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화
그리폰을 탄 장미 기사단은 거침없이 하늘을 날아서 목표를 돌진했다.
‘찬스다.’
발레리아는 그리폰의 고삐를 불끈 쥐었다.
마법사 전력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는 지금, 제국군에는 하늘을 나는 자신들을 견제할 수 있는 대상은 없다.
거기다 기사단 역시 출전한 상태이기에 본군의 전력은 약화되었을 것이다. 황제의 목을 노리기에는 지금이 최적이라는 말이다.
기마를 타고 우회 돌격하는 검은 바람보다 먼저 도착할 자신이 있는 발레리아는 부하들에게 외쳤다.
“목표는 루마니스 제국의 황제다. 가능하면 죽이지 말고 사로잡아라!”
“예. 단장님.”
그렇게 이 전쟁을 결정 지을 한 수가 성공하려는 순간이었지만… 루마니스 제국 역시 숨겨 둔 한 수를 꺼냈다.
“황제. 준비가 끝났다.”
한참 열세인 전쟁에 황제의 초조함이 극에 달한 그 순간, 드리스 엔케모니아가 나타나서 말했다.
“정말입니까?”
“그렇다. 충전하는 데 시간은 좀 걸렸지만 이제 움직일 수 있다.”
“그렇다면 바로 투입해 주십시오.”
“알았다. 병사들 물려. 괜히 휘말려도 난 책임 못 진다.”
“알겠습니다”
황제는 바로 전령에게 전군 후퇴의 지시를 내렸다.
“예, 알겠습니다.”
전령의 지시가 떨어지자 전선 전체에서 지휘관들이 군사에 퇴각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후퇴. 후퇴하라!”
“살고 싶으면 물러나! 무조건 물러나라!”
제국군이 갑자기 뒤로 물러나는 상황에서 화이트 공국의 병력들은 거세게 추격을 전개했다.
“추격하라!”
“지금이다! 적을 몰아쳐라!”
후퇴하는 적의 뒤를 찌르는 것이야말로 전과를 확대할 수 있는 최적의 수단이다. 그러니 화이트 공국의 일선 지휘관들은 병사들을 서로를 거칠게 독려하며 자신들도 앞장서서 적을 추격했다. 그러나… 여기서 상식 밖의 일이 벌어졌다.
드리스가 숨겨둔 비장의 수단이 하늘로 날아오른 것이다.
“저건…….”
“저건 설마…….”
“말도 안 돼.”
그것이 등장한 순간 지상의 모든 이들은 자리에 얼어붙어 꼼짝하지 못했다.
하늘 높이 떠 오른 그 존재는 거대하고도 불꽃처럼 붉은 비늘을 갑옷처럼 자랑하는 존재였다.
하늘의 태양마저 가려 버릴 정도로 거대한 그 존재는 레드 드래곤이었다.
“어떻게 드래곤이?”
카일조차도 이 광경에는 경악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야 했다. 카일의 옆에는 아리시아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카일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어느새 카일의 곁으로 다가온 시드가 말했다.
“전하, 피하셔야 합니다.”
“피하라니? 아직 싸워보지도 않고…….”
“전하, 저건 그냥 드래곤이 아닙니다. 한때 대륙을 지배했던 폭군. 재앙의 붉은 용이라 불리던 존재 크림슨 블레이드입니다.”
시드의 말에 카일은 경악하며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 드래곤은 분명…….”
카일도 크림슨 블레이드의 존재를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저기서 하늘을 날고 있으면 곤란했다. 왜냐하면…….
“놈은 죽었지 않나?”
이런 이유에서다.
크림슨 블레이드.
심판의 검.
지옥의 화신.
재앙의 붉은 용.
여러 가지 이명으로 불리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대륙의 모든 생명체들에게 암흑기로 불리던 시절 활발하게 활동하던 드래곤이다.
원래 드래곤은 타 종족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그들의 존재 목적은 중간계의 질서를 유지하고 다른 균형을 맞추는 것이었다.
하지만 크림슨 블레이드는 별종이었다.
그는 타인의 고통과 파멸을 즐기는 사악한 성향을 타고난 드래곤이었다.
그의 불길에 아무 이유 없이 불타오른 나라만 해도 열이 넘었고, 수많은 이종족들이 그의 심심풀이가 되어서 멸족했다.
사악한 그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 같은 드래곤들이 그를 막으려고 했다. 하지만 크림슨 블레이드는 동시대의 그 어떠한 드래곤보다 강했다.
놈은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드래곤을 죽여 버렸다. 심지어 거기서 멈추지 않고 놈은 같은 그 드래곤의 사체를 뜯어 먹기까지 했다.
동족 살해를 넘은 동족 포식자.
드래곤이라는 종족이 이 세상에 나타나서 지금까지 존재하면서 이렇게 잔인한 존재는 없었다.
