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화
회담의 결렬.
이것은 결국 피할 수 없는 전쟁을 뜻한다.
카일은 자신이 군을 이끌고 제국을 침공하는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이 결과가 씁쓸했다.
‘어쩔 수 없지. 그냥… 진짜로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대부분의 전쟁이 그렇다.
사실 누구 하나가 완전히 잘못하고 사악해서 벌어지는 전쟁은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의 전쟁이라는 것은 결국 양쪽의 목적과 신념이 타협점을 찾지 못해서 벌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누가 악하고 누가 선하고를 논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어차피 전쟁에서 정의란 승자의 트로피일 뿐이다.
그리고 그 트로피를 손에 넣기 위해서 지금 도합 35만의 군대가 서로 포진을 하고 마주했다.
황제는 넓게 포진한 자신의 군세를 보고 생각했다.
‘잘하면 드리스가 준비한 그게 나설 필요도 없겠군.’
적은 5만. 거기에 비해서 아군은 30만이 넘었다.
이 압도적인 차이는 그저 대치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고스란히 드러났다.
“폐하, 진형의 편제가 끝났습니다.”
로폰트 구스타프 공작의 보고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시작하라.”
“예. 전군 전진하라!”
황제의 한 마디에 제국군 30만이 5만의 적을 향해서 진군하기 시작했다.
척척척척척!
하나로 맞춘 발소리와 30만의 병장기가 울리는 소리는 보는 사람에게 강한 위압감을 주기 마련이다.
“저 멍청이들, 제정신인가?”
가끔 예외는 있지만 말이다.
카일은 천천히 걸어오는 제국군을 보고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 카일의 옆에서 발레리아가 말했다.
“제국군의 배치에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정석적으로 잘한 것 같은데요?”
그녀의 말대로다.
제국군의 전열은 보병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 뒤에 궁병을 배치하고 기마 병력은 우회 돌격이 가능하도록 양쪽에 배치해 두고 천천히 압박을 가하듯이 진군하고 있다.
아마 저 상태로 화살이 닿는 거리까지 걸어온 다음 활을 쏘며 보병을 달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기병은 우회 돌격해서 카일의 옆이나 후면을 노릴 테고 전열에 구멍이 생기면 기사단이 돌격해서 적진을 부수려는 생각일 것이다.
평원에서 소수의 적을 방식으로는 가장 전형적인 정공법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전쟁터라면 저래도 될지 모르지. 하지만 여기는 초인들이 즐비한 전쟁터야. 그런데 저런다고? 상식밖에 모르는 멍청한 놈들…….”
“그러고 보니…….”
카일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능력자의 전쟁이라는 게 어떤 건지 알려주지. 시드. 호크.”
“예. 대공 전하.”
“부르셨습니까?”
카일은 둘을 불러 지시를 내렸다.
“적에게 한 방 먹인다. 바로 마법 전단을 크게 한 방 날린 후 병사들은 소대 단위로 나눠서 돌입시켜라.”
“예. 주군.”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카일의 지시가 떨어지자 시드가 마법 전단을 거느리고 위로 떠 올랐다.
“모두 준비해라.”
“옛!”
마법사들이 허공으로 떠 올라서 각자 캐스팅을 시작했다.
카일이 보유한 마법 전단의 마법사들의 숫자는 200. 이들 전원이 전투가 가능한 4서클 이상의 마법사라는 것을 생각하면 훌륭한 전력이었다.
실제로 그들이 한꺼번에 영창을 시작하자 마나가 요동치며 일반인들조차 느낄 수 있을 정도로 막대한 기류의 소용돌이가 생겼다.
“적 마법사들이 뭔가 하려는 모양이군.”
화이트 공국의 마법 전단이 움직이는 것을 보고 황제가 말했다.
그러자 구스타프 공작이 말했다.
“걱정 마십시오. 마법 전력은 우리가 압도적입니다.”
드리스의 존재 때문일까?
예전부터 루마니스 제국은 마법사를 우대하는 정책을 펼쳤고 그 덕분에 국가에 종군하는 마법사의 질과 숫자가 압도적이었다.
지금 당장 황제가 거느리고 나타난 마법 전단의 숫자만 해도 1천. 드문드문 3서클이 좀 섞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태반이 4서클 이상, 개중에는 6서클도 있었다.
전쟁터에서 마법사 간의 전력 비교에서 루마니스 제국이 밀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방어 마법 준비!”
