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화
잠시 후, 황제와 드리스는 회담을 위해서 약속된 장소로 나왔다. 하지만…….
“이상하군. 왜 아무도 없지?”
눈살을 찌푸리며 말하는 황제에게 곁에 있는 구스타프 공작이 말했다.
“폐하. 약속 시간이 아직 조금 남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짐을 기다리게 하다니…….”
불쾌해하는 황제의 모습에 구스타프 공작은 고개를 숙이며 침묵으로 일관했다.
‘쯧쯧, 이래서 곱게 자란 애들은 버릇이 없다니까.’
황제의 자존심을 보고 드리스는 피식 웃었다.
어쨌든 내일이면 서로 죽고 죽일 몸. 그전에 만나서 몇 가지 얘기는 나눠 보고 싶었다. 그런데…….
10분이 흐르고 20분이 흐르면서…….
“이 새끼들, 장난하나?”
드리스도 슬슬 열을 받기 시작했다.
약속된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 상대가 오지 않아 짜증이 난 것이다.
“혹시 이 새끼들, 바람맞히려는 건 아니겠지?”
“설마, 국가 간의 수뇌 회담을 그렇게 할 리가 있겠소?”
“할 수도 있지. 왜 못해?”
“…….”
‘당신 같은 또라이나 그렇게 하겠지.’
황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황제는 카일이 그런 이라는 걸 모르고 있었다.
전령 한 명이 말을 타고 헐레벌떡 달려왔다. 그리고 쓰러지듯이 부복하며 급하게 말했다.
“폐하. 화이트 공국의 기습이 제국군의 본진을 덮쳤습니다!”
“뭐, 뭐가 어째?”
카일 화이트는 마음먹으면 드리스보다 훨씬 더 또라이 같은 짓도 할 수 있는 남자였다.
* * *
기습에 앞서서 카일은 황제와의 회담을 받아들였다.
사실 이제 와서 회담을 또 하려고 그런 것은 아니다.
드리스에게 자신이 숨겨둔 정보를 제공했을 때 설득할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모를까. 그게 안 된다는 것을 이미 한 번 체험한 지금에 와서 회담은 낭비다.
하지만 드리스와 황제, 그리고 구스타프 공작이라는 인물들을 제국의 본진에서 떨어트려 놓을 수 있다는 기회로 활용할 수는 있었다.
카일은 회담을 받아들이면서 그사이에 군의 진형을 정비하여 과감하게 기습을 펼쳤다.
밤하늘에 그리폰을 탄 은장미 기사단이 날아오르고, 동시에 검은 바람이 이끄는 300의 투란 전사단이 제국군의 진형을 덮쳤다.
“다 박살 내 버려라!”
“화이트 공국을 위하여!”
“우오오오오!”
600명 정도의 기습 병력이었지만 그 병력이 은장미 기사단과 투란 전사단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들은 30만이 넘는 제국군을 철저하게 유린하고 있었다.
“맞서 싸워라! 진형을… 커억…….”
“이놈. 이 몸은 길메른 기사단의… 큭.”
그들을 막기 위해서 제국의 기사들이 용맹하게 나섰지만 막을 수가 없었다.
“귀찮다. 한 번에 쓸어주마!”
그리고 적진에 충분히 잠입한 검은 바람은 말에서 내리더니 자신을 거대화했다.
“어어어……?”
“저건? 거인?”
“저게 검은 바람이다. 모두 공격하라!”
제국군 진형의 모든 이들에게 한눈에 주목받을 수 있을 만큼 거대화한 검은 바람.
그를 향해서 무수한 화살과 창이 날아오고 마법도 날아들었다. 하지만 검은 바람은 그걸 다 맞아주면서 대검을 뽑았다. 그러고는…….
“우워어어어어!”
콰콰콰콰콰콰!
대검으로 지면을 한 번 쓸어 버리자 무시무시한 진동과 함께 무수한 제국의 병력이 휩쓸려 날아가 버렸다.
