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화
로폰트 구스타프 공작.
직위는 황제를 수호하는 근위 기사단의 단장이다. 하지만 이 남자를 표현하는 더 유명한 한 마디가 있다.
루마니스 제국 최강의 기사.
10년 전만 해도 대륙 최강의 기사를 논할 때 빠지지 않고 이름이 나오는 인물이었다.
경지 자체는 마스터였지만 사실 마스터 중에서도 각별한 인물로 꼽히고 있다.
실제로 황실에서 주최한 검투 대회에서 같은 마스터 수준의 기사를 세 명이나 상대하면서도 밀리지 않고 팽팽하게 맞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가장 가까운 기사라는 것이 로폰트 구스타프 공작을 칭하는 가장 정확한 단어였다.
뭐, 비록 그 후에 빅토르라는 희대의 인재가 직접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르면서 그 위명이 좀 빛을 잃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가 강자라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저 인물이 나왔다는 건 루마니스 제국의 근위 기사단도 다 출동했다고 봐야겠지. 하긴, 황제가 직접 왔는데 안 따라왔으면 그게 더 이상하긴 하지.’
카일이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황제가 말했다.
“일단 만나서 반갑다는 말을 하고 싶군. 한 번은 꼭 만나고 싶었다. 카일 화이트.”
“…….”
“카일 화이트 대공?”
황제의 연이은 물음에 검은 바람이 조심스럽게 카일의 옆구리를 찌르며 눈치를 주었다. 그러자…….
“…응? 아아… 음, 나도 동의하는 바다.”
“…….”
카일은 누가 봐도 딴생각하다가 갑자기 지적받은 사람의 전형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그런 카일의 모습에 드리스는 옆에서 키득키득 웃었으며 구스타프 공작은 눈을 부릅뜨고 카일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제국의 황제가 모독을 당했다고 느낀 모양이다.
카일은 그 어색한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서 말했다.
“일단 부르자고 한 용건이나 묻지. 왜 불렀나?”
그런 카일의 말에 황제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가능하면 피를 보고 싶지 않아서 온 것이다. 여기서 너와 내가 동의한다면 무의미하게 흘릴 피를 줄일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 말은… 전쟁 그만두고 물러나라. 이 말인가?”
“그렇다면 좋겠지.”
“너 같으면 하겠냐?”
“안 하지.”
뒤에 대답한 것은 황제가 아니라 그 뒤편에 있던 드리스였다.
황제가 그를 째려보자 드리스가 가슴을 펴고 말했다.
“왜? 사람이 살다 보면 마음의 소리가 나올 수도 있는 거지. 솔직히 네가 쟤라면 지금 가란다고 가겠냐?”
“하아아… 어쩌자고…….”
황제의 입에서 나온 ‘어쩌자고’라는 말에는 참으로 많은 회한의 의미가 담겨 있었다.
어쨌든 황제는 자기 할 일을 충실하게 했다.
“그냥 물러가라는 것이 아니다. 짐에게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하라. 원하는 것이 있다면 타협의 여지가 있을 수도 있다.”
“타협의 여지라…….”
카일은 머릿속으로 생각을 정리하더니 말을 이었다.
“그전에 하나 물어보지.”
“뭔가?”
“너희 제국에 있는 원 어스라는 클랜에 관해서 너는 어느 정도로 개입하고 있지?”
“원 어스? 그들은 제국에 속해 있지만 국가에 구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모험가들이다.”
“이번 전쟁에 한 발 걸쳤을 텐데?”
“그것은 그들이 자발적으로 나를 도와준 것이다. 나는 그 대가로 원 어스 클랜의 클랜장의 여동생을 나의 정식 비로 맞이했다.”
“클랜장의 여동생? 비?”
“그렇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도 참전 여부를 묻기는 했지만 이전 전투에서 손실이 크다고 거부하더군. 그게 다이다.”
“…….”
“그런데 그걸 왜 묻지?”
황제의 물음에 카일은 미간을 찌푸리고 고심하며 생각했다.
‘황제가 세계정부와 결탁하지는 않았군. 그저 이용당할 뿐이야. 그렇다면…….’
카일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역시 네가 나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없다. 내 목적은 꼭두각시가 아니라 그 꼭두각시의 줄을 조종하는 놈에게 있어서 말이야.”
“…그게 무슨 말이냐?”
“말해 줘도 안 믿을 거다. 어쨌든, 굳이 평화를 원한다면 내 조건은 이거다. 지금 당장 전면 항복하고 루마니스 제국 전역의 통치권을 나에게 넘겨라. 내 볼일이 끝나면 다시 돌려주지. 시간은… 아마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다. 짧으면 1년, 길면 5년 정도?”
“하아아……. 내가 그 말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냐?”
“아니, 안 해.”
“…….”
“그냥 못 먹는 감 찔러나 본 거지. 어쨌든, 이걸로 결론은 나왔군. 결국 전쟁 없이는 안 되겠어. 그치?”
