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작전은 잘 성공했군.”
카일은 배 위에서 초토화되고 있는 제국의 해안선을 보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런 카일의 옆에는…….
“이게 누구 덕분일까요? 예? 누구 덕분일까요?”
카일의 의동생인 에이라가 있었다.
다만 그녀의 모습이 평소와 달랐다.
항상 단정한 관료 복장은 입고 있던 그녀였지만 지금은 화려한 제복에 머리에는 왕관을 쓰고 손에는 왕권을 상징하는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일국의 여왕으로 보이는 차림을 한 그녀를 보고 카일이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하나도 안 어울리네?”
“보통 잘 어울린다고 말하지 않아요?”
“응. 안 어울려.”
“아오… 진짜 같은 왕 됐는데 짬 취급도 안 해 주고 진짜 서러워서 내가…….”
에이라가 발을 동동 구르는 모습을 보고 카일은 피식 웃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하자면…….
애당초 카일이 에이라와 함께 세운 ‘작전’은 간단했다.
제국의 넓은 영토를 공략하기 위해서 전선을 최대한 넓게 가져가는 포위 작전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빅토르가 남쪽에서 선빵을 때리고 전쟁을 수행하는 와중에 카일과 화이트 공국은 포위망을 구성하기 위한 작전에 최선을 다했다.
우선 검은 바람이 이끄는 투란의 전사단의 최정예를 북쪽의 대초원으로 이동시켜서 투란족을 동원했다.
다행히도, 이전에 카일이 검은 바람을 고향으로 한 번 보냈을 때 검은 바람은 이미 굵직굵직한 부족들을 많이 접수한 상태였다.
그들을 규합해서 군사를 모으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어려운 것은 그렇게 규합한 군사들에게 보급할 수 있는 무기와 식량을 공급하는 것이었는데 그 부분에서 화이트 공국의 풍족한 재정이 빛을 발했다.
남방 대륙과의 중계 무역을 통해서 벌어들인 막대한 돈과 식량, 그리고 총체적으로 향상된 생산량은 10만에 달하는 투란족에게 충분한 군수 물자를 공급할 수 있었다.
유일한 문제점은 이만한 물량을 북쪽으로 이송하는 것이었다.
10만이 넘는 투란족을 무장시키기 위한 군수 물자를 이송하면서 루마니스 제국군의 영토를 가로지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 부분은 에이라가 나서서 해결했다.
싱카라 연합 제국의 다른 국가의 영토를 통해서 이동하면 약간 우회하기는 해야 하지만 안전하게 북부의 대초원까지 물자를 이송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설령 전쟁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해도 같은 싱카라 연합 제국의 일원인 그들은 자국의 영토를 가로지르는 보급 부대를 용인해 줘야 했다.
가뜩이나 전쟁에 참여하니, 마니 간을 보는 시점에서 이걸 막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북부의 대초원에는 화이트 공국의 지원을 받아서 훌륭하게 중무장을 갖춘 투란족의 대군이 편성된 것이다.
이로서 북부와 남부 양쪽에서 제국을 공격할 수 있는 기반을 갖췄지만…….
“아직 부족해요. 하려면 더 확실하게 해야지.”
에이라는 그렇게 말하면서 카일에게 해군 병력을 동원하자고 했다.
해군을 이용해서 루마니스 제국의 서쪽 해안선을 공격하고 상륙 작전을 펼쳐서 적의 허리를 끊어내자는 것이다.
“제국은 남과 북, 그리고 동쪽에 다른 싱카라 연합 제국의 참전을 경계하고 있지만 서쪽의 해안선은 완전히 무방비일 게 뻔해요. 거기를 공격할 수 있다면 치명타를 먹일 수 있어요.”
“좋은 작전이긴 하네. 굉장히 좋은 작전이긴 해.”
“당연하죠.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도 이렇게 해서 통했다고요.”
“대놓고 표절하는 건 상관없지만 그보다… 루마니스 제국의 서쪽 해안선에 어떻게 해군을 보내지? 아니, 보내는 건 둘째 치고 보급을 유지하는 게 불가능할 텐데?”
루마니스 제국의 황제와 귀족들이 모두 바보라서 서쪽 해안선에 신경을 안 쓰는 게 아니다.
화이트 공국의 해군이 루마니스 제국의 서쪽 해안선을 공격하기 위해서는 남쪽의 해역을 크게 돌아서 대륙의 서쪽으로 향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세비아 왕국, 베르나도 왕국의 해역을 통과해야 하는데, 그 나라들이 자국의 해역을 통과하는 화이트 공국의 해군을 묵과할지도 의문이고, 설사 백번 양보해서 지나가게 해 준다고 해도 그 먼 거리에 군사를 보내고 보급을 유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런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제국은 서쪽을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인데…….
“바로 그럴 때 ‘딱!’ 하고 뒤통수를 쳐 주면 잘 먹힌다니까요. 나폴레옹이 알프스 넘을 때처럼 말이죠.”
