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참자. 참아야 해.’
황제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취급 주의서를 떠올리며 심호흡을 하고 말했다.
“뵙게 되어서 영광입니다. 저는 초대 루마니스 제국의 건국 황제 카를로스 바이칼 알렉산드로 루마니스의 자손이며 현 제국을 이끌고 있는 아지무트 시비르 갈프… 큭!”
따악.
“길다. 길어. 자기소개 하는데 아주 한나절 걸리지? 어디 취업 못 해서 환장한 슬픈 청춘의 자소서야? 엉?”
“으으윽…….”
황제는 자기 머리에 느껴지는 얼얼한 고통에 눈살을 찌푸렸다.
평생을 살아오면서 누군가에게 맞아 본 적은 처음이었다.
“어쨌든 네가 현 황제다 이거 아니야. 맞지.”
“그렇소.”
“진작 그리 말할 것이지. 그래서 왜 왔냐?”
“너무 무례한 것 아니오?”
황제가 울컥해서 따지자 드리스 엔케모니아가 말했다.
“그래서 뭐? 꼽냐? 한판 뜰래?”
“…….”
당연히 그럼 뜹시다. 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런 황제를 보고 드리스는 지겹다는 듯이 말했다.
“보나 마나 너도 뭐 필요한 게 있어서 부탁하러 온 거 아니냐? 그런데 모가지가 뭐 그리 뻣뻣해?”
“아니 그건…….”
“됐다. 내가 도라에X도 아니고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귀찮으니까 빨리 필요한 거나 말해 봐. 뭐가 필요한데? 아티팩트? 스크롤? 아니면 발기 부전 치료약?”
“누가 그런 걸 필요해서 여기까지 오겠소!”
마지막 말에 황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드리스가 말했다.
“니 할애비.”
“…….”
“그거 아니었으면 니 애비도 없고 너도 없다.”
“…….”
알고 싶지 않은 황실의 비사였다.
황제는 마음을 진정시키고 드리스에게 말했다.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어서 온 것은 맞습니다.”
“그럼 말해 봐. 뭐가 필요한데.”
“해주셨으면 하는 일이 있습니다. 지금 제국은 싱카라 연합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서 미증유의…….”
“짧게 말해라.”
“전쟁터에 가서 적을 물리쳐 주십시오.”
“싫어.”
“…….”
“다른 용건 없어? 그럼 가라.”
“잠, 잠시만요. 저는 현 제국의 황제로서 당신에게 세 번의 명령을 내릴 권리가 있습니다.”
“그런 거 없어. 멍청아.”
드리스는 가볍게 황제의 권한을 무시했다.
“그게 무슨…….”
“내가 그나마 충성 비슷한 거 했던 건 카를로스 그 녀석뿐이었지, 그 후에 애들은 영 정이 안 갔어. 특히 카를로스 손자였던 놈은 왜 그렇게 싸가지가 없던지.”
“말을 삼가주시오. 그분은 성군으로 제국의 역사서에 이름을 남기신 분이오.”
“걔가 성군 된 거, 100% 나 덕분이다. 어린놈이 싸가지가 아주 판타스틱해서 싹이 노랗다 못해 무지갯빛이었지. 그거 사람 만든다고 진짜 애 많이 썼다.”
황실에 알려지지 않은 비사지만 초대 황제의 손자는 영 인간이 아니었다.
노력은 안 하고 욕심은 많고 자존심만 강하고 이런 사람은 황제가 되면 안 된다, 라는 조건을 다 갖추고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는 건국 황제 이후 루마니스 제국의 전성기를 만들어 낸 성군으로 역사서에 이름을 남기고 있다. 그게 누구 덕분이냐 하면…….
“진짜 걔 사람 만든다고 오만 삽질 퍼레이드를 안 해 본 게 없었다. 하아아… 생각하니 킹 받네.”
“뭘… 받는다는 겁니까?”