수많은 드래곤들은 격분하여 크림슨 블레이드를 처단하려고 했지만 그 어떤 드래곤도 성공하지 못했다.
크림슨 블레이드를 원래도 강했지만 같은 동족을 잡아먹고 그 힘과 덩치를 더 불렸던 것이다.
드래곤이 같은 드래곤을 잡아먹으면 강해진다? 사실 아무도 몰랐던 일이다. 그런 미친 용은 이전까진 아무도 없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크림슨 블레이드는 점점 강해졌고 마침내 대륙의 그 누구도 그를 막아설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리고 자신이 대륙 최강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크림슨 블레이드는 그 잔학성을 마음껏 폭발시켰다.
그가 한 번 하늘을 날아오를 때마다 수많은 생명들이 죽어 나갔다. 그가 지나간 곳에는 파괴와 살육의 흔적만이 남았고 그 어떤 존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중간계의 다른 존재들은 크림슨 블레이드에 맞서기를 포기했다. 그리고 놈의 사악함과 가학성을 진정시키기 위한 제물을 바쳤다. 실질적으로 중간계의 모든 이들이 크림슨 블레이드에게 굴복한 것이다.
고통과 굴욕의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명의 영웅이 일어났다.
그 이름은 카를로스 루마니스. 작은 소국 루마니스의 왕자였다.
그는 크림슨 블레이드의 폭거에 당당하게 맞서서 일어서기를 맹세했고 그런 그를 도와서 두 명의 친우가 함께했다.
인류 최초의 9서클 대마도사 드리스 엔케모니아. 훗날 카를로스의 아내가 되는 대정령사 리아나.
그 셋이 모여서 재앙의 붉은 용에게 도전했다. 사실 그 누구도 그들의 승리를 예상하지 않았다. 그저 무모한 도전에 비웃을 뿐.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꼬박 일주일에 걸친 전투가 끝나고 마침내 사악한 드래곤의 날개가 꺾였다. 영웅의 등장이었으면 굴욕과 암흑의 시기를 벗어나 자유의 시대가 도래하는 순간이었다.
그로 인해서 소국의 왕자였던 카를로스는 제국을 건설하였고 그의 이름은 카를로스 바이칼 알렉산드로 루마니스가 되었다.
그가 바로 루마니스 제국의 초대 황제이며, 이게 루마니스 제국의 건국 신화다.
신화라고 하기에는 모든 것이 진실이었고 심지어 그 이야기의 주인공 중 한 명이 살아 있기까지 하지만 말이다.
그러니, 그 얘기대로라면 크림슨 블레이드는 분명 죽었어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전장에 등장해 날개를 펴고 날아오른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침착하자. 이건 함정일 거야. 아… 혹시?’
“시드, 저 존재가 대규모 환영 마법일 가능성은 없나?”
카일의 물음에 시드는 다시 한번 하늘에 떠 있는 거대한 드래곤을 보더니 말했다.
“그럴 리가 없습니다. 단순한 환상이라면 이렇게 가공할 만한 마나가 느껴질 리 없습니다.”
“그렇다면 다른…….”
“브레스다!”
그때 누군가가 외친 한 마디가 전장을 뒤흔들었다.
크림슨 블레이드의 입이 쩍 벌어지며 그 안으로 막대한 공기와 마나가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그로 인해서 이 일대에는 일순간 마나의 고갈 현상이 일어났다.
저서클 마법사들은 가슴을 부여잡고 괴로워하며 자신의 서클을 유지하는 데 필사적이었다. 그리고…….
“온다!”
과거 재앙의 불길이라고 불리던 화염이 화이트 공국의 군대를 뒤덮었다.
“하하하하하! 한 방이군. 애당초 한 방에 끝날 거였어.”
황제는 화이트 공국의 군대가 괴멸하는 것을 보며 웃음을 터트렸다.
좀 전의 초조함과 답답함이 한 번에 날아가면서 승리의 통쾌함이 찾아왔다.
강하다. 너무나 강하다. 저것만 있으면 이제 전쟁이 문제가 아니라 대륙을 정복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는 황제에게 드리스가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하지 마라.”
“…무, 무슨 말입니까?”
정곡을 찔린 황제가 당황하자 드리스는 코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뻔하다, 뻔해. 어째 직박구리 폴더 비번 뚫린 중딩보다 더 뻔하냐?”
“…….”
무슨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을 비웃는다는 것은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황제였다.
“크흠, 어쨌든 이걸로 전쟁은 끝났군요. 이제 다른 전선으로 옮기도록 하죠.”
말을 돌리는 황제였지만 드리스는 여전히 전쟁터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했다.
“아니.”
“왜 그러십니까?”
“좀 더 기다려야 할 것 같다. 저것들, 보통은 넘는군.”
