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빌어먹을…….”
카일은 주먹을 꽉 쥐며 하늘을 올려다봤다.
거기에는 자신의 기사들이 목숨을 바쳐서 싸우고 있었다. 누구 하나 도망가거나 물러나지 않고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은 괴물을 상대로 용감하게 싸우고 또 죽어가고 있었다.
그녀들의 분투를 보며 카일은 이를 꽉 깨물었다.
‘방심했다. 순조롭게 이길 수 있는 전쟁이라고 생각하고 너무 방심했어.’
드리스 엔케모니아의 참전 소식을 들었을 때 이런 규격 외의 사태가 생길 것을 생각했어야 했다.
그걸 염두에 두지 않고 그저 싸우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자신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아리시아.”
“예, 주인님.”
“시드를 불러라. 그리고 내 곁에서 절대 떨어지지 말라고 해라.”
“주인님. 그 말씀은…….”
“해라. 우리는 최악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카일의 말에 아리시아는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지시를 내린 카일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지금 카일이 할 수 있는 것은 저 상황을 똑똑히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 * *
“아아악!”
“단장님… 부탁합니다!”
돌격하는 발레리아의 앞에 두 명의 기사들이 크림슨 블레이드의 공격을 맞고 떨어졌다.
발레리아를 목적지로 보내기 위해서 그녀들이 앞서 돌격하며 크림슨 블레이드의 공격을 막아선 것이다. 아니, 막았다기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바쳤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녀들의 희생으로 인해서 발레리아는 마침내 자신이 원하는 거리를 잡을 수 있었다.
크림슨 블레이드의 날갯죽지 바로 윗부분.
“하앗!”
그녀는 그리폰의 안장 위에서 일어나더니 기합을 내지르며 점프했다.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그리폰의 등 위에서 점프한 그녀는 강한 풍압에 몸이 날아갈 뻔했지만 허공에서 몸을 비틀며 균형을 바로 잡았다.
그리고 마침내 고양이처럼 크림슨 블레이드의 등 뒤에 사뿐하게 착지할 수 있었다.
“중력 100배!”
쿠우웅!
그녀가 능력을 사용한 순간 크림슨 블레이드의 몸이 휘청하며 가라앉을 뻔했다.
갑옷을 입었다고 해도 발레리아의 체중은 크림슨 블레이드의 천분의 1도 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의 능력이 더해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크림슨 블레이드는 자신의 등 뒤에 어마어마한 무게가 달라붙은 것처럼 비행을 버거워했다.
‘이래도 안 떨어진다 이거지? 그렇다면…….’
발레리아가 검을 뽑았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힘을 뽑아서 그대로 크림슨 블레이드의 날갯죽지를 향해서 휘둘렀다.
“으아아아아아!”
콰아아앙!
완숙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그녀의 오러 블레이드가 크림슨 블레이드의 날개를 후려쳤다.
하지만 비늘을 베고 살점을 가르고 들어간 그녀의 오러 블레이드는 크림슨 블레이드의 뼈에 걸려서 날개를 미처 자르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어디 얼마나 버티는지 보자.”
그리고 그녀는 연거푸 검을 휘둘렀다.
쾅! 콰앙! 콰아아앙!
마치 나무꾼이 거목을 때리듯이 같은 지점에 연달아서 작렬하는 그녀의 검격은 조금씩이긴 하지만 크림슨 블레이드의 날개뼈를 부숴가기 시작했다.
이대로 계속하면 놈을 지상으로 떨어트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단장님. 피하세요!”
부하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와 함께 발레리아는 봤다. 목을 뒤로 틀어서 자신을 향해서 입을 벌리고 브레스를 뿜으려고 하는 크림슨 블레이드의 얼굴을 말이다.
‘피해? 아니 늦었…….’
발레리아의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무시무시한 화염이 그녀를 덮쳤다. 그리고 그녀 역시 한 줌의 재로 사라져 버려야 했지만…….
“어림…….”
“…도 없다. 이 도마뱀 새끼야!”
