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죽, 죽여 줘. 제발…….”
제이는 사지가 뜯어진 상태로 꿈틀거리면서 말했다.
10분 전까지만 제발 살려 달라고 빌었지만 이제는 죽여 달라고 빌고 있었다. 그만큼 처참한 고통에 시달린 것이다.
코끼리도 찢어 죽일 수 있는 AP―55248의 염동력으로 사지를 하나씩 뽑혔다. 마치 어린아이가 벌레의 팔다리와 날개를 뽑듯이 말이다.
그 처참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는 제이를 보고 AP―55248는 싸늘하게 말했다.
“네놈 때문에 죽은 내 동료들은 훨씬 더 고통스러웠다.”
“그. 그건…….”
뻐어억!
AP―55248의 발이 변명하려는 제이의 안면을 걷어차 버렸다.
염동력을 싣지 않은 순순한 킥이었지만 그래도 제이의 안면 뼈를 함몰시킬 정도로 강렬한 일격이었다.
“으어어어어…….”
제이는 돌아간 턱으로 피를 줄줄 흘리면서 고통스러워했다.
‘슬슬 한계군.’
AP―55248은 염동력으로 제이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잔뜩 겁먹을 놈의 눈을 똑바로 마주하며 말했다.
“지옥에서 지켜봐라. 우리가 네놈들 세계정부를 어떻게 쓰러트리는지를 말이야.”
“우, 우이?”
턱이 망가져서 말을 제대로 하지도 못하는 제이를 보고 AP―55248이 말했다.
“내 이름은 아폴론. 위대한 그분의 뜻을 받아서 이 세계에 희망의 불을 밝힐 혁명의 불씨다.”
“아… 오애에… 우으 으으으으…….”
말을 하던 제이는 자신의 몸이 거대한 힘에 의해서 쥐어짜지는 느낌에 고통스러워했다.
아폴론이 염동력을 이용해서 놈의 몸을 말 그대로 걸레 쥐어짜듯이 쥐어짜고 있는 것이다.
“으 으으어어어…….”
제이의 비대한 몸이 비틀어 쥐어짜이면서 놈의 뼈와 근육이 뒤틀리고 입이나 코를 통해서 압착된 핏덩이들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우두두둑. 뚝 뚝.
마침내 몸에서 더 나올 것도 없을 정도로 바싹 쥐어짜진 제이는 그대로 붉은 살덩어리가 되어서 죽었다.
“지옥에서 내 동료들에게 사과해라. 개자식.”
아폴론은 제이를 참혹하게 처리하고도 마음이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만하면 그래도 조금은 한이 풀리겠지.”
아폴론은 그동안 제이의 명령 하에 죽어 나갔던 부하들을 생각하며 짧은 애도를 보냈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보낼 수는 없다.
그에게는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우선, 몸부터 치료해야겠지.”
제로의 의심을 사지 않게 스스로 망가트린 몸이었지만 이대로는 불편하다.
아폴론은 이세계에서 가지고 온 배낭을 열어서 작은 약병을 꺼내서 마셨다. 그러자…….
“흐으읍…….”
마시자마자 몸이 확 하고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더니 망가진 몸이 서서히 재생되기 시작했다. 잘린 팔과 뭉개진 한쪽 눈이 완벽하게 재생되고 인대가 파열된 무릎도 멀쩡해졌다.
태어나서 살아오면서 지금까지의 시간 중에서 가장 완벽한 상태가 된 것이다.
“훌륭하군. 이런 부분은 확실히 저쪽 세계가 더 나은 것 같아.”
아폴론이 먹은 것은 연금술사 길드에서 만든 엘릭서로 외상에 관해서는 완벽한 치료 효과를 보여주는 약이다.
그 가격이 어지간한 영지 하나 정도는 살 수 있을 정도로 터무니없이 비싸기는 하지만 말이다.
카일은 이번 아폴론의 작전 수행을 위해서 기꺼이 그 약을 조달해 주었다.
그렇게 몸 상태를 완벽하게 회복한 아폴론은 가방 안에 들어 있는 다른 물건들도 모두 챙겼다. 그러고는…….
“일단 동쪽으로 가야겠군.”
아폴론은 염동력으로 몸을 띄워서 이동했다.
이렇게 카일은 세계정부를 불태우기 위해서 아주 작은 불씨를 지구에 심는 것에 성공했다.
아주 작은 불씨 하나를 말이다.
* * *
잠시 교착 상황에 들어갔던 전쟁은 다시 확산되기 시작했다.
싱카라 연합 제국 안에서 3개국의 힘을 모은 연합군은 루마니스 제국의 남쪽 영토를 가열 차게 공격했고 루마니스 제국군은 그들의 공격을 최소한의 피해로 막아내고 있었다.
바라빈 케메로 후작은 완벽하게 준비된 저지선을 이용해서 빅토르가 이끄는 군대를 적절하게 막아내고 있었다.
덕분에 대부분의 전선을 지킬 수 있었지만 딱 하나의 전선에서는 열세를 면하지 못했다. 바로 빅토르 본인이 나서서 싸우는 지역이다.