그 광경을 하늘에서 본 발레리아가 중얼거렸다.
“무기로 대검 대신에 강철 빗자루를 사용하는 편이 좋을지도…….”
어쨌든 초인전력의 기습으로 인해서 제국군은 완벽하게 기선을 제압당했다.
그리고 멀리 떨어져서 상황을 지켜보던 호크가 말했다.
“좋다. 전군! 진군하라!”
“옛!”
화이트 공국의 5만 본군이 진군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제국군을 유린하기 위해서 말이다.
“제길, 비겁한 새끼들!”
드리스는 황제의 곁을 떠나서 황급하게 제국군의 본진으로 돌아왔다.
설마 회담을 가지기로 하고 이렇게 뒤통수를 때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던 사태였다.
전쟁터에서 야습이라는 것은 반칙이 아닌 전략이라고 하지만 회담을 수락한 후에 이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양심이라고는 개미 눈곱만큼도 없는 개 치사한 새끼 같으니라고. 잡으면 접시 물에 코를 처박아서 익사시켜 버릴 테다.”
“굳이 그렇게 번거로운 짓을 하겠다고?”
드리스의 악에 찬 혼잣말에 대답이 들려왔다. 당연하지만 대답을 한 사람은…….
“카일 화이트.”
“여기서 잡혀 줘야겠다. 드리스 엔케모니아.”
카일은 드리스가 본진에 합류하기 전에 잡기 위해서 부하들을 데리고 길목을 지키고 있었다.
좀 더 엄밀히 말하면 크림슨 블레이드를 깨우면 곤란하니 막은 것이다.
‘에너지의 충전이 완전히 완료되지는 않았겠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는 일이지.’
카일의 곁에는 아리시아와 시드. 그리고 특정한 조건으로 골라서 데리고 온 은장미 기사단원 다섯과 특전대원 두 명이 함께 있었다.
크림슨 블레이드가 없다고 해도 드리스는 만만치 않다. 하지만 카일은 이미 드리스와 싸워봤다. 즉, 상대방에 대한 정보가 있다는 말이다.
지금 카일이 데리고 온 인선은 드리스 엔케모니아를 공략하기 위해서 맞춤으로 준비해 온 인선이었다.여기서 승부를 보기 위해 작정을 하고 온 것이다.
까드득.
“좋다. 어디 해 보자.”
드리스 역시 그 점을 느끼고 바로 결전을 준비했다.
크림슨 블레이드라는 사기 치트를 뺀다고 해도 그는 드리스 엔케모니아. 이 대륙의 최강자 중 한 명이었다.
9서클이라는 지고한 경지와 수백 년에 걸친 풍부한 전투 경험이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지금 그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자신의 전투 방식에 대한 정보가 공개되었다는 것이다.
무한에 가까울 정도로 다양한 변수가 존재하는 능력자들의 전투에서 정보의 유출은 전투력을 절반 이하로 떨어트릴 수 있다.
카일은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우선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하는 것은…….’
“뒤져라!”
드리스는 그렇게 외치며 카일을 후려치기 위해 빠르게 접근했다.
어디서 배우고 수련했는지 모르겠지만 드리스의 격투 기술은 흉내 내기가 아니라 진짜였다.
하긴, 수백 년의 시간이 있었으니 취미로 익힌다고 해도 그 정도 수련 기간이면 무시할 수 없다.
거기다 드리스 본인이 직접 보조 마법으로 자신을 강화하면 그 전투력은 그냥 주먹 좀 쓰는 마법사로 취급할 수 없다. 실제로 그랜드 마스터인 빅토르가 맨손으로 압도당하지 않았는가?
그러나…….
“느려.”
카일은 그런 드리스의 공격을 여유 있게 피했다. 어느새 아리시아와 융합해서 그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드리스의 보조 마법이 아무리 속도를 강화한다고 해도 아리시아의 가속 능력보다는 성능이 떨어졌다.