발레리아의 위기를 느낀 장미 기사단의 단원들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방어 능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지만 그녀들은 모두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서 발레리아의 앞을 막아섰다
“너희들…….”
“단장님. 어서!”
부하의 외침에 발레리아는 이를 악물었다. 그러고는…….
“으아아아아아아아아!”
그녀의 검에 이제까지 보인 적 없는 막대한 오러가 맺히기 시작했다.
3미터, 5미터, 10미터…….
점점 거대하게 성장하는 오러 블레이드는 지상에서도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명백하게 마스터의 경지를 넘어서는 총량의 오러였다.
그리고 그걸 보고 카일이 비명을 질렀다.
“안 돼! 발레리아, 멈춰!”
카일은 저게 뭔지 알았다.
발레리아가 예전에 한 번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스콧 가문에 전해지는 비전. 생명력을 오러로 치환해서 공격력을 증폭시키는 기술.
오버 라이프라고 불리는 기술이다.
발레리아는 이 순간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생명을 갈아 넣은 것이다.
“아아아아압!”
그리고 휘둘러지는 그녀의 일섬.
주군에 대한 충성.
부하들의 죽음에 대한 복수.
전쟁의 승리를 위한 집념.
발레리아 드 스콧이라는 기사의 모든 것이 걸린 일격이 거대한 드래곤의 날개를 갈랐다.
“떨어진다!”
한쪽 날개를 잃은 드래곤은 그대로 지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모든 힘을 소모한 발레리아 역시 그대로 힘없이 지상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단장님!”
그녀가 완전히 지상으로 떨어지기 직전, 그리핀을 탄 누군가가 떨어지는 그녀를 따라잡아서 잡아챘다.
하지만 그녀를 안은 은장미 기사단의 단원은 가슴이 철렁했다.
‘몸이 차가워.’
점점 온기가 사라져 가는 발레리아의 육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너무나 명확했다.
“단장님. 정신 차리세요. 단장님.”
때로는 친엄마처럼 자상하게, 때로는 친아버지처럼 엄격하게……. 은장미 기사단의 단원 하나하나는 발레리아가 심혈을 기울여서 키운 이들이었다.
당연히 은장미 기사단의 단원들 역시 그런 발레리아에게 헌신을 다하고 있었다.
카일 화이트 다음으로 그녀들이 따르는 존재가 누구냐고 물으면 단연코 발레리아의 이름이 나올 것이다.
그런 그녀가 죽어가고 있었다.
“단장님! 정신 차리세요! 단장님!”
“단장님! 발레리아 단장님!”
어느새 그녀의 주변에 그리폰을 탄 다수의 여기사들이 다가와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제발 죽지 말아 달라고…….
마치 엄마에게 떼를 쓰는 어린애들처럼 맹목적이면서도 간절하게 말이다.
발레리아의 귀에는 그녀들의 목소리가 모두 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들에게 말해 주고 싶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은 됐으니까 어서 전투에 집중하라고…….
하지만 할 수 없었다. 말은 고사하고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전신에 힘이 빠지면서 몸에 무엇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녀는 그제야 깨달았다.
‘아… 이렇게 되는 거구나.’
이게 죽음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쩔 수 없지. 그래도 후회는 없다.’
가문이 망하고 그녀는 기사로서 모든 것을 잃어버렸었다. 지독한 절망과 치욕 세상을 저주하고 하루하루를 원망만으로 살아가야 했다.
그런 자신을 구해 준 것이 카일 화이트였고 그녀는 맹세했다. 다시 한번 자신을 기사로서 살게 해 준 그를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다고 말이다.
그리고 지금 그녀의 눈에는 지상으로 떨어지는 거대한 드래곤이 보였다.
‘이만하면… 주군에게 도움이 되었겠지.’
스르륵 감기는 눈매와 함께 그녀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부디 무운을…….’
“단장님! 단장님!”
“발레리아 단장!”
발레리아 드 스콧. 알트란트 평원에서 전사.