그렇게 말한 드리스의 눈이 닿는 곳에는 크림슨 블레이드의 브레스를 정면으로 막아내고 있는 화이트 공국의 군대가 보였다.
* * *
브레스가 날아오는 순간, 카일은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저것은 절대 환영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전군 실드 최대로!”
카일의 목소리와 함께 화이트 공국의 능력자, 마법사들을 통틀어서 실드나 보호막을 치는 것이 가능한 이들은 모두 자신과 주변을 감쌌다.
카일의 주변에서도 호위를 맞은 이들이 몇 겹의 보호막을 쳤고 그 후에 무시무시한 화염이 화이트 공국의 군대를 덮쳤다.
그 지옥과도 같은 화염이 덮친 순간 베리어의 보호를 받지 못한 이들은 최후의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타들어 갔다.
지면마저 이글거리는 용암으로 만드는 초열의 브레스는 그들의 뼛조각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리고 보호를 받은 이들 역시 보호막이 깨져나감에 따라 지옥의 화염에 불타 죽었다.
“크아아악!”
“아아아악!”
지상에 펼쳐진 지옥이라는 말은 바로 이 순간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그런 이들을 구해 준 것은…….
“쳐라!”
“오오오오오!”
하늘에서 활약하고 있는 용맹하고 아름다운 은장미 기사단이었다.
크림슨 블레이드의 등장에 잠시 얼어붙어 있었던 그녀들은 아군의 위기를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전 기사단 돌격하라!”
발레리아의 명령 한 마디에 그녀들 모두가 크림슨 블레이드를 향해서 날아갔다.
단, 한 명도 망설이거나 물러나는 이들은 없었다.
“아아아아앗!”
“죽어라아!”
그들의 맹공이 브레스를 뿜고 있는 크림슨 블레이드에게 쏟아졌고 그 충격에 브레스를 뿜고 있던 크림슨 블레이드는 휘청거리면서 브레스를 멈췄다.
“됐다.”
그 성과에 기쁜 것도 잠시, 목표를 바꾼 크림슨 블레이드는 그대로 은장미 기사단을 향해서 거대한 꼬리를 휘둘렀다.
마치 파리를 쫓는 것 같은 그 동작을 미처 피하지 못한 이들이 있었다.
“아아악!”
“마리안! 제길…….”
“전원 산개해라! 적의 정면에 서지 말고 주변을 돌면서 공격하라!”
발레리아의 지시를 받은 은장미 기사단은 그대로 크림슨 블레이드의 주변을 돌면서 철저하게 공격을 하기 시작했다.
은장미 기사단의 기사는 하나하나가 익스퍼트의 강자에 초능력까지 각성한 이들이었다. 그렇기에 각각의 공격은 실로 무시무시했고, 크림슨 블레이드의 전신에 상처를 냈다.
“이상하군. 어째서 먹히는 거지?”
이 광경을 보고 발레리아는 의아해했다.
전승에 의하면 드래곤의 비늘은 최소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가 아니면 뚫지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있는 드래곤의 몸에는 마스터인 자신의 검뿐 아니라 익스퍼트인 부하들의 오러 블레이드도 어느 정도 상처를 낼 수 있었다.
덕분에 적에게 제법 대미지를 입히고 있기는 했지만 말이다.
그때 저 밑에서 누군가가 발레리아를 향해서 외쳤다.
“발레리아! 날개를 쳐서 부러트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검은 바람이었다.
“아! 그렇군.”
발레리아는 깨달았다.
어느 정도 검이 들어가고 있다고는 하지만 적의 거체를 생각하면 코끼리에 바늘 찔러 넣기나 다름없다.
안 먹히는 건 아니었지만 은장미 기사단만으로 저 거구를 쓰러트리는 것은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검은 바람이 이끄는 투란 전사단까지 함께 한다면?
“날개를 집중 공격해라! 적을 지상으로 떨어트린다!”
“예. 단장님!”
명령을 받은 부하들은 집중적으로 크림슨 블레이드의 날개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으아아아!”
“죽어라!”
날개를 집중 공격하는 은장미 기사단, 하지만 그건 말처럼 쉽지 않았다.
거대한 크림슨 블레이드가 한 번 꼬리를 휘젓고 발을 휘두를 때마다 거기에 걸리는 이는 치명타를 입었다.
“컥…….”
“제길, 물러나지 마라! 돌격하라!”
“으아아아아!”
평소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한점의 흐트러짐도 보여주지 않던 은장미 기사단. 그녀들이 자신의 목숨을 본격적으로 소모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안위를 버리고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공격.
설령 자신이 실패해도 자신의 뒤를 따라주는 동료를 믿으며 몸을 던지는 무차별적인 돌진.
거센 태풍을 맞아떨어지는 장미꽃처럼 그녀들은 하나씩 하나씩 지상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