둘의 속도를 비교했을 때 드리스의 속도가 1이라면 카일은 1.7~1.8 정도는 되었다.
두 배에 약간 못 미치는 속도긴 하지만 이거면 충분했다. 왜냐하면 카일 역시 맨손 격투 능력은 충분히 익히고 있으니 말이다.
퍼퍽! 퍼억!
가볍게 들어간 삼 연타.
원투에 이어서 더킹하며 들어간 바디 훅.
강철 건틀릿을 끼고 있는 카일의 주먹이 초고속으로 적중했다.
그러자 드리스의 안색이 일그러졌다.
“이게…….”
드리스가 니킥으로 반격하려고 했지만 그때 카일은 이미 뒤로 빠져 있었다. 그리고 카일은 가볍게 스텝을 밟으며 말했다.
“전생에서 우리는 반강제로 한 가지 이상의 격투기는 익혀야 했지. 복싱은 내 특기였다.”
“그래서 어쩌라고?”
“별로, 그냥 지금부터 니가 일방적으로 처맞을 거란 얘기지.”
“지랄!”
드리스는 다시 달려들었고 카일은 그런 드리스를 정면으로 상대했다.
‘제길, 그냥 마법으로 싸울까?’
후우웅!
드리스의 주먹이 다시 한번 헛손질을 했다. 그리고 짧지만 날카롭게 꼽히는 다채로운 콤비네이션…….
퍼퍼퍽! 퍽퍽퍽!
그렇게 자기 몫만 얄밉게 챙긴 카일은 드리스가 자세를 바로잡기 전에 뒤로 빠졌다.
완벽하게 둘의 실력 차이를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카일의 주먹은 예리함과 절도가 있었고 무엇보다 이치가 있었다. 최단 거리로 최대 효율로 최소 위험으로…….
격투기라는 것은 그냥 막 싸움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은 지독할 정도로 합리적으로 이치에 맞게 만들어진 것이다.
자신이 유리하고 상대는 불리하게 싸우기 위해서 당하는 사람이 치사하다고 느낄 정도로 자기가 유리한 국면을 만들며 싸운다.
그래서 배우지 않은 사람과 배운 사람의 차이가 압도적으로 벌어진다.
드리스 역시 수백 년 동안 격투술을 수련하긴 했지만 사실 그가 익힌 건 그냥 자기류 독학이다.
지독한 방구석 폐인인 그가 누구에게 격투술을 배울 리가 없었다.
그냥 혼자서 심심풀이로 샌드백을 만들어서 치고 옛날 액션 영화나 격투기 시합 같은 걸 생각하면서 운동 삼아서 수백 년간 수련한 것이다.
그거야 수백 년의 시간을 들이면 그렇게 해도 어느 정도 틀은 잡힐 테고, 무엇보다 각종 보조 마법으로 강화를 하면 실전에서 써먹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수준의 속도, 아니, 더 빠른 속도를 보유하고 있는 카일에게는 그런 드리스의 빈틈이 너무나 뻔하게 보였다.
‘중심을 전혀 못 잡고 있군. 크게 휘두르는 버릇이 있어서 공격 후에 빈틈도 크다.’
원래 격투기를 독학으로 익히면 나쁜 버릇이 몸에 배기 쉽다. 잘못된 버릇을 누구도 고쳐주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 상태로 반복 수련을 하다 보니 그렇게 되는 것이다.
지금의 드리스가 딱 그랬다.
한마디로 순수한 격투 능력으로는 아무리 강화를 해 봐도 드리스는 카일의 상대가 안 된다는 말이다.
드리스 역시 그걸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마법사로서 카일을 상대해야 하는데…….
‘제길, 상황이 안 좋아.’
드리스는 크림슨 블레이드를 기동시키기 위해서 마나를 아껴야 했다.
본격적으로 마법을 사용해서 싸운다면 크림슨 블레이드에게 마나를 충전하는 게 불가능하다.