“각자 맞은 영역을 철저하게 사수하라.”
실제로 마법사들은 화이트 공국의 마법 전단의 움직임을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침착하게 방어 마법을 캐스팅했고, 그때쯤에 시드가 이끄는 화이트 공국의 마법 전단의 공격이 불을 뿜었다.
“파이어 스피어!”
“스톰 애로우!”
“어스퀘이크!”
불과 얼음의 화살이 쏟아지고 바람의 칼날이 제국군 병사들을 덮쳤다.
“쫄지 마라!”
“마법사들이 막아 준다. 쫄지 말고 걸어!”
제국군의 병사들은 자신의 정면에서 날아오는 마법에 자신들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지휘관들의 호령과 평소의 훈련을 믿고 그들은 똑바로 걸었다.
이런 모습 하나만 봐도 이들이 얼마나 정예 병력인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콰콰아앙! 퍼엉!
사방에서 마법 공격이 화려하게 폭발했다.
200명의 마법사가 전방위적으로 쏟아붓는 마법 공격이라는 것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하지만 정작 그 결과는 신통치 않았다.
“오오… 오오오오…….”
“역시!”
루마니스 제국의 병사들은 단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
다치는 것은 고사하고 전열 하나 흐트러지지 않은 병사들은 안도감과 함께 자신감이 상승하기 시작했다.
“역시 우리 제국!”
“어디서 이런 허접한 공격 따위를…….”
병사들도 평소 제국의 마법사들이 전 대륙에서 질적으로 양적으로 가장 우수하다는 말을 듣고는 있었다. 하지만 그걸 이렇게 피부로 실감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만하면 얼마든지 믿고 걸어갈 수…….
“또 온다!”
“어어어! 실드 아직 걷지 마!”
그때 병사들은 봤다. 상대편에서 바로 연달아서 마법이 또 날아오고 있는 광경을 말이다.
콰아앙! 쿠웅!
제국군의 보병들을 향해서 마법 공격이 쏟아졌다. 그것도 거의 노 딜레이로 말이다.
이건 이상한 일이었다.
200의 적들이 돌아가면서 캐스팅을 하고 있다고 해도 이건 마법 공격의 회전율이 너무 높았다.
마치 200명이 아니라 수천 명의 마법사들이 모여서 공격하는 것 같지 않은가?
이런 현상에 제국의 마법사들은 크게 곤혹스러워했다.
“세카론 님! 방어를 전담한 마법사들이 마나 고갈 증세를 보이려 하고 있습니다.”
“당장 증원이 필요합니다.”
“제길, 예비 조를 다 투입해.”
“그걸로는 부족합니다.”
“그럼 공격조도 모두 수비로 돌려! 그리고 지휘관들에게 빨리 달리라고 말해!”
배틀 메이지의 운영을 전담하고 있는 6서클 마법사 세카론 톰슨 후작은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적들은 고작 200명의 마법사들로 그 열 배가 넘는 수준의 화력을 뿜어내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건 현실이었다.
원래 계획은 적의 공격을 막아내고 적들의 힘이 적당히 빠진 시점에 자신들도 마법 공격을 역으로 퍼부어서 화이트 공국에 피해를 주는 것이었지만…….
콰콰콰쾅! 콰아앙!
휴식 없이 계속 쏟아지는 마법 공격에 제국의 마법사들은 그저 막기에도 급급했다.
사실 이걸 막아내는 것도 제국의 마법사 전력이 우수하기 때문에 막아내고 있는 것이었지만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럼 여기서 짚고 넘어가자.
어떻게 화이트 공국의 마법사 200명이 루마니스 제국의 마법사 1,000명을 압도할 수 있을까? 그것도 순수하게 정면에서 화력으로 짓눌러서 말이다.
해답은 간단하다.
화이트 공국의 마법 전단 200명 중에 100명은 카일에게 은총을 받고 능력을 각성한 이들이다. 즉, 그들은 마법사인 동시에 초능력자들이 것이다.
마법으로 적을 공격하고 캐스팅을 하는 사이, 초능력으로 다시 적을 공격한다. 그리고 초능력 공격 다음 캐스팅을 마친 마법 공격이 다시 불을 뿜는다.
그런 식으로… 마치 오른손과 왼손을 번갈아 가며 연타를 치듯이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을 수 있는 것이다.
그로 인한 화력은 실로 압도적이었다.
