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종전.
드리스와 카일이 전쟁을 멈추기로 확인하고 제국의 황제는 정식으로 종전을 선언했다.
물론 순순히 선언한 건 아니다.
황제는 갑자기 이게 무슨 짓이냐고 버럭 화를 내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드리스가 나서서 간단하게 몇 마디를 하니 순순히 정전 선언에 협력을 했다.
정전을 선언하고 바로 전선을 정리한 후 카일은 제국의 수도로 진격했다.
거기서 원 어스 클랜을 정리하고 세계정부의 끄나풀을 잡아서 족치면 사태를 조기에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건 큰 실수요.”
“…….”
“…….”
“다른 차원의 침략? 말도 안 되는 어불성설이지.”
“…….”
“…….”
“드리스, 당신은 진정 저 말을 믿는 거요? 제국의 수호신이자 9서클 대마도사로서의 긍지는 어디로 간 거요?”
쫑알쫑알. 쨍알쨍알. 구시렁구시렁.
황제가 하는 말은 카일과 드리스에게 신경 거슬리는 백색 노이즈 정도로밖에 안 되었다.
“쟤 좀 닥치게 하면 안 되오?”
사실 그래서 좀 거슬리기는 했다. 제국의 황제를 감히 ‘쟤’라고 말한 카일이었지만…….
“종전 선언을 황제가 하는 게 효과적이라고 말한 건 너였지? 실제로 제국군을 무리 없이 흡수했고 말이야.”
드리스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드리스 자신이 더 심한 말을, 더 자주 하니 말이다.
“제길, 내가 왜 그런 말을…….”
카일이 그런 제안을 할 때는 황제가 이렇게 담배 끊긴 중삐리 흡연자 같은 찌질한 인간인 줄은 몰랐다.
충분히 상황을 설명하고 납득시켰다고 생각해도 바로 몇 시간 후가 되면 또 이건 아니라고, 터무니없는 말이라고 이렇게 쫑알쫑알 거리고 있다.
‘아오……. 진짜 저걸 일국의 황제다 보니 팰 수도 없고…….’
“드리스 지금이라도 마음을 돌려…….”
“입 좀 다물어!”
빡!
카일은 못 패지만 드리스는 황제를 패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큭…….”
사실 루마니스 제국의 역대 황제들 중에 드리스에게 맞은 황제는 안 맞은 황제보다 더 많았다.
황제의 충실한 기사인 구스타프 공작도 그저 애써 시선을 돌려서 못 본 척할 뿐이었다.
“앞으로 이틀거리면 수도에 도착한다. 그때 원 어스 클랜을 잡아서 추궁하면 모든 사실이 드러날 거다.”
“혜정이 그럴 리가 없소. 그녀가 날 속였을 리가 없단 말이오?”
황제가 원 어스 클랜을 감싸는 이유 중에 하나…라기보다는 이유가 결국 자신의 애첩이 혜정이기 때문이었다.
후궁이 수십이 넘는 황제가 여자에게 순정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 웃기는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제는 진심으로 혜정을 믿고 사랑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른 세계에서 온 침략의 첨병이고 자신에게 접근한 것도 다른 목적이 있어서 그랬다는 말을 순순히 믿을 수는 없었다.
황제든 평민이든 노예든 간에 사랑에 빠진 남자는 눈이 머는 법이다.
‘하아아… 저것도 어떻게 보면 핏줄인가?’
드리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기억하는 친구인 초대 황제부터 시작해서 루마니스 제국의 황제들은 유난히 자기 여자를 아끼거나 집착하는 인간들이 많았다.
현 황제 역시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어쨌든, 이틀이다. 이틀 후에 수도로 입성하면 모든 게 드러나겠지.’
다음 날.
카일과 드리스가 이끄는 연합군은 남쪽에서 한 무리의 군대가 합류했다.
빅토르가 이끄는 3국 연합군과 거기에 맞서고 있던 바라빈 케메로 후작이 이끄는 제국군이었다.
양쪽의 군세를 총 합하면 50만이 넘었지만 빠른 진군을 위해서 속도를 줄였고 대략 7만의 병력으로 구성해서 빠르게 합류한 것이다.
“축하하네. 사위 황제를 잡았다고 하더니 진짜였군.”
“사로잡은 건 아닙니다. 정전을 한 거죠.”
“하하하. 그게 그거지.”
빅토르가 호탕하게 웃으며 카일의 등을 두드렸다.
그 모습을 황제의 충신인 구스타프 공작이 못마땅하게 노려봤지만 바라빈 케메로 후작이 그런 공작을 말렸다.
“일단 진정하십시오. 공작님.”
“폐하에게 저런 무례를 참으란 말인가?”