카일의 말에 황제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는 사실은 어쩌면? 혹시나? 잘하면? 카일 화이트를 설득시켜서 이 전쟁을 멈추고 그와 협력적인 관계를 갖출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역시 실패였다.
황제의 입장에서는 아쉬운 일이었지만 그래도 절박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게 우리 편에 있는 이상 전쟁이 벌어져도 우리가 분명 이길 것이다.’
황제는 이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드리스 엔케모니아가 보여준 ‘그것’을 본 이후부터 그는 제국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황제의 볼일이 끝났다.
하지만 이 회담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회담 자체를 강력하게 주장한 것은 황제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제 나하고 얘기 좀 할까?”
그 사람은 바로 드리스 엔케모니아였다.
드리스가 나서자 카일이 말했다.
“무슨 할 말이라도 있나?”
“있지. 그보다 어지간하면 말 좀 높여라, 새끼야. 내가 너보다 나이를 처먹어도 수백 살은 더 처먹었다.”
“싫어.”
단호하게 거절하는 카일을 보고 드리스는 순간 울컥하는 듯했지만…….
“참자. 참자. 참는 거야.”
스스로에게 뭐라고 속삭여서 화를 가라앉히고는 말을 이었다.
“가능하면 단둘이서 오붓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
“그건 불가능하군.”
카일에게 드리스와 맞서 싸울 수 있는 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그건 부하들과 함께 있어야 발동 가능한 능력이다. 단둘이서 드리스와 마주 얘기한다는 것은 무모한 것을 넘어 멍청한 행동이었다.
그런 카일을 보고 드리스가 말했다.
“그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겠다. 마나와 내 모든 것을 걸고 맹세하지.”
“…….”
마법사가 마나를 걸고 맹세한다는 것은 성직자가 신의 이름을 거는 것과 동급의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미심쩍은 마음에 카일이 황제를 보며 망설이자 드리스가 간절하게 말했다.
“혹시 제국에서 무언가 수작을 부린다면 내가 네 편을 들 것을 맹세하지. 정식으로 내 소속을 화이트 공국으로 옮겨도 좋다.”
“드리스 님!”
황제가 깜짝 놀라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 카일도 상당히 놀랐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이러는 거지?’
카일은 드리스가 하는 말을 들어둬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좋다. 독대하도록 하지.”
“고맙군.”
카일은 드리스에게 걸어가기 전에 아리시아를 시켜서 작게 말했다
“여차하면 시드를 준비시켜라.”
“예. 주인님.”
그렇게 지시를 내린 후 카일은 드리스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드리스는 카일과 자신만을 감싸는 완전한 검은색 장막을 둘렀다.
“이제 외부에는 어떠한 소리도 들리지 않을 거다. 그럼 이제 좀 편하게 말해 볼까?”
“그러지. 무슨 말을 하려고…….”
“내 이름은 이경환이다. 너 본명이 뭐지?”
“…뭐?”
“이경환이라고. 한국에서 온 이계인이고 원래 17살 때 죽고 환생의 형태로 이 세계로 넘어왔지. 너는?”
“…무슨 말을 하는 거지?”
“이거 왜 일래? 같은 선수끼리. 너도 이계인 맞잖아? 네 지난 행적을 하나하나 돌아보니 확실하게 알겠더만? 아니냐?”
드리스는 카일이 이계인이라는 것에 확신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카일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맞다. 나는 이계에서 죽임을 당하고 이 세계로 환생한 인물이다.”
“크하하하. 역시, 역시 그랬지? 반갑다. 너 지구에서 이름이 뭐였나?”
“…KA―98746.”
“뭐?”
“진정하고 들어라. 나도 분명 이계에서 기억을 가지고 환생한 인간이긴 하지만 너하고는 다른 곳에서 온 것 같다.”
“뭐? 그게 도대체 무슨 개소리야?”
카일은 간략하게 자신이 다른 세계에서 살다 온 초능력자이고 이 세계에 환생했다는 얘기를 했다.
드리스는 얼이 빠진 얼굴로 멍하니 있다가 이윽고 분노로 표정을 일그러트리고 말했다.
“제길, 구라 치지 마. 이게 말이 돼? 기껏… 기껏 동향 사람을 만났는데, 이제야 실마리를 잡았는데 이게 말이 되냐고?”
“무슨 말이지? 실마리라니?”
“젠장, 나는 지구로 돌아가고 싶다고! 내 집으로 돌아가서 내 가족도 보고 친구들도 보고 취직도 하고… XX! 어쨌든 이딴 세계는 지겨워. 원래 내가 있어야 할 세계로 돌아가고 싶단 말이다!”
드리스의 절규를 들으며 카일은 속으로 생각했다.
‘원래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 그게 목적이었단 말인가?’
정확했다.
드리스 엔케모니아 그가 가슴 깊은 곳에 품고 있는 열망에는 오직 그 하나의 목적만이 남아 있었다.
원래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
드리스 엔케모니아.
그는 지금의 이 세계로 전생하고 나서 카일만큼이나 화려한 시절을 보냈다.