만약 이 기습이 철저하게 계획된 것이라면 제국의 본군은 이미 낭패를 보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즉, 드리스가 크림슨 블레이드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이 전투에서 이긴다고 해도 전쟁에서는 패배하게 된다는 말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마법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신체 강화만으로 적을 상대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큭…….”
퍼어억!
자신의 늑골에 정확하게 박히는 상대의 바디샷에 드리스는 머리가 어질어질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구력도 강화한 내가 이 정도의 대미지를 입다니…….’
대미지가 쌓인다는 게 바로 이런 걸까? 아까부터 머리가 너무 어질어질했다.
‘마치 멀미하는 듯한… 잠깐.’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했다.
상대방의 주먹을 좀 허용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자신은 내구력을 올려둔 상태다.
타격을 많이 허용해 뇌가 울려서 어지러울 수 있다고 해도 이건 조금 이상했다. 이제는 시야까지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제길, 웨이크 업!”
그는 빠르게 각성 마법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신을 각성시켰다.
뇌를 빠르게 각성시키는 그의 오리지널 마법으로, 원래는 숙취 해결용으로 만든 마법이었다.
그렇게 마법으로 뇌를 각성시키자 조금은 정신이 맑아지는 듯했다. 그리고 덕분에 깨달을 수 있었다.
카일이 데리고 온 놈들 중에 누군가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제길, 이 피라미들이!”
드리스가 손을 뻗어서 즉석에서 화염으로 카일의 부하들을 날려 버리려 했다.
“막아!”
“옛!”
하지만 카일이 데리고 온 은장미 기사단의 단원들이 전방에 나서서 강력한 방어막을 형성해 아군을 보호했다.
그리고 카일이 드리스를 향해서 말했다.
“생각보다 늦게 깨달았군. 과학적 지식이 있으니 빠르게 깨달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제길, 초음파냐?”
“그런 거지?”
드리스를 어지럽게 한 것은 특전대원 중에 한 명의 능력이었다.
그의 능력은 박쥐처럼 초음파를 사용해서 주변을 탐색하고 감지하는 것이었는데, 그 때문에 원래는 아리시아가 있는 탐색 조에 들어갈 뻔했지만 본연의 전투 능력이 생각보다 높아서 정면 승부가 가능한 특전대로 들어가게 된 케이스였다.
그리고 그의 능력에는 또 다른 활용법이 있었는데 바로 인간의 귀에는 들리지 않는 미세한 초음파를 계속 보내서 상대방의 반고리관에 이상을 가져오는 것이다.
인체의 평행 감각을 유지하는 센서와 같은 이 반고리관은 단련도 불가능하고 공격 수단이 음파인 이상 방어도 힘들었다.
다만 상대방에게 효과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한 명에게 집중해서 사용해도 3분 이상은 꾸준하게 중첩해야 효과가 나온다는 게 단점이어서 일대일 상황에서는 도저히 써먹을 수가 없었다.
다만, 지금처럼 아군이 대치 상황이고 능력자는 후방에 안전하게 대기하며 능력에 전념할 수 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는 이 능력으로 대형 몬스터인 오우거를 거품 물고 쓰러지게 한 적도 있었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면 마법 술식도 제대로 안 돌지? 슬슬 강화 마법을 유지하는 것도 한계 아닌가?”
카일의 비웃음 섞인 말에 드리스의 인내심을 유지하고 있던 무언가가 뚝 하고 떨어졌다.
“XX, 다 집어치워.”
“뭘… 어?”
화르르르륵! 파지지직!
드리스의 몸에서 화염과 뇌전이 동시에 솟구쳐 올랐다.
크림슨 블레이드를 움직여서 전쟁을 제국군의 승리로 이끌어야 하니 힘을 아껴서 적을 처리하자는 이성적인 판단을 뒤로 미룬 것이다.
지금 드리스의 목적은 딱 하나뿐이었다.
“카일 화이트, 넌 뒤졌다.”
제대로 빡친 9서클 대마도사가 카일에게 전력을 뿜어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