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화
“허억…….”
“커억… 시, 심장…….”
“으으읏…….”
드래곤 피어.
만물의 정신을 제압하는 드래곤의 비술이다.
왜 이제 사용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효과는 절대적이었다.
크림슨 블레이드의 포효를 접한 이들 중에 절반 이상은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버렸다. 수천의 능력자들이 일순간에 무력화된 것이다.
그리고 크림슨 블레이드는 그런 이들을 무참하게 짓밟기 시작했다.
“크아아앙!”
콰앙! 쿵! 우지직!
크림슨 블레이드는 울부짖으면서 사방으로 날뛰며 부수고 짓뭉개면서 야수의 난폭성을 숨기지 않고 폭발시켰다.
조금 전에는 발레리아에게 날개를 잃고 지상으로 떨어지면서도 고통의 신음성조차 내지 않던 크림슨 블레이드였는데 말이다.
‘무언가 변했어. 그리고…….’
“크으윽…….”
생각을 하던 검은 바람은 자신에게 달려오는 크림슨 블레이드를 전면으로 받았다.
콰아아아앙!
50미터가 넘는 거인으로 변신한 검은 바람이었지만 크림슨 블레이드와 비교하면 거대한 황소와 열 살 어린아이 정도의 차이가 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검을 들어서 용케 적의 돌격을 막아냈다.
검은 바람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달인이기에 할 수 있는 일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놀라웠다.
‘힘의 차이를 기술로 커버한 게 얼마 만이지?’
검은 바람이 카일의 부하가 된 이후에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거대화 능력의 소유자답게 힘에 있어서는 항상 우위를 점해 왔다. 그런데 지금, 처음으로 힘에서 상대에게 밀려 버린 것이다.
“제길…….”
검은 바람은 이를 악물고 중심을 잡고 버텼다.
그리고 검은 바람이 놈을 잡아 두고 있는 사이, 수많은 이들의 공격이 크림슨 블레이드에게 집중되었다.
“쏴라!”
“벌집을 만들어 버려!”
주로 원거리 공격이 있는 자들을 중점으로 해서 크림슨 블레이드를 향한 무차별 폭격이 퍼부어졌다.
크림슨 블레이드의 주변에 피떡이 되어서 쓰러진 동료들이 즐비하다 보니 감히 접근할 엄두가 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도 충분한 파괴력이었다.
산 하나, 둘 정도는 가볍게 초토와 시켜 버릴 수 있을 정도의 화력이 쏟아졌다.
검은 바람이 적을 고정하고 있는 만큼 명중시키기가 쉬워진 것이다. 하지만…….
“크하아아앙!”
그들의 공격은 크림슨 블레이드의 분노를 터트릴 뿐, 정작 대미지를 주지는 못했다.
“이럴 수가…….”
“좀 전까지는 먹혔는데.”
드리스가 1차 봉인을 풀고 나서 크림슨 블레이드의 흉포함만 올라간 게 아니었다. 몸의 강도마저 더 올라갔다. 이전에 먹히던 공격이 제대로 안 먹힐 정도로 말이다.
거기다…….
우지지직.
“으으으윽…….”
크림슨 블레이드의 날카로운 발톱이 자신과 대치하고 있는 검은 바람의 양쪽 어깨를 파고들었다.
거대화한 검은 바람의 피부는 강철보다 단단했지만 크림슨 블레이드의 발톱은 그런 검은 바람의 피부를 너무나 손쉽게 뚫어냈다.
결국 검은 바람은 손에서 대검을 떨어트리고 말았다.
쿠우웅!
검은 바람이 떨어트린 대검은 지면에 떨어지자마자 원래의 사이즈로 줄어들어 버렸다. 검은 바람의 손을 떠나면서 능력의 적용 범위 밖이 된 것이다.
‘제길…….’
이제 검은 바람은 이 괴물과 맨주먹으로 맞서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그리고 숙련된 전사인 검은 바람은 알았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
그때 검은 바람을 향해서 누군가가 말했다.
“검은 바람 님. 화이트 대공 전하의 명령입니다!”
전령으로 보이는 그는 거대화한 검은 바람의 발치까지 다가와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이 거리까지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일이니, 그는 자기 역할을 다한 것이다.
“10분만 버텨 주십시오! 대공 전하의 전언입니다.”
그 말을 들은 검은 바람은 이를 악물었다.
‘10분. 그게 주인님의 명령이라면…….’
