 놈들 닥돌 좋아하는 건 알아줘야 해. 탱크한테 그냥 들이대는 미친놈들이 어디 있어. 조금은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살아라. 이 멍청이들아!”
사실 기사들이 탱크를 어찌 알고 대응하겠는가?
어쨌든 드리스가 적의 막강한 화력을 막아낸 덕분에 근위 기사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아주 잠시였지만 말이다.
“끄아아악!”
제국의 자랑스러운 기사들이 갑자기 갈기갈기 찢어 죽었다.
마치 누군가가 장난삼아 잡아 뜯은 것처럼 말이다.
“어떤 새끼야?!”
버럭 고함을 지르는 드리스의 등 뒤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그리고 순간 드리스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이 자신을 꽉 잡으려고 하는 느낌을 받았다. 온몸을 쥐어짜는 듯한 압박감이 느껴지려는 찰나, 드리스는 블링크 마법으로 몸을 피했다.
그리고 자신을 공격한 놈을 향해서 반사적으로 공격 마법을 퍼부었다.
퍼퍼펑! 콰르릉! 쩌저엉!
역시나 9서클 대마도사라고 해야 할까? 급한 대로 가볍게 날린 공격 마법이었지만 그것만 해도 세 발의 파이어 볼과 라이트닝 볼트, 그리고 콜드 스톤까지 함께였다.
그 공격 마법을 맞은 상대는 원래 뼈도 못 추리고 죽어야 하지만…….
“방어했다 이거지?”
드리스의 공격 마법은 상대방의 몸에 직접 닿지 않았다. 염동력을 자기 몸에 둘러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는 염동 실드를 펼친 것이다.
염동력을 주 능력으로 삼는 초능력자들이 가장 즐겨 쓰는 방어 기술이고 이전에 아폴론이 사용했을 때도 상당히 강력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인물은 훨씬 더 강력하다.
가장 흔한 능력인 염동력을 주로 쓰는 초능력자 중에서도 SS급에 오른 유일한 인물. 그게 바로 분쇄의 피에르였다.
피에르는 자기를 공격한 드리스를 보고 말했다.
“너, 강하구나.”
“……”
“네가 카일 화이트지?”
그 말을 들은 드리스는 순간 멈칫하다 말했다.
“그래. 내가 카일 화이트다.”
“그래. 그렇구나.”
그리고 피에르의 몸이 다시 사라졌다.
염동력으로 몸을 이동시켜서 초고속으로 움직이는 것이었지만 그 속도는 거의 텔레포트 레벨이었다. 그렇게 움직여서 드리스의 뒤를 접한 후에는…….
“그럼 죽어.”
콰콰쾅!
드리스를 향해서 무지막지한 파괴력의 염동파를 퍼부었다.
“당할 것 같냐?”
물론 드리스 역시 전투 경험이 풍부해서 즉시 블링크를 이용해서 피했다.
그러고도 모자라서…….
핏핏, 피피핏.
사방에서 드리스가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적의 파괴력을 인정하고 타깃이 되지 않기 위해서 쉬지 않고 블링크를 전개하며 움직이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가 외쳤다.
“안으로 들어가. 이놈은 내가 상대한다.”
그 말을 듣고 근위 기사들은 일순간 망설였다. 저렇게 강대한 적을 상대하는 것이라면 자신들이 남아서 도움을…….
콰아앙! 퍼엉! 콰르르릉!
“…될 리가 없군.”
“내성으로 돌입한다! 돌격!”
“우오오오!”
사람은 사람끼리 놀고 괴물은 괴물끼리 놀아야 하는 법이다.
상황을 파악한 근위 기사들은 빠르게 내성으로 돌입했고 카일의 부하들도 그 안으로 돌입하려고 했다. 하지만…….
“몇 명 남겨두고 갈까?”
“방해되지 않겠냐?”
발레리아와 검은 바람이 전황을 보며 말했다.
그들의 입장에서 내성으로 돌입하는 것도 중요했지만 드리스만 한 전력을 이대로 방치하는 것도 아쉬웠다.
최소한 능력자 다수를 남겨두고 가면 여차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그냥 방치하면 우리가 빚을 지는 셈이 돼.”
“그건 그렇지.”
지금 드리스는 카일 화이트를 사칭하면서 싸우고 있다. 적이 오해를 한 것을 오히려 긍정하며 자신이 미끼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 드리스의 판단력 덕분에 적의 주력 강자로 보이는 전력 한 명을 여기에 잡아 둘 수 있다.
이대로 그냥 외면했다가 드리스가 패해서 죽기라도 하면 많이 찝찝할 것 같았다. 결국…….
“어쩔 수 없지. 녹색 나무. 푸른 물결.”
“예, 칸.”
“부르셨습니까?”
검은 바람의 부름에 측근 전사들이 달려와서 부복하며 외쳤다.
“내가 여기 남는다. 너희들에 대한 지휘권은 잠시 나의 맹우인 발레리아 드 스콧에게 양도한다.”
“칸, 그래서는…….”
“차라리 저희들이 남겠습니다.”
“이건 결정 사항이다. 무조건 따라라!”
검은 바람이 위엄 있게 외치자 부하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검은 바람은 발레리아에게 말했다.
“여기는 내가 맡지. 어차피 실내에서의 전투는 내 능력과 맞지 않아.”
“그렇군. 알았다. 그럼 맡기겠다.”
그리고 발레리아가 남은 병력을 이끌고 내성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모두가 들어가자…….