“너 전략의 80%가 표절이구나.”
“크흠, 내 사전에 불가능이란 단어는 없어요.”
“사전에 그렇게 쉬운 단어가 없으면 불량품이지. 환불받아라.”
“크흠, 어쨌든 제국이 서부 해안선에 해군 전력을 투입 시킬 수만 있다면 이 전쟁에서 가장 강력한 한 수가 될 거예요. 그래요? 안 그래요?”
“그건 알지만…….”
“스톱! 부정적인 의견은 그만두고 결과만 놓고 말해 봐요. 그래요? 안 그래요?”
“…….”
“말해 보라니까요. 그래요? 안 그래요?”
“…….”
강압적으로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에이라를 보며 카일은 생각했다.
‘이 녀석, 예쁘고 능력 있는데도 남자 안 생기는 이유가 다 있었군.’
하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얘 말도 일리는 있어.’
해군은 화이트 공국에서 가장 강력한 전력 중에 하나다.
해적을 토벌해서 해역을 평정하고 남대륙과의 무역을 위해서 꾸준하게 증강시켜 온 해군 병력을 제국의 서부 해안선에 보낼 수만 있다면 강력한 한 방이 될 것은 분명했다.
“그래. 보낼 수만 있다면 대찬성이다. 어디까지나 보급선을 유지할 수 있다면 말이야.”
“그럼 됐어요.”
에이라는 지도의 한 부분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여기 우리가 먹죠.”
“거기는… 레드로즈 공국? 네 고향이잖아.”
“맞아요. 여기를 먹어서 우리 걸로 만든 다음 보급선을 유지하는 거예요.”
“…….”
카일은 침묵했다.
하지만 침묵의 의미는 이전과 달랐다.
‘이 녀석… 꽤 괴물이었구나.’
에이라의 이번 계책은 카일이 생각하기에도 기발한 한 수였다.
레드로즈 공국은 루마니스 제국의 서남쪽에 위치한 작은 나라다. 같은 공국이라고 해도 한창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화이트 공국과 달리 레드로즈 공국의 국력은 실제로 빈약하기 짝이 없다.
루마니스 제국에 완전히 종속된 나라여서 해마다 무거운 세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나라 자체가 가난하다.
대륙의 다른 왕국에서도 레드로즈 공국과 외교적인 대화를 나눌 때면 제대로 된 나라로 취급해 주지 않을 정도다.
그런 약소국이었지만 일단 독립된 국가이다.
또한 그 위치가 절묘하기 때문에 협조를 얻어내기만 하면 해군에게 물자를 보급하기 위한 보급 기지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으로…….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나는 이 나라의 공주예요.”
“그래, 그랬지.”
“레드로즈 공국이 아무리 약하고 X밥 같은 국력의 국가라고 해도…….”
“공주님치고는 말이 너무 저렴한 거 아니냐?”
“뭐 어때요? 내가 홍길동이야?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하고 X밥을 X밥이라고…….”
“아니, 됐다. 하던 말 계속하자.”
“예. 어쨌든 나를 앞장세워서 레드로즈 공국의 왕실을 제압하고, 나를 여왕으로 내세워서 귀족원을 제압하면 소리 소문 없이 쓱 하고 국가를 차지할 수 있어요.”
“너 굉장히 나쁜 놈 같아.”
“뭐 어때요? 현재의 레드로즈 공왕의 뒤통수 때리는 데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안 가질 수 있어요. 나를 먼저 노예로 팔아 치운 게 누군데?”
원래 레드로즈 공국의 공주였던 에이라가 어느 날 갑자기 납치, 감금되어서 노예로 팔려 갔던 사건의 배후는 그녀의 친오빠였다.
그리고 그 오빠가 지금 레드로즈 공국의 공왕으로 취임해 있다.
“누군가 그랬죠. 리벤지는 차갑게 먹어야 맛있는 음식이라고.”
“…….”
싸늘하게 미소 짓는 에이라를 보고 카일은 생각했다.
‘어지간하면 얘는 적으로 돌리지 말아야지.’
그렇게 말이다.
그 후에는 일사천리였다.
카일은 특수부대와 발레리아와 장미 기사단을 은밀하게 레드 로즈 공국까지 보내서 공국의 왕실을 빠르게 제압했다.
에이라의 오빠인 공왕을 비롯해서 왕실 대부분을 공격해서 사로잡은 후 노페이스를 공왕의 모습으로 카피시켰다.
그 후에는 합법적으로 에이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반발할 것 같은 귀족들은 사전에 돈으로 포섭하거나 조용하게 처리해 버렸다.
나라 하나를 한 달 남짓한 시간에 접수해 버린 것이다.
보통의 나라를 이런 방식으로 접수하는 건 어려운 일이지만 레드로즈 공국은 원래 국가 자체가 워낙 소국이었고, 에이라 본인이 원래 왕실의 공주였다.