마법과 초능력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는 파상 공격은 다섯 배의 전력 차이를 뛰어넘을 수 있을 정도로 압도적인 효율을 자랑했다.
그리고 결국…….
콰아앙!
“크아악!”
“아아악! 불… 불이다!”
“제길 마법사들 뭐 해! 뚫리잖아?”
결국 제국군의 보병 전열이 구멍이 생기기 시작했다.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방어 막이 얇은 곳에 마법사들의 공격이 작렬했고 그로 인해서 칼 같은 각으로 대열을 유지하고 있던 제국군의 보병들도 흐트러졌다.
“구스타프 공작! 이게 어떻게 된 건가?”
“송구하옵니다. 폐하.”
황제는 자기 병사들이 당하는 모습을 보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구스타프 공작은 그런 황제에게 그저 고개를 숙여 사과할 뿐이었다.
사실 그 역시 지금의 상황을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검술과 황제를 향한 충성심이 탁월한 인물이지, 군사적 재능이 출중한 인물은 아니다.
군사적 재능만 생각하면 지금 남부에서 빅토르를 상대하고 있는 바라빈 케메로 후작이 훨씬 더 뛰어날 것이다.
구스타프 공작은 여기서 이유를 밝혀내는 대신 자신이해야 할 일을 했다.
“폐하. 기사단을 비롯해서 모든 병력을 돌입시켜야 할 듯합니다.”
“당초의 계획과 다르지 않나?”
“마법사들의 화력 대결이 밀린 이상 정공법을 고지해서는 안 됩니다. 아군의 피해가 더 커질 것입니다. 차라리 난전으로 상황을 유도하는 게 낫습니다.”
“…좋다. 근위 기사단을 제외한 모든 기사단을 출격시켜라!”
“예. 폐하!”
황제의 허락을 받은 구스파트 공작은 바로 제국의 기사단에게 지시를 내렸다.
“전 기사단은 적진에 돌입하라. 카일 화이트의 목을 가져오는 자는 나 구스타프 공작의 이름을 걸고 그를 1등 공신으로 인정하겠다.”
그의 명령이 떨어지자 제국의 기사단이 모두 의욕에 불타올랐다.
“좋아. 카일 화이트의 목은 우리 것이다.”
“웃기는 소리. 너희는 구경이나 해라.”
“태룡 기사단 출격! 목표는 카일 화이트다!”
“금사자 기사단 출격하라! 적의 중앙을 돌파한다!”
“우오오오오오!”
그렇게 제국에 내로라하는 유명한 기사단들이 모두 화이트 공국의 본진을 꿰뚫기 위해서 맹렬하게 출격했다.
기사단이란 단연코 눈에 띄는 존재였고 당연히 그들에게도 마법사들의 공격이 날아갔다. 하지만…….
“하아앗!”
“어림없다!”
기사가 괜히 기사가 아니다.
기사들이 입고 있는 갑옷에는 마법의 효과를 경감시켜주는 대마법 방어진이 인챈트되어 있었으며 또한 그들에게는 마법이 날아온다고 해도 거기에 대항할 수 있는 기량이 있었다.
오러가 넘실거리는 검으로 마법 공격을 베어 가르며 돌진하는 기사단으로 인해서 화이트 공국의 마법 전단의 마법 화력이 낭비되고 있었다.
“쯧, 골치 아프게 하는군. 기사단에 화력을 더 집중시킬까?”
마법 전단의 단장 시드는 꾸역꾸역 밀고 들어오는 제국의 기사단을 보며 혀를 찼다.
솔직히 다 막는 건 무리라도 화력을 집중시키면 그래도 꽤 많이 잡아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판단을 내린 그가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리려는 찰나…….
“시드 단장님. 급보입니다.”
전령 한 명이 와서 말했다.
“무엇인가?”
“호크 사령관님의 전갈입니다. 기사는 우리가 맞을 테니 마법 전단은 보병 섬멸에 힘을 써 주시기 바란다는 내용입니다.”
“호크 사령관이? …알았다.”
시드는 전령의 말을 듣고 조금 생각하더니 이내 수긍했다.
만약 그가 화이트 공국에 들어오고 나서 얼마 되지 않은 신참이었으면 지금의 요청에 의문을 가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도 화이트 공국에 발을 들인지 시간이 몇 년 정도 지났고 무엇보다 카일 화이트의 측근으로 발탁되었기에 대강의 사정을 알 수 있었다.
화이트 공국의 진정한 전력이 얼마나 괴물 같은지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