“그런 게 있다. 어쨌든, 그 새끼 때문에 내가 너희 황실 애들한테는 학을 뗐어요. 그래서 은퇴하고 그냥 물러나려고 하는 게 그 밑에 애들이 얼마나 징징거리면서 안 된다고 로브 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지던지, 아호… 생각하니 또 빡치네. 내가 황희야? 엉? 종신 정승이냐고? 왜 사람 은퇴를 못 하게 하고 지랄이야. 이 X 같은 새끼들아!”
“…….”
황제는 드리스가 하는 말 중간중간을 알아듣지 못했지만 그가 황실에 쌓인 짜증이 많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내가 은퇴하는 조건으로 황제 한 명당 세 개 정도는 얘기를 들어 준다고 했지.”
“맞습니다. 그렇다면…….”
반색하는 황제에게 드리스가 말했다.
“그런데 내가 얘기를 들어 준다고 했지. 너희들 명령에 따른다고 말하지는 않았어. 해 주고 말고는 100% 내 마음이지 뭐.”
“그, 그런.”
황제는 입을 쩍 벌렸다.
그런 사정이 있는 줄은 몰랐다.
“하지만 역대 황제분들의 소원은 모두 들어주시지 않았습니까?”
“소원이라고 해도 별것 없었거든. 기껏해야 말 안 듣는 귀족 애들 군기 좀 잡아 달라거나, 아티팩트 몇 개 만들어 달라거나 발기부전…….”
“그건 이미 들었습니다.”
“뭐, 그런 것들은 그냥 들어 줄 수 있지. 하지만 전쟁? 야. 이건 좀 아니지. 내가 이 나이 먹고 전선에 나가서 나를 따르라. 하고 놀아야겠냐?”
“드리스 님. 당신이 전쟁에 나서주지 않으면 700년 역사의 제국의 존망이 위태로울 수도 있습니다.”
황제가 그렇게 말하자 드리스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700년 정도면 국가 수명치고는 딱 좋네. 멸망하면 거기까지인 거지, 뭐.”
“그런, 당신은 초대 황제와 함께 건국한 제국에 어떤 애착도 없는 겁니까?”
“옛날에는 좀 있었지만 지금은 좀……. 야, 솔직히 700년이다. 700년. 평생 사랑하겠다고 맹세하고 결혼한 부부도 그쯤 되면 서로 징글징글 할 법한데 내가 700년이 지나도록 ‘오, 나의 사랑하는 제국’ 이러고 있어야겠냐? 그거 사이코야. 편집증이라고. 그런 애 보면 같이 놀지 마.”
드리스가 하는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황제의 속을 뒤집어 놓고 있었다.
‘취급 주의서에 정상이 아니라고 적혀 있기는 했지만…….’
젊은 황제는 황위에 즉위하고 나서 그 어느 때보다 강한 인내심을 요구받고 있었다.
사실 참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상대는 이미 인간의 상식을 한 걸음 정도 벗어난 초인이 아닌가? 이런 인간을 상대로 권력자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초대 황제는 본인 스스로도 그랜드 마스터였기 때문에 어느 정도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던 모양이지만 말이다.
권위가 통하지 않는 상대와는 거래를 해야 한다.
그렇다면 황제는 이 남자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전쟁에서 활약해 주신다면 더 넓은 영지와…….”
“너나 해라.”
“…….”
안 되는 셈 치고 해 본 제안이긴 하지만 역시 안 먹혔다.
하긴, 황제가 생각해도 돈이나 작위로 움직일 인물은 절대 아니었다.
“혹시 원하는 것이 있다면 말해 보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들어 주겠소.”
“있지. 너만 들어 줄 수 있는 일.”
“그게 뭡니까?”
“좀 꺼져줄래?”
“…….”
진짜 바늘 하나 들어갈 틈이 없을 정도로 말이 안 통하는 인물이었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제국은 위대한 수호신인 당신의 힘이 필요합니다.”
“나 제국의 수호신 같은 거 한 적 없다니까.”
“그래도 부탁드립니다. 초대 황제와의 면을 봐서라도 제발…….”
