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후퇴! 후퇴!”
“서둘러라. 최대한 빠르게 이탈한다.”
“다리가 보이지. 이 X새끼들아! 살고 싶으면 뛰어!”
루마니스 제국군과 고르시파 왕국군.
양쪽의 군사들은 모두 지휘관들의 쌍욕을 들으면서 뛰고 또 뛰었다.
일단 초인들의 전투가 시작되면 일반 병사들은 그 전쟁터에 존재하고 있을 이유가 없다. 무장을 아무리 튼튼하게 하든 평소 군기를 아무리 엄중하게 잡은 정예군이든 간에 마찬가지다.
그냥 짚으로 만들어 놓은 허수아비를 세워 놓는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다.
물론 그런 병사들을 희생양으로 갈아 넣어서 초인들의 힘을 소진하게 만든다는 전략도 있기는 했지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전투는 그런 전략을 시도할 엄두도 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빅토르가 아끼는 심복들과 합세해서 합공을 하자 드리스 엔케모니아도 진짜 마법사로서의 자신의 역량을 발휘했다.
그리고 그것은 실로 무시무시했다.
쉬지 않고 터져 나오는 폭음과 화염, 뇌전과 얼음의 폭풍은 그야말로 재해(災害)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규모였다.
고작 인간 한 명이 저런 파괴력을 발휘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에 맞서고 있는 세 명 역시 인간을 초월한 초인이며 또 던전에서 얻은 아티팩트로 중무장을 하고 있기에 그런 괴물을 상대로 어찌어찌 버티고는 있었다.
하지만 일반 병사들은 솔직히 어느 쪽이 이기고 있는지 파악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전투의 반경이 넓고 파괴적이었다.
‘제길, 뭐 이런 괴물이…….’
‘어떻게 우리 셋을 상대하면서도 밀리지 않을 수 있지?’
빅토르의 두 심복. 펜닐의 권속으로 수인화를 한 남자는 챈들러였고 오러 출력 갑주형 아티팩트를 입은 남자는 파울로였다.
이 둘은 빅토르와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란 동년배로 그들의 부친 대부터 고르시파 가문에 충성을 다해 온 충복들이었다.
빅토르 역시 그들의 실력과 충성을 믿고 있기에 던전에서 나온 아티팩트를 이 둘에게 허락해 준 것이다.
실제로 아티팩트를 사용하는 시점에서 이 둘의 전투력은 그랜드 마스터인 빅토르의 아래라고 볼 수 없다. 즉, 지금 드리스는 그랜드 마스터 세 명을 상대로 싸우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어가고 있는 것은 드리스였다.
셋의 공격은 드리스에게 전혀 맞지 않았으며 드리스가 한 번씩 손을 휘저을 때마다 광범위하게 터져 나오는 마법 공격에 셋은 자기 몸을 지키기도 급급할 정도였다. 심지어…….
“제길, 안 죽이고 잡으려니 개빡세네.”
전투 도중에 드리스가 한 이 한마디는 세 명의 전의를 뭉텅이로 깎아 버렸다.
‘인간이… 인간이 아니야.’
‘젠장, 오늘 죽는 건가?’
챈들러와 파울로는 저 괴물을 상대로 이길 수 없음을 직감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전하는 지켜야 한다.’
‘우리가 희생양이 된다면 전하가 몸을 피할 시간 정도는 벌 수 있을 거야. 아니, 있어야 해.’
그렇게 결심한 둘이 눈빛을 교환했다.
코흘리개 시절부터 평생을 함께한 둘은 눈빛을 마주한 것만으로도 서로의 뜻을 읽었다.
“전하,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끝까지 모시지 못하는 점을 사죄드립니다.”
둘은 그렇게 말하더니 드리스를 향해서 무모하게 돌격을 감행했다.
“안 돼! 멈춰어어!”
빅토르는 그런 둘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알고 목이 터져라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우어어어어어!”
“죽어라아아아!”
둘은 폭풍처럼 쏟아지는 드리스의 공격 마법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며 돌격해 갔다.
죽어도 좋으니 드리스에게 한 방 제대로 먹여서 빅토르가 무사히 몸을 피할 수 있게 하겠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런 둘이 지척에 도달하자 드리스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딱 걸렸다.”