아무리 던전 공략자에, 그랜드 마스터라고 해도 넓은 전선을 혼자서 커버할 수는 없다.
하지만 빅토르가 나서는 전선은 필승이었다.
루마니스 제국군에는 빅토르를 상대할 존재가 없었고 그가 앞장서서 정공법으로 공격해 온다면 막을 길이 없었다.
그래서 케메로 후작은 빅토르가 나타나면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기보다는 방어적인 전략으로 대응하며 전략적인 후퇴를 하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빅토르가 없는 전선 쪽에 군사들을 집중시켜서 전황을 대등하게 유지했다.
빅토르 역시 자신이 아무리 잘 싸운다고 해도 그것만 믿고 막 밀고 들어갈 수는 없었다.
적장인 바라빈 케메로 후작은 만만치 않은 전략가였고 자신이 그렇게 무대포로 나간다면 분명 무언가 함정이 준비되어 있을 것이라고 카일이 경고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위의 작전이 완료될 때까지 버티자.’
빅토르는 조바심을 내지 말고 차분하게 전쟁을 이끌어 가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반대로 조바심이 난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루마니스 제국의 황제였다.
“아직도 적들을 몰아내지 못했단 말이냐?”
“송구하옵니다. 폐하. 하지만 케메로 후작이 최선을 다해서 적을 막아내고 있습니다.”
“우리 제국의 영토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이다. 이게 그냥 막아내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할 일인가?”
“…….”
황제의 질책에 신하는 그저 고개를 숙이며 침묵했다.
사실 대륙 최강국이라고 스스로 자부하던 루마니스 제국의 입장에서 지금의 전황은 썩 좋지 않았다.
싱카라 연합국의 국가 중에서 고작 세 개가 참여한 연합군에 이렇게 쩔쩔매서야 어떻게 한단 말인가?
만약 이 상황에서 싱카라 연합 제국의 나머지 7개국이 참전을 표명한다면 어쩐단 말인가?
지금 루마니스 제국은 외교적으로 싱카라 연합 제국에 회유와 압력을 지속적으로 넣으면서 남은 7개국을 묶어두고 있다.
하지만 전황이 이렇게 질질 끌려가는 국면이 지속된다면 남은 7개국도 침묵하지 않고 참전할지도 모른다.
한 마디로 지금 루마니스 제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는 만만하게 보이면 끝이라는 말이다.
황제는 자신이 손에 들고 있는 왕홀을 지그시 바라봤다.
황제의 권한을 상징하는 왕홀.
여기에는 사실 다른 특별한 권리도 부여되어 있었다.
만약 그 권리를 사용한다면 작금의 지지부진한 전황을 한 방에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짐의 나이가 아직 이렇게 젊은데도 벌써 하나를 소모하게 될 줄이야.”
“폐하.”
“설마, 아니 됩니다. 폐하.”
“아직 우리가 불리한 게 아닙니다. 참으시옵소서. 폐하.”
황제의 말에 제국의 신하들은 깜짝 놀라서 황제를 만류했다. 황제가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충분히 짐작이 갔기 때문이다.
황제는 지금 루마니스 제국 최강 최후의 조커를 꺼내려고 하는 것이다.
“드리스 엔케모니아 님을 만나야겠다.”
제국의 황제가 직접 ‘님’자를 붙여야 할 정도의 인물이 바로 그 조커다.
드리스 엔케모니아.
루마니스 제국의 개국 공신인 동시에 인류 역사상 유일하게 진리의 영역에 도달한 대마도사.
9서클 마스터의 경지에 도달한 인물이었다.
드리스 엔케모니아.
그는 루마니스 제국의 초대 황제의 친우였으며 그를 도와서 당시 약소국이었던 루마니스 왕국을 대제국으로 일으켜 세운 대마도사였다.
그 당시 그의 경지는 이미 8서클.
인간이 마법을 연마해서 도달할 수 있는 최대의 경지라고 일컬어지는 경지였다.
아니, 8서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제국을 건국한 후 루마니스 제국을 위협하는 재앙의 붉은 용 크림슨 블레이드를 격퇴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진정한 힘을 드러냈다.
9서클 마스터.
그는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고 일컬어지던 지고의 경지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그랜드 마스터였던 루마니스 제국의 초대 황제와 대정령사였던 황후, 그리고 9서클 대마도사인 드리스 엔케모니아의 활약으로 인해서 루마니스 제국은 재앙의 붉은 용을 물리치고 대륙의 북서부에 자신의 영역을 확고하게 다졌다.
그게 루마니스 제국이 대륙 최강국의 반열에 오른 역사였다.
시간이 흘러서 초대 황제와 황후는 죽어서 흙으로 돌아갔지만 9서클 마스터인 드리스 엔케모니아는 죽지 않았다.
사실 그의 수명이 언제까지 지속될 지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인간이 9서클에 오른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참고할 만한 기록이 없었던 것이다.