“그 새끼하고 섣불리 친구 먹었다가 지금 수백 년째 봉사 중이다. 그만 우려먹어.”
황제는 이제 그냥 매달리며 부탁했지만 상대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든 나는 네 말을 들어 줄 생각이 없다는 의사가 완벽하게 전해졌다.
“당신이 없으면 이길 수 없단 말입니다. 빅토르는 초대 황제와 같은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초인이자 던전 공략자이기도 합니다. 놈과 맞서기…….”
“뭐? 지금 뭐라고 했어?”
귀를 후비며 심드렁하게 대꾸하던 드리스의 표정이 확 변했다.
“예. 어… 당신이 없으면 이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아니, 그거 말고 빅토르니 햄토리니 하는 애송이가 뭐라고?”
드리스가 빅토르에게 흥미를 보이자 황제는 이때다 싶어서 달려들었다.
“놈은 그랜드 마스터에 던전 공략자입니다. 원래는 우리 루마니스 제국의 귀족이었지만 자신의 가문이…….”
“잡다한 건 됐다. 그보다, 그놈이 던전을 공략했다고?”
“예. 그렇습니다.”
“방구석이 처박혀 있느라고 그런 일이 있었는지도 몰랐군.”
드리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놈이 던전을 공략했다면 거기에 걸맞은 보상을 받았겠군. 그렇지?”
“예. 그렇습니다. 그리고 그 보상을 이용해서 자신의 나라를 세웠습니다.”
“놈이 던전을 공략하고 얻은 보상에 관해서 자세한 정보를 알고 있나?”
“없습니다. 그것에 관한 정보를 계속 조사해 봤지만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그리고 드리스는 팔짱을 끼고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렸다.
“…또 헛짓… 아니, 그래도… 어차피 다른 방법도… 귀찮기는 한데……. 혹시라도…….”
눈앞에 있는 황제를 완벽하게 개무시하고 스스로 무언가를 확인하듯이 계속 중얼거리는 드리스였다.
그리고 마침내 결심을 굳힌 그가 말했다.
“전쟁에 힘을 빌려주마.”
“정말입니까?”
“그래. 대신 조건이 있다.”
“그게 뭡니까?”
“내 조건은…….”
드리스의 조건을 들은 황제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상관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됐다. 그 애송이 지금 어디 있지?”
“제국의 남부 전선에서 바라빈 케메로 후작과 대치 중입니다.”
“알겠다.”
그리고 드리스 엔케모니아라는 괴물이 전선에 투입되었다.
* * *
3국 연합군과 루마니스 제국군의 전쟁 자체는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었지만 빅토르 본인이 나서서 싸우는 전쟁터는 얘기가 달랐다.
“나를 따르라!”
“우오오오오!”
진부하기 짝이 없는 대사지만 그 대사를 하는 인물이 누구이냐에 따라서 결과는 완전히 달라진다.
빅토르가 가장 선두에 서서 그랜드 마스터의 오러 블레이드를 높이 들고 외치면 아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자신들의 왕이 얼마나 강한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빅토르는 용감하게 선두에서 돌격을 했고 그를 따르는 직속 기사단이 그의 뒤를 받치며 따라갔다.
그리고 빅토르가 적군과 부딪힌 순간…….
콰아아앙!
“크아아아악!”
“아아악!”
수백은 될 법한 제국군들이 사방으로 터져 나갔다.
“하하하하. 대어군요. 전하.”
“전하를 따르라!”
“뒤처지면 안 된다!”
빅토르의 일격에 사기가 고무된 기사단은 그대로 뒤를 따라서 전열이 무너진 제국군을 유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서 기병과 보병이 들이닥치면서 적을 일방적으로 유린했다.
적의 숫자가 두 배는 더 많았지만 그랜드 마스터라는 존재는 두 배의 숫자 차이를 무력화시키고도 남았다.
빅토르는 양 떼 사이에 던져진 호랑이처럼 날뛰었고 그 누구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상하군.”
한참 날뛰던 빅토르가 말을 멈추고 주변을 살폈다.
