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황제가 결단을 내리고 제국의 방침도 정해졌다.
제국의 다른 귀족들이 보기에도 각개 격파를 지시한 황제의 판단이 최선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렇다면 각개 격파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뭘까? 그것은 냉정한 전력의 평가와 비교다.
다수의 적을 하나씩 격파해서 불리한 상황을 이겨내는 것이 각개 격파의 요점인데. 그러기 위해서는 아군의 손실을 최소화한 상태로 적을 짧은 시간에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 가장 먼저 어디를 때려야 할지를 선택하는 게 중요했다.
황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만만한 것은 북부의 야만인인 투란족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고, 침략보다는 약탈을 위주로 날뛰고 있는 상황이다. 그들을 하나하나 잡아서 정리하고자 한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
그리고 남쪽의 빅토르가 이끄는 3국 연합군.
이들은 전력이 집중되어 있지만 바라빈 케메로 후작이 잘 막아내고 있다.
확실히 바라빈 케메로 후작은 군사적으로 유능한 인물이었다.
그 자신이 마스터의 경지에 이르러 있고, 휘하에 마스터 다섯을 더 붙여주기는 했지만 사실 그랜드 마스터인 빅토르에 비하면 무력에서 밀리는 게 사실이다.
거기다 드리스와의 전투 이후 빅토르는 자신의 측근인 챈들러와 파울로를 숨기지 않고 드러내서 움직이게 했다.
원래 비장의 카드로 숨겨둔 이들이었지만 드러난 이상 전력을 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니 원래대로라면 세 명의 초인을 상대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남부의 방어선은 뚫려도 진작 뚫려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1열 동시 사격!”
퍼퍼퍼펑!
“이어서 2열 사격! 3열, 4열 캐스팅 준비.”
“큭……. 이 자식들이 진짜!”
수인화 한 상태로 적진을 유린하던 챈들러는 자신에게 집중적으로 쏟아지는 마법사들의 공격에 몸을 감싸고 방어하기에 급급했다.
그리고 그가 주춤하는 사이, 그를 따라 적진 깊숙하게 들어온 병사들은 제국군의 공격에 지리멸렬하기 시작했다.
“챈들러! 물러나. 일단 후퇴해라!”
“제길, 아직 싸울 수 있다고!”
“넌 싸울 수 있어도 병사들이 다 죽는다! 빨리 물러나. 국왕 전하의 명령이다!”
“빌어먹을…….”
결국 챈들러는 군사들과 함께 뒤로 물러났고 제국군은 적을 물리치고 승리의 환호성을 질렀다.
“와아아아아!”
“루마니스 제국 만세!”
“바라빈 케메로 후작 각하 만세!”
환호하는 제국군을 보며 챈들러와 파울로는 쓰게 입맛을 다셨다.
“제길, 무슨 마법사가 저렇게 많아.”
“원래 루마니스 제국은 마법사들이 많았지. 전선을 축소하면서 그 전력을 집중시킨 모양이다. 우리나 전하를 상대하기 위해서 말이야.”
“골치 아프게 하는군.”
“바라빈 케메로 후작. 확실히 만만치 않은 인물이야.”
파울로는 이쯤 되면 적이지만 바라빈 케메로 후작을 칭찬할 수밖에 없었다.
초인이라고 해도 빅토르와 자신들은 몬스터를 처리하고 던전을 공략하는 게 더 익숙한 인물들이었다. 전쟁터에서 자신의 힘을 적절하게 사용하기 위한 전략 수립이 미숙하다는 얘기다.
기껏해야 선두에 서서 용감하게 싸우며 적진을 돌파하고 아군의 사기를 올리는 것 정도가 한계였다.
하지만 바라빈 케메로 후작은 전쟁터에 특화된 지휘관. 그는 아군의 장점과 적의 약점을 절묘하게 활용하면서 불리한 전선임에도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지켜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지. 이렇게 되면 지구전으로 가는 수밖에…….”
“제길, 전하를 볼 면목이 없군.”
그렇게 챈들러와 파울로는 쓸쓸하게 군사를 이끌고 후퇴했다.
바라빈 케메로 후작의 선전은 황제가 있는 중앙에도 보고되었다. 그의 선전은 악재 속에서 한 줄기의 희망이나 다름없었다.
[제국의 남부는 결코 뚫리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는 신을 믿어 주십시오.]