“후으으읍!”
검은 바람의 몸이 순식간에 부풀어 오르더니 커다란 거구가 되었다.
“가세하겠소.”
쩌렁쩌렁하게 외치는 검은 바람의 목소리에 드리스가 투덜거리듯이 대답했다.
“어차피 남을 거면 그 가슴 큰 기사가 좋았는데…….”
“…….”
검은 바람은 그의 말을 애써 못 들은 척했다.
* * *
외성벽을 돌파하고 황궁의 내성으로 돌입하는 과정에서 피해는 거의 없었다.
적들의 대비가 생각보다 약했던 것이다.
중화기로 무장한 3겹의 바리케이드와 탱크 다섯 대.
평범한 중세 르네상스 시대의 냉병기 군대라면 절망 그 자체의 대응책이었겠지만 이곳은 초인과 마법이 판을 치는 세계다.
특히 현대인으로서의 전생을 기억하는 인물도 있는 이상 그 정도의 무장은 크게 장애가 되지 않았다.
거기다 적의 주력으로 보이는 능력자 한 명이 나타났지만 드리스와 검은 바람이 거기에 맞서서 잘 싸우고 있는 게 보였다.
완벽이라고는 못 하겠지만 이 정도면 일이 굉장히 잘 풀리는 셈이었다.
“이 정도면 이대로 진행해도 될 듯하군.”
후방에서 안전하게 지켜보고 있던 카일은 이 정도면 시드의 능력을 사용할 필요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 카일은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선입견이 가져온 함정이라고 해야 할까?
제국의 수도를 공격해서 되찾는다는 목적 때문에 적이 반드시 내성에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세계정부의 입장에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할 이유도 없는데 말이다.
“저게 제국의 황제가 맞나?”
“예. 틀림없어요.”
“그렇다면 옆의 인물이 카일 화이트겠군.”
제국의 수도가 다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서 대기 중이던 카일과 황제는 깜짝 놀라서 외쳤다.
“너는?”
“혜정!”
카일은 갑자기 나타난 적에게 긴장했고 황제는 한때 자신이 사랑한다고 믿었던 여자가 나타나자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혜정은…….
“오랜만이에요. 폐하. 나 보고 싶었어요?”
손을 흔들면서 상냥하게 미소 지었다.
이 상황에서 그런 미소가 오히려 황제를 더 분노하게 하는 것을 알면서 말이다.
“짐이 그대를 그리도 아끼고 사랑했는데 어찌 배신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원래 스파이가 그런 거예요.”
‘그건 그래.’
카일을 비롯한 몇몇 사람들이 꽤 공감했다.
황제는 배신감에 몸을 떨었지만 혜정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신 그녀는 자기 옆에 있는 남자에게 말했다.
“저 사람이 황제니까 사로잡으면 제국을 손쉽게 장악할 수 있을 거예요.”
“알겠다. 이제 꺼져라.”
“예. 그럼 부디…….”
혜정은 아무런 불쾌함도 보이지 않고 순순히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앞으로 나선 남자가 말했다.
“얌전히 항복하면 지금 당장 죽이지는 않겠다.”
“그런 말에 항복하는 호구가 실제 있기는 있나?”
카일의 말에 상대가 담담하게 말했다.
“반항은 의미가 없다. 내 이름은 듀란. 위대한 세계정부의 SS급 능력자다.”
“흐으음… 세계정부의 충견이로군.”
카일의 말에 듀란은 움찔했다.
“너… 나를 알고 있나?”
“글쎄? 네가 알아서 생각해 보지 그래.”
“…….”
듀란은 고심하는 듯했다.
물론 카일은 듀란의 정체를 알고 있다. 이전에 아폴론을 아군으로 만들면서 현재 세계정부의 주요 능력자와 신분 구조 등등에 관해서 여러 가지 정보를 얻어냈기 때문이다.
바다의 재앙 듀란.
물과 관련된 능력을 사용하는 능력자로, 세계정부에서 보유하고 있는 다섯 명의 SS급 능력자 중 한 명이다.
그리고 특히 유명한 것은 SS급 능력자들 중에서 가장 세계정부에 충성심이 강한 인물이라는 것이다.
SS급의 능력자 정도 되면 세계정부에서도 함부로 대하기 어렵기 때문에 세심하게 관리를 하고 있다.
회유, 강압, 세뇌, 협박 등등…….
사용 가능한 방법을 모두 동원해서 그들을 제어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가 바다의 재앙 듀란이라고 했다.
그는 세계정부의 사상에 격렬하게 공감하고 있으며 세계정부의 명령에 철저하게 복종하는 능력자였다.
“넘어온 SS급 능력자는 너뿐이냐?”
카일의 질문에 듀란의 눈빛이 스산하게 변했다.
“네놈, 생각보다 더 위험한 놈이군.”
“그래?”
“어디서 그런 정보를 알았는지 전부 불어야겠다.”
쩌저적.
듀란의 발밑이 갈라지더니 지면에서 물이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카일은 시드와 아리시아와 함께 융합을 하며 듀란에게 말했다.
“내 말을 듣고 싶다면 나를 사로잡아야겠군. 그런데 어쩌지? 난 그냥 죽일 생각인데?”
“상관없다.”
카일은 근처에 대기 중인 특전대 부하들에게 황제를 맡기고 앞으로 나아갔다.
SS급 능력자 듀란 대 전 SS급 능력자 카일의 전투가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