“드리스 님의 예도 있지 않습니까?”
“끄으응…….”
한평생 귀족의 예법을 충실하게 지키고, 황실에 대한 충성심을 굳건하게 유지해 온 고지식한 구스타프 공작에게는 현 상황이 참 불편했다.
하지만 케메로 후작의 말대로 지금 중요한 것은 황제를 향한 예의가 아니라 세계의 위기를 지키는 것이다.
‘카일 화이트는 몰라도 드리스 님이 거짓을 말할 이유는 없다. 그는 수백 년간 제국을 지켜온 수호신이니…….’
혜정에 대한 사랑으로 눈이 먼 황제와 달리 구스타프 공작은 세계정부의 침공과 공략을 믿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서 빠른 발전을 보인 원 어스 클랜의 존재가 수상하기도 했다.
카일 화이트나 빅토르 고르시파 같은 영웅이 나타난다고 해도 어느 정도 전조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원 어스 클랜은 너무나 급작스럽게 등장해서 급성장했다.
만약 그게 정말로 다른 세계에서 온 침략의 첨병이라면…….
‘제국이, 아니, 이 세상이 위험할 수도 있다.’
구스타프 공작은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 *
연합군은 군세를 가다듬고 제국의 수도로 진군했다. 그리고 진군하는 군세에 앞서서 황제의 이름으로 전령을 보냈다.
[연합군이 제국의 수도로 입성하니 문을 열고 맞이할 준비를 하라. 또한 모험가 클랜인 원 어스의 클랜장은 황제의 호출에 응할 것이며 황궁의 비인 혜정은 황제가 찾아갈 때까지 별궁에서 근신하고 있으라.]
그런 명령을 담고 있었다.
이렇게 전령을 보낸 후 황제는 곧 모든 조치를 마쳤다는 내용을 담고 돌아올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전령이 돌아오지 않았다. 나쁜 답을 가지고 오는 것 정도가 아니라 말 그대로 전령이 돌아오지 않은 것이다.
가장 나쁜 케이스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설마…….”
불안해하는 황제의 곁에서 카일이 말했다.
“역시… 장악당했나?”
카일의 말에 옆에 있던 드리스가 말했다.
“세계정부라는 놈들이 움직였다고 보는 거냐?”
“그게 가장 확률이 높소.”
“서둘러야겠군.”
의견이 일치한 둘은 연합군 안에서도 최고의 정예들만을 추슬러서 진군했다. 단 그런 최고의 정예들 사이에 빅토르는 빠져 있었다.
“왜 나는 빼는 건가? 내가 부족하다 이건가?”
당연히 빅토르는 반발했지만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세계정부가 제 예상보다 과격하게 움직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물론 최선을 다해서 승리를 노리겠지만 최악의 경우를 대비한 보험이 필요합니다.”
“…….”
빅토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카일이 말하는 보험이라는 것이 어떤 경우의 수를 대비한 것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대단한 상대라는 건가? 내 사위가 패배를 염두에 둘 정도로?’
결국 빅토르는 카일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리고 카일은 드리스와 발레리아, 검은 바람, 아리시아, 시드. 그리고 은장미 기사단과 투란 전사단, 그리고 특전사들만을 대동하고 빠르게 진군을 시작했다.
이동 속도를 최대한 올린 연합군은 서둘러서 제국의 수도로 진군했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빌어 처먹을…….”
세계정부에게 점령당한 루마니스 제국의 황도였다.
* * *
카일이 드리스를 설득하고 연합군을 결성했을 때, 황도에서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혜정이었다.
혜정은 세계정부에서 계급이 높은 것도 아니었고 능력이 뛰어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가 황제의 여인이라는 역할을 맡아서 그들의 계획에 나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수 있었고, 출세를 향한 그녀의 욕망과 비범할 정도로 뛰어난 눈치를 가지고 있음도 한몫했다.
미모와 상황과 사람을 살피고 파악하는 예감.
혜정은 그 두 가지를 무기 삼아서 지금의 위치까지 오른 여자였다.
그런 그녀였기에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빨리 선택하지 않으면 일을 그르친다고 말이다.
불안감을 느낀 최초의 단초는 제이의 실종이었다.
대외적으로 원 어스 클랜의 클랜장이자 혜정의 친오빠의 역할을 하던 그가 갑자기 실종된 것이다.
혜정의 신분으로 그 이유까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게 세계정부에서 계획한 인사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급한 대로 제이의 자리를 같은 급의 간부였던 케이가 대신 맡아서 처리하고 있었지만 그때부터 세계정부의 계획이 점점 어긋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루마니스 제국이 침략당하고 카일이 서쪽 해안선에 상륙 작전을 전개했을 때, 그녀는 루마니스 제국의 패배를 점쳤다.