“무조건 버틴다!”
검은 바람은 맨주먹으로 크림슨 블레이드의 안면을 후려쳐 버렸다.
콰앙!
인간의 주먹으로 쳤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소리가 울렸다. 하지만 무기로도 먹히지 않는 크림슨 블레이드의 비늘이 맨주먹에 부서질 리가 없었다.
오히려 부서지는 것은 검은 바람의 주먹이었지만…….
“와라!”
검은 바람은 부서진 주먹을 불끈 말아쥐며 외쳤다.
카일이 말한 10분. 목숨을 바쳐서라도 그걸 버텨낼 생각인 것이다.
“간다!”
검은 바람에게 버티라는 명령을 내린 카일은 그대로 뛰쳐나갔다.
카일의 속도는 바람을 앞서고 형체조차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빨랐다. 아리시아와 융합을 해서 그녀의 능력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리시아 말고 시드와도 융합을 했다.
융합한다고 해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여차하면 시드의 능력이 비장의 수단이 될 것이기 때문에 미리 융합한 것이다.
“비켜라!”
카일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적들을 그대로 베어 버리고 최단 거리로 돌진했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에는 루마니스 제국의 병사와 기사들의 시체만이 남았다.
그렇게 해서 카일이 도착한 곳은 바로 황제의 깃발이 보이는 곳.
그리고 그곳에 도착한 카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로 목표를 향해서 검을 휘둘렀다.
카카카카카카카…….
“어림없다.”
카일이 목표로 삼은 존재. 드리스 엔케모니아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빌어먹을…….”
카일은 이를 갈았다.
애당초 목적은 황제가 아니라 황제의 곁에 있는 드리스였다.
아리시아의 능력으로 최고속으로 베어 버리려고 했는데 드리스는 이미 자신을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도대체 저건 뭐냐?!”
카일이 버럭 소리를 지르자 드리스는 비웃음을 띄고 말했다.
“글쎄? 과연 저게 뭘까?”
“크림슨 블레이드는 죽인 것 아니었나? 아니면 네놈들 건국 신화가 구라냐?”
“뭐, 복잡한 사정이 있지. 하지만 저게 크림슨 블레이드인 건 사실이다. 내가 목줄을 달고 있지만 말이야.”
“말도 안 돼! 어떻게 그게 가능해?”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했기에 내가 전설인 거다. 알겠냐? 이 애송아.”
“…….”
카일은 이를 갈았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지만 저게 진짜 크림슨 블레이드인 것은 사실인 듯했다. 그리고 드리스 엔케모니아가 저 드래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것도.
“테이밍이라도 한 거냐?”
“테이밍? 그런 게 저 괴물 딱지에게 먹히긴 하겠냐?”
“그럼 뭐지?”
“그건… 잠깐, 내가 왜 알려줘야 하지?”
카일은 검을 거두며 드리스에게 말했다.
“정보를 알려주면 나도 네가 원하는 정보를 알려주겠다.”
“내가 원하는 정보가 뭔지는 알고 있는 거냐?”
“네가 있던 원래 세계에 관한 정보라면 어때?”
“…헛소리하는 건 아니겠지?”
“그렇게 느끼면 무시하든가. 할 수 있으면 말이야.”
“…….”
배짱을 놓는 카일.
하지만 카일은 확신하고 있었다. 드리스는 절대로 이 조건을 거부하지 못할 거라고 말이다.
무거움 침묵 속에서 대치하는 둘.
그리고 무시당하고 있던 황제가 버럭 외쳤다.
“지금 뭐 하는 거냐?”
“시끄러!”
“닥쳐!”
카일과 드리스는 동시에 버럭 외쳤다.
“…….”
대륙 최강국의 황제는 순간 얼굴을 붉히며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런 황제의 모독을 참지 못할 인물이 있었으니…….
“감히, 건방지다!”
분노를 터트리며 검을 뽑은 인물은 근위 기사단의 단장이자 루마니스 제국 최강의 기사 로폰트 구스타프 공작이었다.
그는 바로 검을 뽑아서 카일에게 돌진했다. 하지만…….
“네가 더 건방지다.”
카일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그대로 몸이 흐릿해졌다. 그리고…….
퍼퍼퍼퍼퍽! 퍽퍽퍽퍽퍽!
몇 발인지 모를 정도로 무시무시한 연타가 터져 나왔다.