아군이 일방적으로 승리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빅토르는 무언가를 찾는 것처럼 두리번거렸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상황이 이상하다. 적이 후퇴를 하지 않고 있어.”
“그건…….”
말을 듣고 보니 기사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빅토르가 나선 전선의 전투는 대부분 짧고 굵게 끝났다. 빅토르가 선두에 서서 적을 유린하기 시작하면 적들은 사방으로 흩어지며 후퇴했다.
그 와중에 적의 지휘관은 자신의 존재를 숨기기 위해서 깃발도 들지 않고 갑옷도 일반 기병들과 같은 것을 입고 있었다.
즉, 후퇴를 생각하고 전투에 임했던 것이다.
비록 이길 수는 없어도 최대한 전력을 보전하겠다는 제국군의 전략이었다.
그래서 빅토르가 전쟁에서 30번이 넘는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 전쟁은 팽팽한 양상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적들이 후퇴를 염두에 둬서 움직이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맞서 싸우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저놈한테 한 번 물어볼까?”
빅토르는 한쪽에서 병사들을 상대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지휘하고 있는 제국군의 지휘관을 보고 말했다.
입고 있는 옷은 일반 기병의 갑옷이었지만 그를 중심으로 병사와 기사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지휘관임이 분명했다.
“하아아!”
빅토르는 돌격 대형에서 벗어나서 홀로 말을 몰아 목표를 향해서 돌격했다.
“막아라!”
“제길, 붙잡아!”
빅토르가 움직이는 방향을 본 기사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그랜드 마스터를 막아서는 기사들의 용맹함은 높이 살 만했지만…….
“귀찮다!”
그게 실력의 차이를 메워 주는 것은 아니었다.
빅토르는 자신을 가로막은 기사들을 보고 빠르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그를 중심으로 빛살이 뻗어나갔다. 그것은 적들의 입장에서는 죽음의 섬광이었다.
툭. 투투툭.
빅토르의 앞을 가로막은 기사들의 목이 바닥에 떨어졌다. 마치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너무나 당연하게 말이다.
“괴, 괴물이다.”
“으아아아!”
“도망 가!”
빅토르의 실력을 직접 본 병사들은 막을 엄두도 내지 못하고 좌우로 갈라졌다.
그리고 빅토르는 빠르게 질주해서 적 지휘관이 있는 곳에 도달해 지휘관이 반항하기도 전에 손을 뻗어서 그대로 지휘관의 목을 잡았다.
“크으윽…….”
적은 빅토르에게 목이 잡힌 와중에도 자신의 검을 뻗어서 빅토르를 공격하려고 했다. 하지만…….
빠카앙!!
빅토르는 검을 뽑지도 않고 자신의 주먹으로 검의 옆면을 후려쳤다.
이름 있는 장인이 공들여 만든 명검이었지만 그랜드 마스터의 주먹질은 그런 명검을 두 동강 내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빅토르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뚜둑.
“크으으그그그…….”
지휘관의 목뼈가 서서히 바스러지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그 상태로 빅토르는 지휘관에게 물었다.
“이전의 다른 놈들과 달리 너는 꽤 적극적으로 싸우더군. 왜 그랬지?”
“그. 그그그으으으…….”
“근성이 제법이군. 대답할 수 없다 이거냐?”
“끄… 으으으…….”
“반항해 봐야 고통만 길어질 뿐이다. 순순히 대답해라.”
“끄 끄그…….”
그리고 상대방의 숨이 넘어가기 직전…….
“목 졸리고 있는 놈이 대답을 어떻게 하냐? 이것도 제법 병신이네.”
빅토르의 등 뒤에서 낯선 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빅토르는 그게 누구인지 묻기 이전에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쉬이익!
빛살을 가르며 날아간 빅토르의 날카로운 검격이었지만 손에 걸리는 느낌은 없었다. 그 대신…….
“네가 빅토르냐?”
빅토르가 바라본 곳에는 2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잘생긴 젊은 청년이 한 명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