심지어 그녀는 공주 시절에 너무 뛰어난 재능으로 인해서 레드로즈 공국 역사상 처음으로 여왕이 탄생하는 게 아니냐는 구설수가 돌았을 정도였다.
그랬던 그녀가 수년 만에 장성하여 아름다운―겉만 보면―모습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런 그녀에게 오라버니인 현 국왕은 스스로―대외적으로는―그녀에게 왕위를 양보했다.
이런 스토리텔링이 가능했기 때문에 나라를 손쉽게 접수할 수 있었다.
그 후에는 속도가 관건이었다.
보급 기지로 사용할 수 있는 위치를 확보한 이후에는 서둘러 여기에 보급물자를 이송해야 했다.
아무리 레드로즈 공국이 소국이라서 대륙의 관심에서 소외받고 있다고 하지만 그래도 왕위가 바뀌었다는 정보가 루마니스 제국의 귀에 들어가면 좋지 않았다.
그러니 그 소식을 최대한 숨기면서 최대한 빠르게 보급물자를 날라야 했다.
해군은 물론이고, 화이트 공국에서 가용 가능한 대부분의 선박을 동원했다. 그것도 모자라서 조나라의 무역선을 돈으로 고용해서 그들에게도 물자의 이송을 부탁했고, 중간에 텔레포트 능력이 있는 능력자들까지 대거 동원했다.
그렇게 대규모의 물자를 이송하는 도중, 빅토르와 드리스의 일전이 귀에 들어와서 카일이 황급하게 참전하기는 했지만 그때쯤에는 이미 모든 준비가 끝난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 직후, 모든 준비가 끝난 카일과 화이트 공국은 드디어 작전에 돌입했다.
그 결과 완성된 것이 루마니스 제국의 3면 국경선을 모두 때리는 집중 포위망이었다.
남쪽이 빅토르가 이끄는 삼국 연합군.
북쪽의 투란 기마부대.
서쪽의 화이트 공국&레드로즈 공국 연합군.
삼면의 어느 하나도 가볍게 대처할 수 없는 공격들이었다.
거기다 사실상 동쪽의 국경지대 역시 마냥 비워 놓을 수 없었다.
동쪽은 싱카라 연합 제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다.
현재 싱카라 연합 제국은 다른 삼국의 이탈을 묵인하며 중립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들 역시 언제든 이 전쟁에 한 발 끼워 넣을 수 있다.
애당초 두 제국의 국경지대는 항상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결국 루마니스 제국은 네 방면에 모두 적을 두고 방어군을 편성해야 하는데… 딱, 잘라 말해서 그건 불가능하다.
“방위선을 뒤로 물려라. 남부 전선을 크게 뒤로 물리고 병력의 3분의 1을 중앙으로 귀환시켜라.”
“예, 알겠습니다.”
“폐하. 북부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미 편성된 안토니스 후작이 이미 편성된 군대와…….”
“철군시켜라. 북부의 영주들에게는 각지에서 자신의 영지를 최우선으로 지키라는 명령을 내려라.”
“폐하. 그건…….”
“명령대로 하라. 이론은 받지 않겠다.”
“예, 폐하.”
황제의 명령은 사실상 북부를 버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람이 살려면 지켜야 할 우선순위가 있는 법이다.
팔이나 다리 하나가 떨어져 나가면 엄청난 고통과 향후 영구적인 불편함이 따르겠지만 그래도 살 수는 있다.
하지만 심장을 잃으면 생명 그 자체가 끝난다.
지금의 제국은 말 그대로 단장(斷腸의 결단을 내려야 할 시기였다.
‘카일 화이트…….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
황제는 자신에게 이런 결정을 내리게 한 카일 화이트를 향해서 진심으로 이를 갈았다.
제국의 황제가 된 이후로 누군가를 향해서 이 정도의 살의를 품어 본 적은 처음이었다.
“폐하. 드리스 님의 행방이 아직도 묘연합니다.”
“내버려 둬라. 애당초 뜻대로 통제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다.”
드리스는 카일과 일전을 벌인 후 갑자기 편지 한 장을 남겨두고 전선에서 실종되었다.
편지의 내용이란…….
[내가 알아서 하겠다.]
이게 다였다.
당연히 황제는 엄청나게 분노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적어도 이 전쟁에서 발을 뺀다고 하지 않은 이상, 드리스는 제국의 편에서 싸워줄 것이다.
그렇다면 자기 뜻대로 행동하게 내버려 두는 게 좋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내린 결론이…….
“각 전선은 수비를 뒤로 물려서 전선을 좁히고 방어에 주력해라. 그 틈을 타서 중앙군이 적을 각개 격파 한다. 짐이 친정하겠다.”
“예, 폐하.”
제국의 모든 전력을 끌어모아서 사방의 적들을 하나씩 각개 격파 하는 것.
그것이 황제의 결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