1초도 되지 않는 순간에 구스타프 공작의 머리가 사방팔방으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연타가 끝나자 구스타프 공작은 세상이 빙글 도는 느낌과 함께 지면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큭…….”
“역시 제법이긴 하군. 용케 쓰러지지 않았어.”
그저 지면에 무릎을 꿇는 것 정도로 그친 구스타프 공작을 보며 카일은 은은하게 감탄했다.
아리시아의 능력은 대인전에 있어서는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더구나 카일은 시드까지 융합을 해서 능력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에너지의 총량은 그보다 더 크다.
즉, 실질적으로 카일의 가속은 아리시아를 뛰어넘는다.
그런 카일이기에 마스터의 끝자락에 있는 구스타프 공작마저 압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도 대단하긴 하네. 안면에 정통으로 20발 넘는 펀치를 먹였는데 말이야.’
보통 사람 같으면 뇌가 곤죽이 되어서 죽어야 정상이었다.
그래도 버틴 걸 보니 구스타프 공작이 얼마나 강자인지 알 수 있었다.
그때 드리스가 입을 열었다.
“너가 말하는 조건을 지키는 건 사실이겠지?”
“물론이다.”
“좋다.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드리스는 싸늘한 눈으로 카일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지옥을 보여주지.”
“…….”
카일도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드리스가 하는 말에는 한 점의 허세도 없다는 것을 말이다.
‘괜찮다. 아직 비장의 카드는 내 손안에 있어.’
지금 전장에서는 검은 바람이 억지로 버티고 있으며 그 외에도 수많은 병사들이 죽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미 전사한 발레리아와 수많은 은장미 기사단의 전사…….
이 전쟁에서 카일이 잃은 것은 너무나 많다. 하지만…….
‘괜찮아. 아직은 괜찮아.’
이 상황에서도 카일은 묘하게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믿는 구석이 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드리스가 말문을 열었다.
“저것은 크림슨 블레이드가 맞다. 다만 살아 있는 크림슨 블레이드가 아니라 죽어 버린 놈의 시체를 조종하고 있는 거지.”
“죽음……. 설마 저건……?”
“드래곤 언데드라고 생각한다면 틀리다. 저건 드래곤의 시체를 활용해서 만든 리빙 골렘이지.”
그렇게 말하는 드리스의 표정에는 뿌듯함이 가득했다.
오랜 옛날, 드리스는 초대 황제와 함께 악룡 크림슨 블레이드를 토벌하는 것에 성공했다.
하지만 크림슨 블레이드의 영혼은 이미 반쯤 신격화되어 있었고 놈은 죽어도 언젠가 새로운 육체를 얻어서 부활할 가능성이 컸다.
“진짜 철 지난 RPG 게임의 마왕도 아니고 말이지.”
당시 드리스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크림슨 블레이드의 육체에 손을 썼다.
보물덩어리나 다름없는 크림슨 블레이드의 육체를 온전히 보존하고 그것을 조금씩 개조했다.
뇌와 심장, 그리고 드래곤 하트의 에너지까지 조금씩 조금씩 드리스가 조종할 수 있게 각인을 새기고 혹시 모를 폭주의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 몇 겹으로 다중의 봉인을 걸었다.
그렇게 크림슨 블레이드의 육체를 개조해서 보존하는 이유는 언젠가 부활할지 모를 크림슨 블레이드의 영혼을 가두기 위한 것이었다.
만약 크림슨 블레이드의 육체가 없다면 그의 영혼은 어디서 어떻게 부활할지 모른다. 그냥 시골 농부의 아이로 태어날지도 모르고 일국의 왕족으로 태어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그 괴물 딱지가 또 무슨 짓을 할지 모르고 말이다.
하지만 육체를 안정시켜 놓으면 크림슨 블레이드의 영혼은 자연스럽게 원래 자신의 육체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원래 자신의 육체인 만큼 영혼은 가장 적합한 육체를 판단해서 부활하기 때문이다.
그게 육체와 영혼의 규칙이었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크림슨 블레이드는 부활했다. 그것은 불과 100년쯤 전의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부활한 크림슨 블레이드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득 채워져 있는 종속의 각인과 몇 겹의 봉인이었다.
그래서 크림슨 블레이드는 부활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드리스는 크림슨 블레이드의 육체를 그 영혼을 가두기 위한 감옥으로 설계한 것이다.
그리고 그가 봉인을 풀어주지 않는 이상 크림슨 블레이드를 영원히 저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