* * *
“드리스 님.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황제는 기겁을 해서 외쳤다.
절대 지지 않을 것 같은 파괴의 상징 크림슨 블레이드가 한쪽 날개를 잃고 지상으로 떨어졌다.
황제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드리스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생각보다 더 대단한 놈들이라는 거지.”
“그렇게 담담하게 말할 때입니까? 당신이 지면…….”
“입 좀 닥쳐.”
드리스는 단호하게 황제의 입을 다물게 한 후 전장의 상황에 집중했다.
날개를 잃고 떨어진 크림슨 블레이드를 향해서 수많은 적들이 몰려들었다.
그중에서도 말을 타고 달려드는 투란 전사단이 인상적이었는데, 소문이 맞는다면 저들이 바로 카일 화이트가 보유한 최강의 전력 중 하나일 것이다.
‘이대로는 무리인가? 어쩔 수 없군.’
드리스는 한 손을 들어서 크림슨 블레이드를 향해 뻗으며 말했다.
“1차 봉인 해제.”
드리스는 가능하면 사용하고 싶지 않았던 수단을 사용하기로 했다.
“돌격! 발레리아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마라!”
검은 바람은 목청이 터져라 호령하며 자신이 그 누구보다 선두에서 앞장서서 돌격했다.
지상으로 떨어진 저 거룡은 아직도 위협적이었지만 그렇다고 망설일 수는 없었다. 자신이 영혼을 바쳐서 충성을 맹세한 카일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위해서라면 목숨 정도는 거는 게 당연했다.
‘너도 같은 마음이었겠지. 발레리아.’
자신과는 잘 맞는 것 같으면서도 잘 맞지 않는 것 같은 여자였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같은 대상에게 충성을 바치고 헌신하고 있는 전우라는 것이었다.
“원수는 반드시 갚는다.”
검은 바람은 이를 갈더니 말에서 내리는 동시에 자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끌어 올렸다.
“우워어어어어어!”
순식간에 거대한 거인이 된 검은 바람은 그대로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를 울리며 크림슨 블레이드를 향해서 돌격했다.
그리고 그의 거대한 대검이 휘둘러진 순간…….
콰아아아앙!
크림슨 블레이드는 크게 휘청거리며 물러났다.
검은 바람은 연거푸 공격을 휘두르며 외쳤다.
“적은 한쪽 날개를 잃고 균형을 잃었다. 사정 봐주지 말고 공격을 퍼부어라!”
단 한 번의 공격을 적중시켰을 뿐이지만 검은 바람은 지금이 호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의 지시가 떨어지기 무섭게 투란 전사단과 호크의 지시를 받은 특전대원들까지 모든 능력자들이 혼신의 힘을 다해서 크림슨 블레이드를 공격했다.
“죽어라아아!”
“박살 나 버려!”
“갈가리 찢어 주마!”
사방에서 수백, 수천 가지 능력이 쏟아졌고 그중에는 6서클 마법사의 화력을 넘어설 정도로 강력한 공격도 있었다.
그 공격 하나하나가 어느 정도는 크림슨 블레이드의 몸에 먹혔다.
‘역시, 전설보다는 약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회다.’
검은 바람은 이대로 몰아붙이면 쓰러트릴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위이이이잉.
크림슨 블레이드의 머리 위에 어떠한 종류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몇 겹으로 겹쳐져 있는 그 마법진이었는데 그중에 가장 위에 있는 마법진이 갑자기 빛을 발하더니 사라져 산산조각으로 깨지면서 사라져 버렸다.
“방금 그건? 무언가의 마법이 실패한 건가?”
마법진이 깨지는 현상을 보고 검은 바람이 이렇게 생각하는 건 무리가 아니다. 하지만 저것은 드리스가 크림슨 블레이드에게 걸어 놓은 몇 겹의 봉인 중에 하나가 깨진 것뿐이다.
그리고 봉인이 풀린 순간…….
“크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크림슨 블레이드가 머리를 하늘로 들더니 천지를 울리는 포효를 터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