바라빈 케메로 후작이 직접 쓴 편지를 읽은 황제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역시, 바라빈 케메로 후작은 명장이다. 제국의 황제로서 그가 있음이 자랑스럽도다.”
삼국 연합의 대군과 빅토르 같은 초인들을 다수 상대하면서도 전선을 단단하게 틀어막는 바라빈 케메로 후작의 활약에 황제는 큰 안도감을 느꼈다.
‘좋아. 이렇게 되면…….’
남부는 믿음직한 충신에게 믿고 맡기면 된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상황이 시급한 것은…….
“역시 서쪽인가?”
황제가 그렇게 말한 순간 전령 한 명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폐하, 카일 화이트가 이끄는 해군 병력이 상륙을 완료했다고 합니다.”
“상륙을 했다고? 그 규모는?”
“아직 파악 중입니다. 자세한 보고는…….”
“급보입니다!”
첫 번째 전령이 보고를 마치기도 전에 다른 전령이 급하게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그가 말하기를…….
“카일 화이트가 린테부르크 영지를 함락하고 아스베르크 영지로 진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 보고에 황제는 주먹을 꽉 쥐고 말했다.
“카일 화이트, 본격적으로 해 보자 이거냐?”
그런 황제의 물음에 카일은 행동으로 대답했다.
다음 날.
“폐하, 아스베르크 영지가 하루를 버티지 못하고 함락되었습니다.”
사흘 후.
“쿠르칸 영주가 인근 영주들과 연합군을 모아서 6만 병력을 구성해서 맞서겠다고 합니다. 시급하게 원군을 파병해야 합니다.”
일주일 후.
“쿠르칸 영주가 이끄는 연합군이 대패했습니다. 쿠르칸 영주는 전사, 그에게 합류했던 영주들도 전원 전사하거나 행방이 묘연합니다.”
이 주일 후.
“폐하, 카일 화이트의 진군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습니다.”
“더 이상 서부에는 카일 화이트를 막을 군사가 없습니다.”
황제는 하루가 다르게 쏟아지는 정보를 들으며 진땀이 흘렀지만 최대한 냉정하게 생각했다.
‘역시 가장 위험한 건 카일 화이트다. 하지만 지금 중앙군의 전력으로 저 괴물을 막을 수 있을까?’
침략보다는 넓은 범위에 퍼져서 약탈만 하고 있는 북부의 야만인들이나 드리스에게 패배한 이후 위축되어 있는 빅토르에 비해서 카일 화이트의 진격은 실로 무서울 정도였다.
무엇보다 카일 화이트가 이끄는 군사들은 똑바로 루마니스 제국의 수도인 핵타비움을 목표로 진격하고 있다.
가장 위험한 적이 누구인지 정해진 것이다. 다만 가장 강력한 전력인 것도 동시에 카일 화이트였다.
‘어쩌지? 싸워야 하나? 이길 수 있을까? 무모한 선택을 하는 건 아닌가?’
황제로서는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회의실에 모여 있는 대신들의 의견도 모두 제각각이었고, 황제의 고민은 깊어져만 가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안에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시끄러! 처맞기 전에 비켜!”
밖에서 실랑이가 벌어지더니 엄중하게 닫혀 있던 어전 회의실의 문이 벌컥 하고 열렸다.
그리고 들어온 남자는 인상을 와락 찌푸리며 말했다.
“질렸다. 너희들 아직 이러고 있었냐?”
루마니스 제국의 황제를 면전에 두고도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인물은 딱 한 명. 바로 드리스 엔케모니아였다.
그의 등장에 회의실에서 지도만 쳐다보고 전전긍긍하던 제국의 귀족들은 반색했다.
“드리스 님.”
“오, 오, 오, 오셨습니까? 드리스 님.”
“위대한 수호자를 뵙…….”
그런 귀족들의 말을 자르며 드리스가 외쳤다.
“시끄러! 이 무능한 X밥 찌끄레기 새끼들아!”
“…….”
“…….”
루마니스 제국의 귀족들은 모두 입을 꾹 다물었다. 드리스는 그런 귀족들을 보고 말했다.
“멍청한 새끼들. 위급한 상황에서 자기 책임지는 게 무서워서 입만 꾹 다물고 있고. 나라 꼬락서니 참 판타스틱하게 굴러간다. 어디 헬 루마니스냐?”