다른 세계에 환생하고 나서 자신에게 마법의 재능까지 있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제2의 인생을 후회 없이 즐겼다.
마법을 수련해서 지고의 경지에 오르고 일국의 왕자와 마음이 맞아서 친구도 먹었다. 나중에 그 친구와 함께 무수한 전설을 만들며 그 친구의 나라를 제국으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그렇게 화려한 인생을 보낸 드리스 엔케모니아였지만 그의 인생에는 커다란 미련이 있었다.
자신의 전생.
전생을 기억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반드시 좋은 일만이 아니다.
카일의 경우 전생이 워낙 끔찍해서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아 순조롭게 지금의 삶에 적응할 수 있었지만 드리스는 전생의 삶을 그렇게 끊어낼 수 있었다.
홀로 남매를 키우기 위해서 모진 고생을 하신 어머니.
집에 돈이 없는데 어떻게든 대학에 전액 장학금으로 졸업까지 하겠다고 미친 듯이 공부하던 기특한 여동생.
어린 나이부터 일하고 고생하면서 자신에게 도움을 준 친구들, 아버지 보험금을 뺏어간 친척들과 사회생활 중에 어리다고 뒤통수를 친 X새끼들 등등.
드리스는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억을 한다는 것을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는 말이기도 했다.
심지어 지금 자신이 전생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많은 방면으로 가족과 친구들을 도와줄 수도 있었다.
그때부터 드리스는 미친 듯이 자신이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9서클이라는 지고의 경지에 이른 드리스로서도 그것은 쉬운 게 아니었다.
그러던 중 던전의 실체 자체가 이계와 이어져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던전을 공략하려고 했지만 그가 던전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신이 직접 나타나서 드리스에게 던전의 출입 자체를 금지한다고 강하게 경고를 했기 때문이다.
강신까지 해서 드리스에게 경고를 하자 드리스는 미칠 것처럼 분노했다.
신이고 지랄이고 간에 그냥 다 들이받아 버리고 싶었지만 신은 신. 싸운다고 해도 승산이 없었다.
결국 드리스는 던전에 지구로 돌아갈 단서가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빅토르에게 관심을 가졌던 것도 그래서였다.
던전을 공략하고 나서 얻은 정보와 아이템을 연구해서 본래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그러던 중 더 좋은 것을 찾아냈다.
카일 화이트.
그의 흔적을 들어보고 독자적으로 조사해 본 결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능력은 둘째 치고 사고방식 자체가 봉건제도의 판타지 세계에서 태어나고 자란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드리스는 카일이 이계인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한 가지 오산이 있었으니…….
“너… 나하고 다른 세계의 인간이란 말이냐?”
“그렇지. 뭐, 이계라고 해도 하나만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으니 말이야.”
“하… 하하하…….”
드리스는 자리에 털썩 앉아서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카일은 그런 드리스를 보고 생각했다.
‘어떻게 하지? 말해 주는 게 나을까?’
카일은 고민에 빠졌다.
사실 카일은 드리스가 알고 싶어 하는 귀중한 정보를 두 가지나 알고 있었다.
하나는 세계정부의 존재.
그들이 차원 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장비를 개발해서 이세계를 침공하려고 하는 사실을 밝힌다면 이 남자는 어떻게 할까? 세계정부를 공격해서 그 장치와 연구 성과를 빼앗으려고 할까? 아니면…….
‘어쩌면 세계정부에 협조하려고 할지도 몰라.’
그건 절대 막아야 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존재. 바로 에이라 수 화이트의 존재였다.
카일과 드리스는 서로 다른 세계의 존재다. 하지만 카일은 그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깨달았다.
‘에이라하고 같은 세계에서 온 인간일 가능성이 커. 아니, 분명 그래.’
그렇다면 에이라의 존재를 밝히고 협조를 구할까? 아니다. 순순히 협조해 준다는 보장은 없다.
거기다 에이라를 어떻게든 이용해서 차원의 벽을 넘으려고 할지도 모른다.
그게 에이라에게 해가 되는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망설이는 카일에게 드리스가 스르륵 일어나더니 말했다.
“XX, 진짜 X 같네.”
“이봐, 드리…….”
“됐다. 더 말하지 마라.”
드리스는 카일을 바라보고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말했다.
“다 집어치워. 그냥… 아니, 내일 하자. 내일 다 죽고 죽이자.”
카일은 순간 오싹하며 소름이 돋았다.
지금 상대는 카일을 이 자리에서 죽이려고 했다. 하지만 좀 전에 자신이 마나에 걸고 맹세한 것이 있으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눈빛을 봐도 알 수 있다.
지금 카일의 눈앞에 있는 드리스 엔케모니아는…….
‘이 새끼, 맛이 갔어.’
맹목적으로 바라고 바라던 목적에 대한 단서를 막 잡은 순간 그 단서가 신기루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상실감.
드리스 엔케모니아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하는 열망이 강했던 만큼 상실감도 마찬가지로 강했다.
카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의 드리스 엔케모니아는 장난기가 싹 빠진 진짜 위험한 존재라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