루마니스 제국의 안에서 세력을 키우고 점차적으로 루마니스 제국 자체를 차지한 후,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수급하며 인력과 물자를 보내서 이세계를 차지한다는 세계정부의 계획이 틀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결국 혜정은 빠르게 움직여 우선 제이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는 케이를 설득했다.
혜정에게 있어서 케이를 설득하는 일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관계가 나빴던 제이와 달리 케이와는 그렇게 대립한 적도 없었기 때문에 그저 침대에서 뜨거운 시간을 몇 번 보내면서 정을 붙인 다음 약간의 애원조로 부탁을 하면 될 뿐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까… 이진영 대위님과 만나게 해 달라고?”
“예. 직접 안 만나도 좋아요. 그냥 따로 보고하고 싶은 내용이 있어서 그래요.”
케이와 혜정은 호화로운 침대에 둘이서 누워 있었다.
황제의 후궁이 머무는 별궁으로 케이를 초대한 혜정은 여기서 그와 관계를 가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너 같은 능력자가 1급 시민인 이진영 대위님을 만나는 것은 어려워.”
처음에 케이는 혜정의 부탁을 어려워했다.
하지만 혜정은 남자들을 구워삶는 데 무척 익숙한 여자였다.
“유능한 누군가가 중간에 중계해 주면 그렇지도 않잖아요?”
혜정은 은근히 케이의 유능함을 치켜세우면서 말했다. 그리고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라 행동도 곁들여서 그를 서서히 녹여갔다.
어느새 그녀는 케이의 몸에 밀착했다.
그리고는 사내라면 누구라도 애간장이 녹을 정도로 요염하면서도 음란하게 움직이며 속삭였다.
“부탁이에요. 이번에 도와주면 은혜는 절대 잊어버리지 않을게요.”
“으으음… 그건… 음…….”
케이는 쾌락에 판단력이 흔들렸다.
‘그냥 연결만 해 주는 거라면 괜찮을지도…….’
결국 케이는 이진영과 통신이 가능한 주파수 코드와 암호까지 모두 말해 주었다. 그 대가로 혜정은 그에게 정신이 혼미해질 정도로 쾌락을 주었고 말이다.
그렇게 설득을 한 혜정은 세계정부의 이진영 대위와 통신으로 대면을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제이가 미친 걸까? 아니면 네년이 미친 걸까?
혜정과 통신이 연결되자마자 이진영이 한 말에는 지독할 정도의 불쾌함이 느껴졌다.
혜정은 거기에 넙죽 엎드리면서 말했다.
“죄송합니다. 꼭 보고해야 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직접 통신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디 용서를 바랍니다.”
―그건 지금부터 네가 하는 말을 듣고 정하겠다. 별것 아니라면…….
뒤에 말은 굳이 하지 않아도 이해가 갔다.
여기서 이진영을 납득시키지 못하면 혜정은 절대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혜정은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식은땀을 느끼며 애써 침착하게 말문을 열었다.
“최근 벌어지고 있는 루마니스 제국의 전쟁이 불리하게 흘러가고 있습니다. 잘못해서 제국이 망하면 세계정부의 원대한 계획이 틀어질 수도 있습니다.”
―미개한 원주민들의 나라가 망하고 말고에 그렇게 큰 영향이 끼친다고 생각하냐?
“물론 이 세계의 인간들은 미개하지요. 지구인에 비하면 문명 수준이 너무 열악해서 말할 줄 아는 원숭이 정도의 가치밖에 없을 겁니다. 하지만…….”
―하지만?
“지금 당장 차원 이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루마니스 제국을 이용하자는 것이 정부의 전략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 계획이 틀어질 위기에 처했으니 마땅히 보고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아아… 그래. 그렇긴 하군.
이진영은 한숨을 내쉬며 푸념하듯이 말했다.
사실 혜정의 말이 맞기는 맞았다.
신분이 미천한 혜정에게 이런 지적을 받는다는 사실이 불쾌하긴 했지만 확실히 루마니스 제국이 무너지면 그동안 물밑으로 했던 많은 공작들이 의미가 없어져 버린다.
원 어스 클랜의 대외적인 활동은 물론이고, 그동안 구워삶아 놓은 루마니스 제국의 귀족들과 용병들까지 말이다.
혜정은 이진영이 납득을 한 것 같자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루마니스 제국을 침공하고 있는 것은 카일 화이트라는 특이 대상입니다. 그동안의 정보에 의하면 그는 초능력자를 양산하는 능력이 있음이 분명합니다.”
―알고 있다. 불길한 능력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