그리고 드리스의 손가락이 딱 하고 튕겨지자 둘의 발밑에서 숨겨져 있던 마법진이 드러났다.
“함정 카드 발동이다, 이 시키들아!”
그리고 마법진의 마법이 발동되자 지면에서 빛의 쇠사슬이 뻗어 나와서 용맹하게 돌격하던 두 전사의 몸을 칭칭 구속해 버렸다.
“으으윽…….”
“크… 크으으으…….”
둘의 몸은 완벽하게 구속되었고 드리스는 그런 둘을 보고 비웃으며 말했다.
“힘 써봐야 소용없다. 이 드리스 엔케모니아 님이 심혈을 기울여서 만든 구속 마법이니 말이야.”
그리고 드리스는 멀리 떨어져서 이 상황을 보고 있는 빅토르를 보고 말했다.
“진부한 말 하나 하지. 얌전하게 항복하지 않으면 이 둘의 목숨을 보장할 수 없다. 음, 이런 인질극 한 번쯤 해 보고 싶었어.”
그런 드리스에게 빅토르가 분통 터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위대한 대마도사라는 자가 인질극이라니 부끄럽지도 않소?”
“저어어어어언혀!”
“…….”
일순간 빅토르는 생각했다.
‘패주고 싶다.’
그랜드 마스터의 평정심도 깨트릴 정도로 얄미운 표정이었다.
그리고 드리스는 귀를 후비면서 말했다.
“세상을 말이지. 합리적이고 편하게 살아야지 괜히 이것저것 가리면서 불편하게 살면 못 써.”
“빌어먹을…….”
“욕했네. 한 대 맞자.”
그리고 드리스가 빅토르가 있는 쪽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빅토르는 순간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한 발자국이라도 물러나면 네 부하들 죽인다.”
이 말에 발이 멈췄다.
평범한 부하들이라면 모르겠지만 챈들러와 파울로는 빅토르도 쉽게 버릴 수 있는 인물이 아니었다.
드리스는 빅토르가 멈추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현명하군. 그럼 본론으로 넘어가서…….”
드리스는 구속당해 있는 둘을 흘깃 보며 말했다.
“던전에서 얻은 보물을 다 넘겨라. 그리고 던전의 최종 공략에 나온 존재에 대한 정보도 넘겨.”
“그게 왜 필요한 것이오?”
“나한테 필요하거든.”
당연한 말이었다. 빅토르는 순간 멈칫했다가 다시 질문했다.
“당신 정도의 실력이라면 자력으로 던전을 공략할 수 있지 않소? 그런데 어째서 내가 가지고 있는 전리품에 집착하는 것이오?”
그러자 드리스가 처음으로 멈칫했다. 그리고 표정을 와락 구기더니 말했다.
“제길, 누구는 그 생각 안 했겠냐? 할 수 있다면 진작했지.”
“…그게 무슨.”
“됐어. 그런 게 있어. 넌 그냥 닥치고…….”
“죽어라.”
하늘에서 떨어진 거대한 대검이 드리스의 말을 잘랐다.
콰아아앙!
건축물의 기둥이라고 해도 믿을 것처럼 거대한 대검은 지면에 강하게 틀어박혔다.
이런 거대한 대검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구릿빛 피부의 거한의 정체는 한 명밖에 없었다.
“검은 바람!”
빅토르가 검은 바람을 바라보고 외쳤다. 그리고…….
“아, 진짜… 한꺼번에 안 나와? 니들이 무슨 양파야? 마왕이야? 죽어도 제2, 제3의 누군가가 계속 쳐 나와야 흥행이 되는 시리즈물이냐고?!”
드리스는 잔뜩 성을 내며 소리쳤다.
그리고 그런 그의 말에 부응하듯이 누군가가 말했다.
“원한다면 그렇게 해 드리지.”
그렇게 말하면서 사방에서 몇 명의 인간들이 나타났다.
아름다운 금발의 하프 엘프와 붉은 머리카락의 여기사 그리고 그들을 모두 거느리고 나타난 남자는…….
“넌 또 뭐하는 새끼야?”