다만, 계속 살아 있다고 해서 그가 제국의 국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친우였던 초대 황제에게는 충실하게 충성을 다했고, 그의 아들과 손자에게까지도 제법 활발하게 활동하며 스승이자 조언자로서 그들을 보필했지만 그 이후부터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제국은 물론이고 세상만사 모든 것에 거리를 두고 자신의 영지에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그리고 제국의 황제에게 이런 말을 남겼다.
“딱, 세 번.”
무슨 말이냐 하면 황제 한 명당 평생에 딱 세 번 정도는 부탁을 들어주겠다는 말이었다.
즉, 루마니스 제국의 황제는 생전에 세 번까지는 9서클 대마법사를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건 황제에게 있어서 진짜 중요한 비장의 카드였고 어지간해서는 함부로 사용하지 않았다.
어떤 황제는 죽을 때까지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인물도 있었다. 그만큼 아까운 능력이기 때문이다.
딱히 세 번의 기회를 써먹지 않는다고 해도 황제가 9서클 대마도사를 동원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황제의 권한은 충분하게 먹히는 법이었다.
그렇게 대단한 권한을 루마니스 제국의 젊은 황제가 한 번 써먹겠다고 하는 것이다.
아직 젊은 황제의 나이를 생각할 때 이건 너무 성급한 결정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황제의 결심은 확고했다.
‘제국과 제국 간의 전쟁이다. 여기서 쓰지 않으면 언제 쓴단 말인가?’
그렇게 마음먹은 황제는 신하들의 만류를 무릅쓰고 드리스 엔케모니아의 영지로 발걸음했다.
보통은 황제가 신하를 불러서 용무를 말하겠지만 드리스 엔케모니아는 그럴 존재가 아니다.
공식적으로는 위대한 초대 황제의 친우이자 제국의 개국 공신에게 표하는 경의의 의미이며…….
사실 황가에 몰래 전해지는 전승에 의하면 초대 황제의 손자가 무례하게 굴었다가 뒤지게 처맞았다는 사실도 황제의 발걸음에 한몫을 했다.
그렇게 황제가 직접 발걸음을 해서 도착한 곳은 인적이 드문 숲속에 지어져 있는 거대한 탑이었다.
평소에는 결계로 막혀 있어서 누구도 들어올 수 없는 장소지만 황제의 손에 들려 있는 왕홀은 이 결계를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는 열쇠의 역할도 했다.
“모두 여기서 기다려라.”
“예. 폐하.”
황제는 시종들도 모두 기다리게 하고 혼자서 거대한 탑의 안으로 들어갔다.
사실 황제 역시 드리스 엔케모니아에 관해서는 황실에 전해지는 전승으로 듣기만 했을 뿐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다.
기대 반 두려움 반의 감정을 가지고 탑의 안에 들어간 황제가 가장 본 것은 바로…….
“오… 오오오…….”
그것은 실로 장엄하다는 말이 잘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수백, 수천의 복잡한 마법진이 입체적으로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으며 그 입체 마법진의 정중앙에는 현기가 가득한 젊은 청년이 눈을 감고 명상에 잠겨 있었다.
이것이 바로 마도의 극치.
이것이 바로 마법사들이 꿈에도 그리는 정점의 일각.
이것이야말로 루마니스 제국의 위대한 수호신이자 인류 최초의 9서클 대마도사 드리스 엔케…….
“쿨…….”
…리스여야 할 터이다.
장엄한 마법진 한가운데서 쿨쿨 자고 있는 젊은 미청년을 보며 황제는 깊게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추슬렀다.
‘진정하자. 원래 이런 사람인 건 황가의 전승으로 전해 들어서 알고 있었지 않나.’
황실에는 직계 황제에게만 은밀하게 전해지는 비밀스러운 전승이 몇 가지 있다.
황실의 비밀 통로라든가 숨겨진 비자금 조성 상단, 황제 직속의 정보 단체 등등.
그중에서도 가장 극비 정보로 취급되는 것 중 하나가 『드리스 엔케모니아 취급 주의 사항』이라는 작은 노트였다.
“크흐음…….”
황제는 조심스럽게 목청을 가다듬고 말했다.
“드리스 엔케모니아 님. …엔케모니아 공작님!”
황제가 보통 공작에게 님자를 붙여서 부르지는 않지만 이 인물은 예외다.
취급 주의서에 의하면 역대 황제들 중에 반말하다가 맞은 사람도 꽤 된다고 적혀 있었다.
하지만 황제도 자신이 불러도 깨지 않고 계속 쿨쿨 자고 있는 상대를 보니 슬슬 열은 받았다.
그가 어디 가서 이런 개무시를 당해 봤겠는가?
“크흠, 드리스 엔케모니아 공작! 일어나 주시오!”
황제가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러자 마법진에서 빛이 사라지면서 허공에 떠서 푹 자고 있던 그가 지면에 내려왔다.
그리고 지면에 내려온 그가 눈을 뜨더니 황제를 보고 말했다.
“넌 뭐 하는 새끼야?”
그게 황제가 처음으로 들은 한 마디였다.