지금 이 회의실에 있는 이들은 무도 루마니스 제국 안에서도 핵심 권력에 있는 귀족들이다.
그들이 어디서 이런 대우를 받아 봤겠는가?
‘아무리 9서클 대마도사라고 해도 너무하는군.’
‘이래도 되나? 안 되지 않나?’
‘이것은 아니지. 아니야.’
그들 중 한 명이 말했다.
“드리스 님. 아무리 그대가 위대한 제국의 수호신이라고 하지만 언동이 너무 가벼운 것 아니오? 여기는 대 제국의 황실이며 황제 폐하의 어전이오. 품위를 지키시오.”
드리스는 자신에게 말을 한 귀족을 바라보더니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 참신한 생물이군.”
“뭐… 뭐라고? 생물?”
“너 이름이 뭐냐?”
“대 루마니스 제국의 개국공신 가문 페트로파블 백작가의 나자르 페트로파블이오”
페트로파블 백작은 ‘우리 가문도 개국공신인데 뭐 어쩔 거냐’의 의미를 담아 말했다.
실제로 그게 통했을까?
“뭐? 페트로파블? 너 페트로파블 백작가의 후예였냐?”
드리스는 실제로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드리스의 모습에 페트로파블 백작은 은근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크흠, 그렇소. 내 선조분을 기억하신다면 그대도 태도에 주의를… 커어억!”
페트로파블 백작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9서클 대마도사의 능숙한 이단 날아 차기가 그의 턱을 날려 버렸다.
페트로파블 백작은 그대로 날아가 버렸고 드리스는 그것도 모자라서 날아간 그를 자근자근 밟기 시작했다.
“이 C~~E~~8놈아! 내가 니 조상이라는 놈한테 맺힌 게 조오오오오오올라게 많다. 페트로파블, 아우! 그 전설의 SSR급 고문관 새끼. 그 새끼 때문에 친 수많은 조뺑이 퍼레이드를 생각하면 이가 갈린다. 이가 갈려어어!”
“어억! 커어억……. 잠, 잠시… 커어억.”
“거기다 자손이라는 새끼도 내 혈압 상승에 공헌을 해? 엉? 너희 집안 내력이냐? 대마도사 성질 긁는 비법이라도 대대로 전수하는 거야? 엉?”
“크아아아아악!”
대마법사는 잔인할 정도로 신나게 밟았고, 개국공신의 후예는 얌전히 밟혔다.
그렇게 한참을 밟아서 꿈틀거리지도 못하게 만들어 버린 후 드리스가 황제를 노려보며 말했다.
“야. 황제!”
“예? 예……. 부르셨습니까? 드리스 님.”
“애들 교육 똑바로 안 시키냐?”
“그게… 으음. 죄송합니다.”
“똑바로 하자. 지금 국난이잖아? 장난칠 시기가 아니라고. 알겠냐?”
루마니스 황실의 위엄이 실시간으로 팍팍 내려가는 현장이었다.
황제는 나중에 이 자리에 있는 모든 귀족들의 입을 단단히 단속해야겠다고 다짐하며 말했다
“그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습니다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계셨던 겁니까?”
“잠깐 준비해야 할 게 있어서 말이야.”
“준비라니요? 그게 뭡니까?”
“상대가 만만치 않은 놈들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니 나도 최선을 다해야겠지. 그래서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왔다.”
“그건 쓸 만한 겁니까?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는 힘이 있습니까?”
황제의 의구심에 드리스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밖에 있으니까 네 눈으로 보고 말해 봐라.”
“밖에?”
황제는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다른 귀족들 역시 그런 황제를 따라서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들이 거기서 목격한 것은…….
“헉?”
“저, 저건 설마?”
“오, 신이시여…….”
그들은 봤다. 아니, 제국의 수도에 있는 모든 시민들이 봤다. 드리스가 가지고 비장의 무기가 무엇인지를 말이다.
드리스는 넋을 잃고 멍하니 있는 황제에게 가서 말했다.
“어때? 아직도 쓸 만한지 안 한 지가 궁금하냐?”
“그럴 리가요? 이건… 이건 정말 대단합니다.”
“좋아. 그럼 준비해라.”
드리스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카일 화이트를 족치러 가자.”
드리스 엔케모니아가 카일 화이트를 목표로 정조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