“카일 화이트라고 합니다. 이 X 같은 새끼야.”
카일이었다.
“허어어… 이 새끼, 말하는 것 좀 보게?”
“…….”
드리스는 카일을 향해서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바라봤다.
카일은 그런 드리스의 표정에 기가 죽기는커녕 진심 어린 살기를 담아서 째려봤다.
“배짱 죽이네. 내가 누군지 알기는 아냐?”
“알 게 뭐야?”
물론 카일은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다.
상대가 드리스 엔케모니아라는 것을 알았기에 급하게 작전을 멈추고 원거리 텔레포트 능력자를 다수 동원해서 최소 최대의 전력으로 여기까지 온 것이니 말이다.
사실 빅토르가 전쟁에서 지건 말건 카일은 작전에 집중하려고 했다. 하지만 드리스 엔케모니아라는 이름은 카일이 당초의 계획을 수정하면서까지 움직여야 하는 무게를 가지고 있다.
지금 여기서 저 재수 없이 쪼개고 있는 양아치 대마도사 한 명만 잡으면 사실상 루마니스 제국은 끝장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검은 바람, 발레리아, 아리시아라고 하는 카일이 데리고 있는 최강의 전투력을 동원하고 카일이 ‘직접’ 온 것이다.
아직 세상에 공개한 적이 없는 비장의 수단을 동원해서라도 놈을 끝장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해서 현장에 도착한 카일의 눈에 보인 건 자신의 장인이 되는 빅토르의 대핀치였다.
카일 입장에서 빅토르는 가족이었다.
비록 그 범위가 아슬아슬하긴 했지만 그런 장인의 위기에 카일이 눈이 도는 게 당연했다.
“만나면 할 말이 많았는데…….”
“난 별로 없는데.”
“다 필요 없다. 그냥 죽어.”
그렇게 말하며 카일이 신호를 보내자 아리시아가 앞으로 튀어 나갔다.
핏!
초신속의 일격.
아리시아의 능력상 그 전투력은 몬스터보다는 대인전에서 더 빛을 발한다.
9서클 대마도사라고 해도 목이 잘리면 죽는 건 똑같으니 말이다.
“깜짝이야. 죽는 줄 알았네.”
다만, 그런 아리시아의 섬광 같은 일격을 드리스는 피해 버렸다.
다만 이제까지와 달리 그가 입고 있던 셔츠의 앞섶이 약간 잘려 있었던 것이 유일하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순수하게 속도만 놓고 본다면 아리시아의 공격이 빅토르보다 훨씬 더 빠르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피하다니.”
그리고 아리시아 역시 무척 놀랐다.
확신을 가지고 휘두른 일격이었는데 그걸 피한 것이다. 그것도 마법사 나부랭이가 말이다.
카일은 그런 모습을 보고 말했다.
“방심하지 마라. 상대는 바닥을 알 수 없는 괴물이다.”
“예, 주인님.”
아리시아는 마음을 다시 가다듬었고 발레리아와 검은 바람 역시 카일의 앞쪽에 검을 세워서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카일이 빅토르를 흘깃 보더니 말했다.
“챈들러 경과 파울로 경을 챙겨서 자리를 피해 주십시오.”
“내가 돕지 않아도 되겠나?”
“죄송하지만 방해입니다.”
“…어쩔 수 없군.”
빅토르는 카일의 말에 순순히 따랐다.
사실 빅토르는 카일이 가지고 있는 비장의 수단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에 하나였다. 예전에 사적인 자리에서 만남을 가지고 카일이 슬쩍 보여준 적이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카일이 그 힘을 본격적으로 사용해서 싸운다면 확실히 말해서 자신은 방해가 되긴 할 것이다.
“흐으읍!”
빅토르는 자신의 부하들을 구속하고 있는 마법진의 구속을 깨트려서 부하들을 구했다.
그리고 그대로 둘을 챙겨서 자리를 피했다.
빅토르가 그런 행동을 할 때까지 드리스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자기 앞에 있는 카일과 그 부하들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상하네. 특별히 무슨 힘이 느껴지는 건 아닌데. 마나는 없고, 오러는 빈약하고…….’
사실 드리스는 카일이 누군지 잘 모른다.
카일 화이트라고 하면 전 대륙에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인이지만 세상을 등지고 자기 마탑 안에 처박혀 있는 방구석 폐인에게는 그 이름을 알 리가 없었다.
하지만 카일이 누구인지 모름에도 불구하고 드리스는 카일을 가볍게 볼 수 없었다.
9서클 마법사의 직감이 맹렬하게 경고를 했다.
조금 전에 그랜드 마스터의 초입에 들어가 있던 빅토르보다 카일이 훨씬 더 위험하다고 말이다.
그 직감 때문에 빅토르가 뻔히 도망가는 것을 보고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제길, 생각하니 개빡치네.”
드리스에게 있어서 빅토르는 굉장히 중요한 인물이다. 그런데 그게 도망가는 걸 보고만 있어야 한다는 현실을 자각하자 굉장히 짜증이 났다.
“야, 그냥 뒤…….”
다시 한번 말이 끝나기 전에 아리시아의 일격이 드리스를 노렸다.
드리스는 그 공격을 피했다.
다만 이전에 다른 이들을 상대할 때처럼 몸을 움직여서 피하는 게 아니라 단거리 공간 이동인 블링크 마법을 이용해서 피했다. 전투에 임하는 자세가 훨씬 더 진지해졌다는 뜻이다.
그리고 허공으로 떠올라 양손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볼케이노 어스퀘이크!”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한 일대의 지면에 진동하더니…….
펑! 퍼퍼퍼펑!
지면에서 용암이 솟구치면서 화산이 폭발했다.
“주인님!”
아리시아는 황급하게 외치며 카일을 끌어안고 몸을 움직였다. 그리고 검은 바람과 발레리아 역시 몸을 피했다.
하지만 상대도 만만치 않았다.
“어딜 도망가!”
드리스가 손을 휘젓자 그냥 솟구치며 분출하던 용암이 형체를 이루더니 뱀처럼 꿈틀거리며 카일을 추격했다.
살아 있는 생물처럼 집요하게 자신을 노리는 드리스의 공격에 검은 바람이 나섰다.
“흐으으읍!”
검은 바람의 몸이 크게 거대화되었다.
높이만 20미터가 넘는 거인이 된 검은 바람의 모습에 이번에는 드리스가 당황했다.
“뭐? 뭐지?”
카일 화이트 대공의 측근 검은 바람의 거대화 능력.
이미 비밀이라고 하는 것도 우스울 정도로 유명한 능력이었지만 드리스는 초능력의 존재 자체를 몰랐다. 그리고…….
“하아아아압!”
검은 바람이 거대한 대검을 옆면으로 휘둘러서 용암의 뱀을 후려쳤다.
퍼어어어어엉!
거대한 용암의 뱀이 산산조각으로 터지면서 사방으로 그 잔해를 흩날렸다.
“이런…….”
드리스는 황급하게 방어막을 쳐서 자신에게 날아오는 용암의 잔재를 막았다.
다행히도 그의 실드는 검은 바람이 쳐서 날려 보낸 용암의 잔재를 빈틈없이 막아 주었다. 다만 그 덕분에 앞의 시야가 막혀 버리고 말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발레리아가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죽어라!”
콰아아앙!
그녀의 일격이 드리스의 실드를 두들겼다.
물론 드리스의 실드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랜드 마스터인 빅토르의 일격도 막아낸 그가 마스터인 발레리아의 공격에 흔들릴 리가 없지 않은가?
“용기는 대단하군. …그리고 몸매도.”
실드로 적의 공격을 막은 드리스는 비웃음을 가득 머금고 말했다.
“마나에 맹세코 진심을 담아서 말하는데 너 슴가 쩐다.”
“…….”
“혹시 비키니 아머 입을 생각 없어? 내가 옛날에 만들어 놓은 아티팩트 있는데 입는다고 약속하면 준다.”
상대를 비웃으며 끊임없이 도발하는 게 드리스의 전투 전략이자 취향이긴 했다.
하지만 그것도 통하지 않는 상대가 있는 법이다.
발레리아는 드리스의 희롱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 대신 그의 실드에 매달린 상태로…….
“중력 백 배.”
“응? 뭐… 으아아아아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